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2장. 기회를 줄게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적혈의 안색도 점점 변해 갔다. 그는 자신이 이 남자의 속도를 낮잡아 보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자맥의 요수들은 양준을 털끝도 다치게 하지 못했고, 그가 타고 있는 6급 요수도 양준을 공격하지 못했다. 짧은 시간에 양준은 이미 그와 오 척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적혈은 얼굴에 노기를 띠더니 두 눈으로 양준을 노려보며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삼 장…….
양준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잔영만 남았다.
적혈은 잠자코 주변의 기척을 살피다가 냉소를 짓더니 갑자기 옆으로 공격을 날렸다.
장풍이 울리며 양준의 모습이 나타났다. 마치 양준이 스스로 적혈의 공격을 맞이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내 양준의 손에서 빛이 쏘아지더니 적혈이 타고 있는 6급 요수의 몸에 적중했다.
그와 동시에 양준은 적혈과 맞붙었다. 가벼운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은 종이처럼 멀리 날아갔다.
“주제도 모르고!”
적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 대한의 무인이 필사적으로 달려들어서 한 일이 겨우 그의 6급 요수에게 빛을 쏘아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적중하긴 했지만, 그의 요수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양준은 힘겹게 착지하고 나서 뒤로 여러 걸음 밀려나서야 멈춰 설 수 있었다. 그는 가슴팍에서 들끓는 기혈을 억눌렀다. 양준의 눈에는 경악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대단해!”
양준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역시 천랑국 출신의 최우수 제자다웠다. 비록 삼라전의 작은 분파라곤 하지만 이 실력은 일반 무인들과 비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 용서를 구해도 늦었어!”
적혈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매, 내가 기회를 줄게. 네가 그를 죽인다면 사부님에게 너를 좋게 얘기해 줄 수 있어. 네가 순결을 잃었다는 것도 비밀로 부쳐 주지. 그럼 종문에서의 네 입지도 흔들리지 않을 거야. 만약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넌 얼굴 들고 다니기 힘들걸.”
자맥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난 그를 공격할 수 없다고!”
양준을 공격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맥은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좋아, 네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
자맥이 거절하는 이유를 알 리 없었던 적혈은 당연히 그녀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타고 있는 요수를 토닥인 뒤, 차가운 눈길로 양준을 쏘아보며 말했다.
“네가 무슨 수로 사매를 꼬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천랑국의 여인이 대한의 남자와 어울리는 것은 볼 수 없어. 그러니 넌 반드시 죽어야 해!”
적혈은 사나운 기세로 양준에게 이 말을 뱉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악한 얼굴로 자신이 타고 있는 요수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그는 요수에게 양준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요수가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공혼충이 아직 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깜짝 놀란 적혈은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 요수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양준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리에서 풀쩍 뛰었다가 다시 쿵, 하고 떨어지며 적혈을 멀리 날려 보냈다.
허공에서 몸을 구른 적혈은 무사히 착지했다. 그리고 그의 요수를 바라보았다. 요수는 두 눈으로 살기를 내뿜으며 목구멍으로부터 나지막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적혈은 안색이 변했다.
‘분명 공혼충을 심은 요수인데… 조종에서 벗어나 나한테까지 적의를 보이다니!’
“하하하!”
양준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더없이 의기양양했다.
적혈은 양준을 바라보다가 방금 전 그가 했던 기괴한 행동을 떠올리고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너 방금 전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아까 양준이 날린 빛을 떠올린 적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녀석이 필사적으로 달려와서 내 요수에게 쏜 빛이 원인일 거야.’
그게 아니라면 요수가 그의 명령을 무시할 리 없었다.
양준은 크게 웃으며 방금 전까지 조심스럽게 행동하던 것을 멈추고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가 6급 요수의 옆에 섰다. 그는 손을 내밀어 요수의 등을 토닥이며 적혈을 바라보았다.
“내가 뭘 했는지 안 보여?”
자맥은 입이 떡 벌어지더니 놀란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와 가깝게 지낼수록 자맥은 그가 신비롭다고 느껴졌다. 그의 강함과 괴이함은 이미 자맥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이 순간이 되어서야 자맥은 며칠 전에 요수와의 대전에서 그가 어떻게 자신과 냉산을 위기에서 구해줄 수 있었는지 알게 됐다.
‘양준도… 요수를 조종할 수 있었어!?’
손쉽게 6급 요수 한 마리를 조종할 수 있는 대단한 수법을 가졌는데 누가 감히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사형인 적혈도 공혼충을 백 마리나 넘게 희생하고 큰 위험을 무릅쓰면서 한 등급 높은 공혼충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또 몇십 마리의 강한 요수를 포기하고 나서야 눈앞의 이 6급 요수를 제압할 수 있었다. 이렇게 비교하고 보면 양준의 수단은 실로 신기했다.
