제 219장. 내 사형이 너무 강한 탓이지
“물론이지. 이 두 종류의 무인들만 없으면 공혼충이 최대 효력을 발휘할 수 있거든.”
자맥이 도도한 모습으로 말했다.
“공혼충은 아주 작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우리가 조종하는 요수를 죽여도 공혼충을 발견하지 못해. 그런데 넌 어떻게 그 비밀을 알게 된 거야? 정말 궁금하네.”
자맥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준을 훑어보았다.
양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알아 맞혀 봐.”
자맥은 화가 나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으나 감히 방자하게 굴지는 못했다.
이곳에서 천랑국의 무인들을 제외하면, 오직 양준만이 공혼충의 존재를 알고 있을 터였다. 다른 이들은 모두 천랑국의 무인들이 요수를 조종해서 싸운다고만 생각하지, 공혼충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 맞다. 그날 호숫가에서 삼라전의 제자들이 모두 네 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너만 따로 다니는 거야?”
양준이 의혹이 담긴 눈빛으로 자맥을 바라보았다.
양준의 물음에 자맥의 눈동자에는 굴욕감과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냉산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말해 줄 수 없어?”
양준의 목소리가 가라앉으며 얼굴빛도 험상궂게 변했다.
“말할 수 없는 건 아니야. 냉산도 상황을 알고 있으니 쟤한테 물어봐.”
자맥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양준은 의아하게 여기며, 고개를 돌려 냉산을 바라보았다.
“그건 내가 알고 있어.”
냉산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들어나 보자.”
냉산은 잠깐 침묵하다가 생각을 가다듬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 들어온 반년 동안 천랑국 무인들은 우리 대한의 무인들을 제멋대로 포위해서 죽이고 다녔어. 나와 사… 금호는 무척이나 힘들었지. 우리는 꽤 오랜 시간 숨어 있어야 했어. 하지만 요수의 후각이 엄청 발달한 탓에 숨은 곳이 늘 발각되었지. 그렇게 줄곧 한 달 전까지 숨어 다녔어. 그리고 한 달여 전, 우리는 모여 있는 대한의 무인들을 만났어. 한 서른 명 정도 됐었나.”
양준의 얼굴빛이 살짝 변했다. 그는 그들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우리 귀왕곡이 평판이 나쁘고 사파라 하지만, 그래도 대한의 무인이잖아. 그래서 나와 금호도 합류하게 되었어. 버팀목을 찾았다 했더니만, 이틀이 채 안 되어 우리는 수많은 요수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어.”
냉산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애당초 그 무리와 합류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렇게 빨리 상대의 손에 잡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서른여 명이라 실력이 강해 보였지만, 동시에 더 쉽게 상대의 눈에 띌 수 있기에 둘이 움직이는 것보다 못했다.
“그 다음에는?”
양준이 캐물었다.
“고전을 면치 못했지. 많은 이들이 죽고 살아남은 이들은 대다수가 잡혔어.”
“잡혔다고? 어떻게 잡힐 수가 있어? 너희들 모두 진원 경지 아니었어? 정 안 되면 날아서 도망이라도 쳤어야지.”
양준은 경악하고 말았다.
“도망칠 수가 없었어.”
냉산이 무기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쟤네가 무능해서가 아니야!”
자맥이 숨을 깊게 들이쉬며 끼어들었다.
“그럼 뭔데?”
“내 사형이 너무 강한 탓이지. 적혈(赤血)이라고 있어.”
자맥이 양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실력이 그렇게 대단해?”
“진원 경지 7단계. 그리고 본인의 실력이 강한 게 다가 아니야.”
자맥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거느리는 요수의 수가 많아서인가? 몇 마리야?”
자맥이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었다.
“백 마리?”
자맥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천 마리?”
양준의 낯빛이 변했다.
자맥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한 마리밖에 없어! 그런데 6급 요수야.”
양준의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바로 6급 요수야. 그렇게 강한 6급 요수는 아니지만, 진원 경지 무인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하지. 도망치려던 대한 무인들은 모두 사형과 그의 요수의 공격을 받아 죽었어.”
“이곳에 6급 요수도 있어?”
양준은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수련하면서 만난 가장 강한 요수가 5급이었다. 적혈이라는 자가 공혼충으로 요수를 제어할 수 있다면, 그는 노수인으로 요수를 제어할 수 있었다. 만약 6급 요수 한 마리만 찾을 수 있다면, 그 역시 이곳을 장악할 수 있었다.
“아마 그 한 마리뿐일 거야. 사형은 그 요수를 복종시키기 위해 힘을 엄청 쏟았어. 원래 부리던 모든 요수를 포기하고 공혼충을 회수해 그들을 서로 잠식하고 녹아들게 했어. 이는 아주 위험한 모험이야.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공혼충들이 모두 죽을 수도 있거든. 사형은 운이 좋았어. 거의 백 마리의 공혼충들이 하나가 되었고, 한 단계 진화했지. 그것으로 사형도 겨우 6급 요수를 조종할 수 있었어.”
자맥의 눈빛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자맥은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양준은 그녀의 사형인 적혈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혼충 한 마리를 진화시키기 위해 그렇게 큰 위험을 감수하다니. 이로 미루어 보아 적혈은 결단력 있고 모진 사람이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계속 말해 봐.”
양준은 6급 요수를 거두려는 마음을 잠시 접고 냉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냉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른여 명에서 거의 열 명이 죽었어. 한 명만 실력이 강해 도망치고, 나머지는 모두 공혼충에 조종당해 자맥 무리에게 제어당했지.”
