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237화 (237/853)

제 237장. 자맥의 위기

“역시…….”

지마가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리 봐도 누가 손바닥으로 내리친 것 같은데?”

양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사방 몇십 리가 거대한 손바닥 모양으로 지면이 푹 파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양준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능태허나 몽무애는 당대 최고의 고수라고 해도 무방했지만, 그들이 힘을 합쳐 장법을 쓴다고 해도 지면에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이 흔적은 시간이 꽤 된 것 같았는데 적어도 반년은 지난 것 같았다. 지금까지 여전히 그 자리에서 풀조차 자라지 않는 걸로 봐서는 그 속에 담긴 기운이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한참 멍하니 바라보던 양준은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 능태허와 귀왕곡의 귀려, 그리고 만화궁의 노파와 함께 유명산에 들어왔을 때, 능태허는 노파에게 뭔가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노파는 유명산 내부에 변고가 생겨서 5, 6급 요수들이 전부 바깥으로 쫓겨난 것이라고 했었다.

‘시간도 얼추 비슷하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데… 노파가 말한 변고가 이 흔적을 만든 고수와 상관이 있나?’

“주인, 우선 여기를 벗어나는 게 좋겠네.”

지마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응.”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방향을 파악한 뒤, 양염지익을 펼치며 날아갔다.

그동안 양준이 함부로 양염지익을 사용하지 못한 이유는 주변의 기척을 살필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식을 사용할 수 있게 됐으니 상황이 달라졌다. 신식을 사용하자 사방 십몇 리 범위가 한눈에 들어와 다른 사람에게 발각될 걱정이 없었다.

반 시진 뒤, 양준은 유명산을 벗어났다.

땅에 착지한 양준은 위치를 파악한 뒤 한 방향을 따라 성큼성큼 나아갔다.

“주인, 능소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나?”

지마는 양준이 가는 방향이 능소각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분간 안 가. 먼저 약왕곡으로 가야겠어!”

검은 책 다섯 번째 장에는 약왕곡이라는 지명만 쓰여 있었다. 양준도 그곳에 뭐가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검은 책의 지시대로 일단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는 경지가 너무 낮아 실력을 좀 더 키운 후에 갈 생각으로 미뤄뒀었다. 이후 능태허에게 이끌려 유명산으로 수련하러 오게 되었고, 지금 실력이 진원 경지에 도달했으니 약왕곡에 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진원 경지에 다다른 양준은 보법을 펼쳐 보았다. 그러자 단숨에 몇백 장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민첩해졌고, 흔적도 전혀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몇 번만 더 시험해 보고는 더 이상 보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보법이 진원을 너무나도 많이 소모했기 때문이었다.

이틀 뒤, 양준은 이미 유명산에서 천 리나 떨어져 있었다.

큰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양준은 불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 느낌은 그가 느낀 것이 아니라 한 방향에서 전해지는 것이었다.

양준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돌리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양준은 문득 의혹이 생겼다.

‘내 신식은 기껏해야 십몇 리 범위밖에 보지 못하는데, 몇십 리 밖의 기척이 어떻게 느껴지는 거지?’

“…낙인!”

갑자기 양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드디어 그는 불안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를 깨달았다.

양준은 외지에 있을 때, 자맥과 냉산의 신식에 낙인을 찍은 적이 있었다. 지금 몇십 리 밖에서 분명 그들 중 누군가가 위험에 처해 그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자맥일까? 아니면 냉산일까?’

여기까지 생각한 양준은 무거운 얼굴로 다급히 그곳을 향해 뛰어갔다.

*양준이 느낀 것은 틀리지 않았다. 몇십 리 밖에서 자맥은 생애 최대의 위험에 맞닥뜨린 상황이었다. 양준과 헤어질 때, 그녀의 실력은 진원 경지 6단계였다. 긴 시간 동안 외지에서 수련하다 보니 그녀의 실력은 이미 진원 경지 7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 그녀의 상황은 매우 위태로웠다. 그녀는 허둥지둥 적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그녀의 복부에는 기다란 상처가 나 있었고, 흘러나온 피가 옷을 적시고 있었다. 발걸음이 흐트러지고 안색이 하얗게 질린 그녀는 위험에 처해서도 이를 악문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유명산에서 나올 때부터 그녀는 운이 좋지 못해 많은 요수들의 공격을 받았다. 만약 공혼충으로 그중 요수 한 마리를 조종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진작 유명산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 싸움으로 그녀는 부상을 입었고, 조종하던 요수도 그곳에 남겨 둔 채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겨우 도망쳐 나오자마자 이곳에서 또 적과 맞닥뜨린 것이다.

상대방은 그녀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바로 양준이 줄곧 찾아다니던 무승의였다.

무승의의 실력은 이미 진원 경지 8단계였다. 자맥보다 한 단계밖에 높지 않았지만, 그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고, 자맥은 부상을 입고 도망치던 중이라 상황이 달랐다.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자맥은 곧바로 열세에 몰렸다. 그러다 무승의의 검에 찔리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날카로운 검기가 그녀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자 자맥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구리 거울 같은 비보를 꺼내 원기를 운행하여 방패로 앞을 막았다.

