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231화 (231/853)

제 231장. 적혈

“늦었어!”

자맥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옆에 있는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당부하기 시작했다.

“이따가 너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알아서 둘러댈 테니. 만약 너와 나 사이를 안다면 분명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양준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맥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난 나를 지키려고 하는 거니까 오해하지 마. 네가 위험해지면 괜히 나까지 손해 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양준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수풀 속에서 요수가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 요수는 늑대 같기도 하고 호랑이 같기도 했는데, 몸집이 건장하고 사지에 힘이 넘치는데다 살기가 가득해 보였다. 키가 석 장 정도 되어 몇십 장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양준은 묘한 위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6급 요수였다!

그것이 뛰쳐나올 때, 자맥의 옆에 있던 요수들은 하나같이 몸을 웅크렸다. 고양이를 본 쥐처럼 고분고분하기 짝이 없었다.

요수의 등에는 자색 장포를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스물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였다. 두터운 눈썹이 옆머리까지 뻗치고 부리부리한 눈을 한 그는 냉혹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 사람이 바로 적혈이었다! 그는 무승의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무승의보다 덩치가 있었고, 더욱 잔혹해 보였다.

그는 양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맥을 바라보았다.

“사형!”

자맥이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6급 요수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위협을 가했다.

요수의 반응에 자맥은 흠칫 놀라서 사형을 바라보았다. 적혈은 차가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하와 요계가 죽었던데 넌 알고 있냐?”

한참 침묵을 지키던 적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는 실눈을 뜨고 위험한 눈빛을 반짝거렸다. 자맥의 대답이 그녀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자맥은 소름이 돋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죽였어.”

실눈이었던 적혈의 눈이 갑자기 번쩍 뜨였다.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네가 죽였다고?”

“그래!”

자맥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유를 대봐!”

적혈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자맥은 흠칫 몸을 떨었지만,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걔들이 내 요수를 죽이고 내 공혼충까지 빼앗아 갔어. 내 신식까지 망가뜨렸다고!”

적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의아한 눈빛으로 자맥을 바라보았다.

“걔들은 왜 그런 거야?”

자맥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형도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왜 물어?”

적혈은 눈을 감더니 한참 뒤에야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음, 걔들이 먼저 너에게 손을 썼다면 죽음을 자초한 일이지!”

이 말을 들은 자맥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혈이 만약 정말로 요하와 요계를 위해 복수하겠다고 나선다면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적혈은 그나마 사형으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자맥을 벌하는 일 따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 혼자서는 죽이지 못했을 텐데.”

적혈이 덤덤하게 말했다.

“누가 널 도왔어?”

자맥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적혈은 덤덤한 얼굴로 양준을 힐끗 쳐다보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너와 요하, 요계 사이의 전쟁은 내가 신경 쓸 게 아니야. 돌아가서 사부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시겠지. 하지만… 외부인이 개입했다면 내가 어떻게 처리할지 너도 알 거야.”

“알고 있어.”

자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를 죽여.”

적혈은 양준을 가리키며 차가운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그의 말투는 반박할 수 없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양준은 속으로 깜짝 놀라며 몰래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도 자맥의 사형이 이토록 단호하고 독할 줄 몰랐던 것이다.

자맥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에 머뭇거리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양준을 공격할 리 없었다. 만약 양준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간 움직이기도 전에 양준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적혈이 바로 눈앞에서 압박하고 있으니 아무리 똑똑하고 영리한 자맥도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선택을 하든 두 사람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었다.

“넌 나와 함께 다니면 되니 이젠 저 녀석의 보호가 필요 없잖아. 왜 아직도 죽이지 않는 거야?”

적혈이 차가운 목소리로 재촉했다.

자맥은 숨을 들이쉬며 흔들리는 눈빛으로 한참이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참 뒤, 자맥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쟤를 죽이지 못해!”

적혈은 실눈을 뜨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지?”

양준은 속으로 냉소를 지으며 자맥의 대답을 기다렸다. 자맥이 그의 비밀을 빍히려고 한다면 자맥에게 엄청난 벌을 내릴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쟤를 좋아해서 그래!”

자맥은 꿋꿋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또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난 이미 그의 사람이라서 죽일 수 없어!”

양준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맥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맥이 이토록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적혈도 깜짝 놀라더니 안타까운 얼굴로 자맥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너 뭐라고 했어?”

“내가 쟤를 좋아한다고. 난 이미 쟤의 사람이라고!”

자맥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쐐기를 박았다. 두 번째로 말할 때의 표정은 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적혈은 기가 차서 웃음을 터뜨렸다.

