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7장. 아직 너희들 몸에 살아 있어
자맥과 냉산은 양준과 며칠 동안 함께 지냈지만, 실제로 그와 겨루어 본 적이 없었다. 방금 전 요수를 함께 대적하긴 했으나, 양준은 그저 일반 이합 경지의 무인들보다 조금 더 강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두 여인은 양준이 무슨 특별한 무공을 사용하여 그들의 신식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양준을 두려워하기는 했으나, 그가 이합 경지 무인인 만큼, 그의 실제 실력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었다. 그동안 그들이 양준에게 제멋대로 군 것도 일부분은 양준을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맥과 냉산은 그들이 줄곧 무시하던 양준의 전투력이 이토록 대단하다는 것을 처음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필수명은 그래도 진원 경지 4단계의 무인으로, 냉산도 그와 싸운다고 했을 때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자맥이라 할지라도 필수명과 싸운다면 꽤나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봤을 때 자맥과 냉산은 충격이 가시지 않아 오랫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라고 왜 그렇지 않겠는가?
필수명을 쓰러뜨린 뒤, 양준은 고개를 돌려 그의 사제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도 욕설을 퍼부으며 사형에게 자맥의 경지를 망가뜨리라던 그였다. 필수명이 양준과 싸울 때, 그는 양준을 향해 입에 담기도 거북한 욕설을 마구 내뱉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경악한 채 양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준이 사람들 앞에서 필수명을 죽였는데 또 어찌 그를 가만히 놔둘 수 있겠는가?
두 수혼은 그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아… 안 돼……!”
그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당황한 얼굴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단전이 파괴된 폐인의 몸으로 원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가 어떻게 두 수혼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두 수혼이 그를 덮치며 물어뜯었고, 곧이어 처참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얼굴이 흠칫 떨렸다. 마음이 약한 무인들은 입을 벌리려고 했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잠시 뒤, 비명소리가 잦아들었다. 필수명의 사제는 수혼의 공격으로 시신도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덤덤하게 그 모습을 훑어본 양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으로 물러섰다.
자맥과 냉산은 그것을 보고 똑같이 아무 말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복잡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지금에서야 두 여인은 양준에게 진정한 경외심이 들었다.
양준이 그들의 영혼을 통제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양준과 싸운다면 냉산은 절대 양준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자맥도 어쩌면 한동안 버틸 수는 있겠으나 그녀 스스로도 양준을 이길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수련한 거지? 어떻게 이합 경지 8단계가 진원 경지와 상대할 능력이 있는 거지?’
여기에 온 사람들은 모두 각 종문의 최우수 제자들인데 누군들 대단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양준의 앞에서는 이 모든 것이 하찮게 느껴졌다. 양준이야말로 이 최우수 제자들 중에서 가장 우수했다. 만약 그가 이대로 계속 성장한다면 앞으로 반드시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었다.
“고마워!”
한참 뒤, 자맥이 낮은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양준이 그녀를 보더니 옅게 웃으며 말했다.
“착각하지 마. 널 위해 나선 게 아니니까.”
순간 자맥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럼 왜… 설마 저들이 전에 널 조롱해서?”
“그래!”
양준이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자맥은 입을 벌리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원수는 반드시 갚는다는 건가. 너 그 성격 좀 고쳐! 하지만… 실력은 대단했어. 전에는 몰랐는데 말이야.”
“왜? 나한테 반했어?”
양준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 말에 자맥은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싸늘한 얼굴로 이를 악물며 말했다.
“조만간 네가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너도 말했다시피 나는 반드시 원수를 갚는 성격이라, 말을 조심해서 하는 게 좋을 텐데.”
자맥은 화가 났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더 말했다가 그가 정말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잠시 뒤, 멀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양준이 고개를 돌려 보니 대한의 무인들이 진학서와 서소어를 따라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양준은 몸을 일으켜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야청사는 양준을 향해 웃어 보였다. 양준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소수의 사람들만 두려운 기색을 보일 뿐이었다.