챙- 챙-

검이 방패에 맞아 자맥을 다치게 하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며 끊임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난 그저 요수를 다루는 공법이 필요할 뿐이야! 그것만 알려주면 널 살려주겠다!”

무승의는 손에 든 장검으로 자맥을 짚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외지에서 무승의는 요수를 다루는 공법이 얼마나 강한지 몸소 느끼고 욕심을 내게 되었다. 이번에 자맥을 잠복하며 기다린 것도 삼라전의 불전지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어림없는 소리!”

자맥이 이를 악물었다.

무승의는 냉소하며 말했다.

“마지막 기회를 줄게. 내가 널 잡으면 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을 것이다! 너처럼 요염한 이국 여인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적지 않을 테지.”

자맥의 눈빛에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이내 그녀는 표정을 싹 바꾸더니, 갑자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관심 있어?”

무승의는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난 무정검(無情劍)을 수련해서 여인들에게 흔들리지 않아. 대신 나한테 호색가 사숙이 있는데, 그분은 널 거두고 싶어 하실 지도 모르지!”

자맥은 안색이 변하더니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변태 같은 놈!”

자맥은 무승의의 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구성검파의 핵심 제자다웠다. 적혈도 6급 요수를 이끌고 한 달여 동안 무승의를 죽이기 위해 쫓아다녔지만 결국 실패했었는데, 자맥이 어찌 그의 적수가 되겠는가.

자맥은 이를 꼭 깨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요수를 조종하는 공법을 넘길 테니 너도 날 보내줘.”

“고통 없이 보내주지.”

무승의의 표정은 냉혹했다.

자맥은 얼굴빛이 변하며 차갑게 말했다.

“네가 원하는 걸 넘긴다는 데도 죽이려 하다니, 인간성이라고는 없네.”

무승의는 음침하고 차갑게 웃었다.

“인간성? 강한 자가 왕이야. 인간성을 논할 필요가 있어?”

그는 말하면서 안색이 변하더니 눈빛이 번뜩였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검기 몇 가닥이 뻗어 나가며 그의 발치에서 한 자 정도 떨어진 지면을 적중했다.

어렴풋이 검기가 무엇인가를 꿰뚫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지면에는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자맥이 조종하는 공혼충들이었다.

“이딴 수작을 부리다니!”

무승의는 화가 나서 욕지거리를 했다. 줄곧 경계하고 있었는데도, 하마터면 당할 뻔했다. 경계심이 높았으니 망정이지 공혼충이 체내에 파고들면 큰일이었다.

“네가 자초한 거야. 나한테 잡히면 네 사지를 분질러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마.”

무승의의 얼굴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그는 손에 쥔 장검을 흔들어 온몸을 검의 잔상으로 감싸더니 번개 같은 속도로 자맥을 공격했다.

‘개자식!’

자맥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욕했다. 무승의 같은 냉혈한을 만나면 그녀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자맥은 황급히 날아드는 검을 피했다. 동시에 맨손으로 회선도(回旋刀) 몇 개를 날렸다.

무승의는 장검으로 검꽃을 만들어 회선도를 막아 냈다. 불꽃이 연이어 튀었다.

자맥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를 악물며 버텼다. 가까스로 급소를 피했지만, 대신 어깨가 또 검기에 적중되었다.

그녀의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무승의를 등지고 나머지 공혼충을 모두 바닥에 뿌렸다. 무승의가 공혼충에 당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승의는 방금 전에 하마터면 공혼충한테 당할 뻔한 터라, 더욱 경계심을 높이고 있었다.

곧이어 검의 잔상이 흰빛을 일으키더니 사방 십여 장을 모두 깨부쉈다. 검기가 휘몰아치면서 공혼충이 차례로 죽어 나갔다.

공혼충이 인체 내에 침투한 후에는 열 말고 두려울 게 없었으나, 인체에 침투하기 전에는 그저 벌레일 뿐이었다. 무승의의 검기는 공혼충을 죽이기에 충분했다.

자맥의 얼굴빛은 점점 더 하얗게 질려 갔다. 공혼충을 잃은 그녀로서는 이제 어떻게 무승의와 겨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가슴을 졸이고 있던 그녀의 눈빛에 갑자기 짙은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몰래 무승의의 등 뒤로 시선을 보냈다. 이내 그녀의 얼굴에는 흥분과 기쁨이 일렁였다.

무승의는 자맥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얼굴빛이 싸늘해졌다. 더는 시간을 끌지 않고 장검으로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했다.

그가 미처 검기를 날리기도 전에 등 뒤에서 정체 모를 기운이 엄습해 왔다. 무승의는 미간을 찌푸리며 등 뒤로 검을 휘둘렀다. 하늘을 가득 메운 검영(劍影)이 큰 범위를 봉쇄했다.

검의 잔상이 번쩍이는 가운데 붉은 주먹이 나타났다. 주먹이 바람을 일으키자 검영이 산산이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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