“대한의 무인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그래!”

자맥은 몰래 양준을 훔쳐보았다. 그가 상기된 얼굴로 의기양양해하는 것을 보자 왠지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바로 뛰어가 양준의 귀싸대기를 날려 화풀이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도 이 변명이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그녀는 도저히 다른 핑계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런데도 양준은 이런 그녀의 고초를 모른 채, 의기양양해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분통이 터졌다.

적혈은 차가운 얼굴로 양준의 몸에서 시선을 떼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역시 공혼충을 심지 않았군! 보아하니 네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가 보네.”

양준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적혈은 무심결에 중요한 정보를 노출했다. 그는 공혼충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었다.

“내가 사형을 속일 이유가 없잖아!”

자맥은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그래!”

적혈은 강한 살기를 내뿜었다.

“네가 이렇게 스스로를 아끼지 않고 대한의 폐물에게도 몸을 내준다니 나도 더 이상 너에게 뭐라고 할 수가 없네. 이번에 돌아가면 사부님께 사실대로 보고할 거니까 벌받을 준비해!”

자맥은 몸을 흠칫 떨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 녀석은…….”

적혈은 싸늘하게 양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죽일 수 없다니 사형인 내가 대신 처리하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맥이 조종하고 있던 열몇 마리의 요수들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양준을 향해 이를 으르렁거렸다.

양준은 안색이 살짝 변한 채, 자맥을 바라보았다.

자맥은 다급히 설명했다.

“어서 도망가! 사형의 공혼충은 등급이 높아서 내 공혼충을 조종할 수 있어!”

‘그랬구나!’

자맥의 말을 들은 양준은 오히려 한시름을 놓았다. 그는 자맥이 몰래 그를 죽이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내가 자맥을 오해했군.’

“도망칠 수 있겠어?”

적혈이 냉소하며 말했다. 열몇 마리의 요수들은 점점 더 흉악하게 이를 드러내더니 원을 그리며 양준을 둘러쌌다.

자맥은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는 한편으로 애써 자신의 공혼충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양준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어서 가라니까? 뭘 멍하니 서 있어!”

양준은 꿈쩍도 하지 않고 적혈이 타고 있는 6급 요수를 노려보았다.

적혈은 냉소를 짓더니 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열몇 마리의 요수들이 일제히 뛰어오르며 양준을 덮쳤다. 자맥은 최선을 다해 통제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양준의 안색이 차가워지더니 몸을 움직였다. 이내 그는 요수들의 포위권 밖에 나타났다. 그는 몸속의 원기를 움직여 왼손으로는 백호인, 오른손으로는 신우인을 내보내며 두 손을 겹쳐 하나로 만들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빛이 날아가더니 바로 6급 요수를 덮쳤다.

“아우……!”

하늘을 뒤흔드는 포효가 울려 퍼졌다. 적혈이 탄 6급 요수가 소리를 지르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대한 칼바람이 입에서 분출되어 양준이 쏜 노수인과 부딪혔다. 난폭한 기운이 공중에서 만나자 노수인은 바로 산산이 부서졌다.

“고작 이 정도라니!”

적혈은 냉소를 지었다. 그는 노수인의 현묘함을 알지 못했다. 그저 양준이 펼친 공격 수단인 줄로만 안 것이다. 하지만 양준의 공격으로 그의 진짜 실력도 드러나고 말았다.

이합 경지 8단계! 이것을 발견한 적혈은 점점 더 화가 났다.

만약 그가 정말 대한의 천재라면 자맥이 좋아한다 해도 그나마 괜찮았지만 진원 경지에도 오르지 못한 놈이 무슨 자격으로 자맥의 마음을 빼앗았다는 말인가?

적혈은 한 문파의 대사형으로서 당연히 이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는 양준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다.

“죽여!”

적혈은 직접 공격할 생각도 없었다. 그가 손을 들고 움직이자 자맥이 조종하고 있던 열몇 마리의 요수들이 다시 한번 덮쳐들었다.

양준의 몸이 다시 나타났을 때, 열몇 마리 요수들의 울음소리와 자맥의 외침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6급 요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뛰어갔다.

요수의 등에 탄 적혈은 냉소를 지으며 거만한 자세로 양준의 반항을 가소롭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보법은 괜찮지만 네 실력이 너무 약해!”

적혈은 거만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6급 요수는 마치 주인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나긴 울음소리였다. 울음소리와 함께 반 척 정도의 바람이 회전하며 날아가 양준의 앞을 습격했다.

양준은 정신을 집중하여 요리저리 피하면서도 6급 요수를 향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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