도망친 사람은 묻지 않아도 무승의일 것이다. 다른 이들은 그럴 능력이 되지 않았다.
“왜 너희들을 죽이지 않았지?”
양준이 의아해했다. 무인 한 명을 죽여서 얻는 혈주는 요수의 것보다 훨씬 좋았다. 특히 잡힌 이들은 모두 진원 경지 고수였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각 종문의 비밀 무공을 얻으려는 속셈이었어. 그래서 바로 죽이지 않았던 거야. 우리가 각 종문의 정예들이잖아. 수련한 무공이나 공법은 당연히 종문 내에서 가장 좋은 것들이지. 천랑국 무인들은 이것 때문에 온 거였어.”
냉산이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
양준이 고개를 돌려 자맥을 보았다. 자맥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날 보지 마. 내가 그들을 어찌한 것도 아니잖아. 난 냉산하고 금호 둘밖에 장악하지 못했어. 게다가 미처 그들에게서 무공이나 공법을 물어보기도 전에 네게 잡혔잖아.”
냉산이 계속해 이야기를 이어 갔다.
“천랑국 무인들은 완승을 거둔 뒤, 적혈은 그의 6급 요수를 데리고 무승의를 쫓아갔어. 남은 세 명은 무슨 원인에서인지 분열이 일어났고, 나와 금호는 자맥에게 배정돼 그 무리를 떠나게 되었어.”
냉산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맥은 한쪽에서 하얀 이를 꼭 깨물고서 연신 냉소를 던졌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양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더니 냉소했다.
“보아하니, 동문끼리 사이가 안 좋나 봐?”
“너희는 동문끼리 다 친해? 우린 이곳에 오면서 총 세 가지 임무가 있었어. 첫째는 혈주를 얻어 자체 실력을 높이는 것이고, 둘째는 대한의 무인들로부터 무공과 공법의 수련 방법을 알아내는 것, 그리고 셋째는 전설 속의 유염액과 세혼로를 찾는 거였어. 이 임무는 각 개인의 앞날과도 관련이 있었지. 임무를 완수하면 종문에 돌아가서도 당연히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자맥은 양준을 흘겨보았다.
“동문 두 명이서 짜고 네가 이득을 많이 얻지 못하게 한 거지?”
양준은 금세 사건의 전말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잡았는데 자맥에게는 둘밖에 배정하지 않았다. 설령 자맥이 냉산과 금호에게서 무공이나 공법을 알아낸다고 해도, 겨우 귀왕곡의 무공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맥의 두 동문은 장악한 자원이 훨씬 많았다.
동문 사이의 경쟁은 어느 종문에서도 모두 존재했다.
“그들은 한 가족이야. 당연히 나를 배척할 수밖에.”
자맥은 이를 갈며 마음속으로 원망했다.
양준이 눈알을 굴리더니 한마디 했다.
“내가 복수해 줘?”
천랑국 삼라전 세 제자 사이의 은원은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좋은 패였다.
이곳에 있다 보면 모두들 조만간 부딪치게 될 것이다. 양준이 편하게 살려면 오직 선수를 쳐 삼라전의 두 무인을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물며 그들에게는 6급 요수를 조종하는 사형이 있었다. 적혈은 무승의처럼 강한 상대로, 그자를 만나기 전에 반드시 불안정한 요소를 모두 제거해야 했다.
자맥은 눈을 깜빡이다가 양준을 힐끗 보면서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내 생사가 너의 손에 달려 있지만, 그래도 난 천랑국 삼라전의 제자야. 종문을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할 수 없어. 내가 너를 도와 그들과 대적할 거라 기대하지 마.”
양준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맥이 이렇게 원칙이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양준은 더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그냥 말해 본 거야. 뭐, 싫으면 말고.”
자맥은 깜짝 놀랐다. 양준의 제안을 거절한 그녀는 벌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양준은 생각 외로 그냥 넘어갔다.
“너 이렇게 쉬웠어?”
자맥은 양준의 꿍꿍이속을 몰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네 생각에는?”
양준이 가볍게 비웃었다.
자맥은 큰 눈을 깜빡이더니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 영혼에 새긴 낙인도 지워 주지 그래.”
“꿈 깨셔.”
그 후 며칠 동안 양준은 냉산, 자맥과 함께 그곳에서 수련했다. 그들은 어떠한 적과도 마주치지 않았고, 간혹 요수 한두 마리와 마주칠 뿐이었다.
4급 요수는 바로 죽여 혈주를 취하고, 5급 요수는 자맥이 제압해 공혼충을 심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5급 요수는 고작 한 마리밖에 만나지 못했다.
양준은 혈주가 필요 없기에 모두 자맥과 냉산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지금 경맥과 단전 내의 원기를 끊임없이 제련하여 진원 경지에 오를 준비를 하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수련하면서 전설 속의 세혼로를 찾아다녔다.
자맥의 사형 적혈도 세혼로를 찾고 있다고 했다. 자맥이나 냉산도 세혼로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다. 물론 어디 가서 찾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양준이 이상하게 느끼는 것은 며칠간 자맥이 말로 끊임없이 그의 욕정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거침없고 노골적이었다. 냉산처럼 차가운 여인도 무의식적으로 매혹적인 자태와 은은한 아름다움을 흘렸다.
간혹 양준은 그녀들의 눈빛에서 동정의 감정을 느낄 때도 있었다.
‘또 무슨 꿍꿍이야?’
양준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