방금 전, 양준은 필수명을 죽이자마자, 반항할 힘이 전혀 없는 필수명의 사제마저 잔혹하게 죽였다. 이런 단호한 수법에 그들은 다소 불편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들도 손에 피를 많이 묻혔던지라 양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 자신의 몸 하나 지키기도 힘든데 누가 남의 생사에 깊게 신경을 쓰겠는가? 게다가 얄미운 두 사람이 죽었으니 크게 반감도 없었다.
진학서는 양준의 앞까지 걸어와 서소어와 함께 모은 혈주를 건네주었다.
“이건 방금 전에 수확한 거야. 요하와 요계가 이 낭자의 요수를 죽이고 남긴 혈주까지 모두 여든두 개인데 양 사제가 확인해 봐.”
자맥의 요수들은 반항도 못 하고 죽임을 당했었다. 게다가 요하와 요계가 조종하고 있던 요수까지 더해지자 이번 수확은 매우 큰 편이었다.
양준은 그를 힐끗 보더니 사양하지 않고 모든 혈주를 받아 들었다.
요수를 죽인 것에는 모두의 공로가 있었지만, 양준이 상황을 꾸미고 연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어떻게 자유의 몸을 되찾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이 혈주보다 살아남은 것이 더욱 큰 수확이었다. 더구나 싸움이 끝나고 양준은 요상단을 꺼내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이미 도의적인 책임은 다한 셈이었다.
“이건 그 네 사람의 혈주야. 모두 진원 경지지.”
야청사는 웃으며 큰 혈주 네 개를 양준의 손에 올려놓았다.
양준의 수확이 큰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하지만 부러움에 그칠 뿐, 나서서 빼앗거나 탐욕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람은 없었다. 양준은 사람들의 안색을 살피다가 이 점을 발견하고 몰래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놓았다. 필수명과 그의 사제 같은 사람은 그저 소수에 불과했다.
진학서는 표정을 굳히더니 공수하며 말했다.
“양 사제, 고마워. 오늘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게!”
다른 사람들도 하나같이 진지한 얼굴로 공수하며 인사했다.
양준도 공수하며 응했다.
누구도 필수명의 죽음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모두 살아서 각자의 종문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외지에서 수련을 하다 무인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변고는 그저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묻힌 채 지나갔다.
그 이후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약간 남아 있던 어색함과 두려움마저 눈 녹듯 사라졌다. 다만 자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좀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
만약 모두 대한의 무인이라면 지난날의 원한도 잊을 수 있겠지만, 자맥은 천랑국의 무인인데다 전에 그들을 공격한 적도 있었다. 이는 다른 얘기였다. 사람들은 그녀와 화해하고 싶어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자맥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홀로 한쪽으로 물러나 외롭게 자리를 피했다.
한참 한담을 나누던 양준이 갑자기 진학서에게 말했다.
“진 사형, 또 무슨 할 얘기라도 있어?”
진학서가 말을 하려고 뜸을 들이는 모습을 양준이 보았던 것이다.
진학서는 그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기는 한데.”
“말해 봐!”
진학서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단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안의 벌레가… 죽었을까?”
요하와 요계는 이미 죽었지만, 그들이 대한의 무인들에게 심은 공혼충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문제였다. 문심궁의 여심원은 이미 단전이 파괴되어 사제 좌방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다음이 누가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 말을 들은 양준은 고개를 돌리고 자맥을 바라보았다. 자맥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안 죽었어. 아직 너희들 몸에 살아 있어.”
사람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자맥을 바라보았다.
양준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공혼충을 내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내가 심은 공혼충이 아니어서 안 돼!”
자맥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공혼충이 안에 있어도 괜찮아. 단지 원기를 약간 흡수할 뿐이야. 명령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들은 너희들을 해치지 못할 거야. 각자 신유 경지까지 수련하면 신식으로 공혼충을 내보낼 수 있어. 아니면 종문으로 돌아가서 고수들에게 도와달라고 해도 돼.”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여전히 수심에 잠겼다. 그들은 자맥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았다.
자맥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문제였다. 누구라도 단전에 벌레가 살고 있다면 찜찜할 것이다. 만약 생사를 결정 짓는 전투 중에 이 벌레가 꿈틀거리기라도 한다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