“어떻게 한 거야? 내 공혼충이 아직도 요수의 몸에 있는데 이럴 리 없어!”
적혈은 드디어 침착함을 잃었다. 그는 열심히 공혼충과 교류를 하려고 했으나 6급 요수는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놀랄 것 없어. 네 벌레가 너무 질이 떨어져서 그래!”
양준은 경멸의 미소를 지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재미있군!”
적혈의 얼굴이 갑자기 흥분으로 차오르더니 마치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을 본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전의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죽여!”
양준이 두 글자를 내뱉었다.
6급 요수는 바람처럼 적혈을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뛰어오면서도 끊임없이 바람을 쏘았다. 적혈은 몸을 움직여 공격을 피했다. 그의 신법도 상당히 정교하여 요수와 정면충돌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공으로 뛰어올랐다가 독수리처럼 양준을 덮쳤다.
적혈은 실력이 강했지만 6급 요수와 정면으로 대항할 수는 없었다. 그의 목표는 오직 양준이었다. 양준만 죽인다면 6급 요수는 다시 그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적혈의 공격은 하늘에서 떨어지며 크게 펼쳐졌다. 진원 경지 7단계의 실력을 전력으로 내뿜자 놀라운 파괴력을 보였다.
양준은 신중한 표정으로 몸속의 원기를 극한까지 운행했다. 하지만 그는 적혈의 일격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두 발로 땅을 구르며 적혈을 향해 뛰어갔다.
“재미있군!”
적혈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너도 제법이야!”
양준도 똑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말이 오가면서도 두 사람의 손은 전혀 쉬지 않았다. 상대방에게 일격을 가하는 데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이 일격에 두 사람은 전력을 쏟아부었다.
적혈은 일격으로 양준을 공격해 죽이고 6급 요수의 통제권을 되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하는 양준도 당연히 공법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었다.
주먹과 손바닥이 마주치자 공중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그 소리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천지간의 기운이 순식간에 흐트러지고 큰소리가 두 번 울려 퍼졌다.
적혈은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날아갔고, 양준은 운석이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땅에 떨어졌다.
퍽-
양준이 땅에 떨어지면서 작은 구덩이를 만들었다. 그가 다시 일어났을 때, 그의 입가에는 핏자국이 있었고, 적혈은 땅에 떨어지고도 안색이 살짝 빨개졌을 뿐,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이번 대결에서는 적혈이 우세를 차지했다.
하지만 우세를 차지했음에도 적혈의 눈에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놀란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가 미처 양준의 상황을 살펴보기도 전에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적혈은 욕설을 퍼부으며 재빨리 몸을 피했다.
6급 요수의 공격은 그도 감당할 수 없었다.
“잠깐……!”
자맥은 비명을 지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경 쓰지 마!”
양준은 소리를 질렀다. 그는 그녀의 처지가 난감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양준은 다시 한번 보법을 펼치며 적혈을 향해 뛰어갔다.
적혈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다급하게 도망쳤다.
그는 일격에 양준의 목숨을 거두고 형세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양준의 실력이 이토록 강할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이합 경지 8단계의 실력으로 자신과 대치하면서도 그는 겨우 작은 부상밖에 입지 않았다.
단시간 안에 양준의 목숨을 거두지 못하고 6급 요수도 적의 손에 들어갔다. 게다가 사매도 자신을 도와줄 여지가 없으니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위험했다.
적혈이 백 장 밖까지 도망친 것을 보고도 양준은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6급 요수의 등에 올라타 빠른 속도로 추격에 나섰다.
자맥은 마음속으로 머뭇거렸다. 한창 멍하니 있던 그녀는 그제야 이를 악물고 그들을 바짝 뒤쫓아 갔다.
그녀의 생사가 양준의 손에 달렸는데 어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밀림에서 세 그림자가 앞뒤로 날아다녔다.
적혈이 맨 앞에서 뛰어가고 있었는데 속도가 매우 빨랐다. 양준은 6급 요수를 타고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몇 리 밖에 있는 것은 자맥이었다. 그녀는 열몇 마리의 요수들을 데리고 고민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따라가고 싶기도 하고 또 도망치고 싶기도 하다 보니 그녀의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도망치는 와중에 6급 요수는 신법을 펼치며 바람을 쏘아 백 장 밖까지 공격했다. 굵은 나무들이 연이어 쓰러졌다. 6급 요수의 실력은 실로 대단했다. 신유 경지와도 견줄 수 있는 강한 요수였다.
적혈은 도망치고 있었지만 몰골이 초라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조급한 표정뿐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도망치다가는 진원을 다 소모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