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2장. 약왕곡으로 가다
약왕곡은 수천 년의 세월을 거쳐 내려온 특수한 세력으로 종문에는 모두 연단 고수들뿐이었고, 제자들은 대부분 재주가 뛰어난 연단사들이었다.
약왕곡의 전투력은 그다지 강하다고 할 수 없었다. 일부 이등 종문보다 조금 강할 뿐, 일등 종문의 전투력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영향력은 어느 세력도 비할 수가 없을 만큼 컸다.
무인이라면 수련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단약을 복용해야 했다. 이런 단약들은 모두 연단사의 손에서 나왔다. 그리고 약왕곡은 연단사들의 마음속 성지였다.
어떤 연단사든지 약왕곡을 언급할 때면 모두 경건하고 우러러보는 마음가짐을 가졌다. 많은 이들은 심지어 약왕곡에 들어가 연단술을 배우고, 단성(丹聖)의 유풍을 느껴 보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기도 했다.
단성은 약왕곡의 창시자로 죽은 지 수천 년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연단사들 마음속에서 그의 신성한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연단술은 단성이 전수한 것으로 약왕곡을 중심으로 서서히 그 범위를 넓혀 갔다고 했다. 또한 이 덕분에 지금의 무인들이 부상당하거나 수련할 때, 단약을 복용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 단성이 연단술을 전수하기 전에, 무인들은 약초를 찾아 그대로 먹었다고 한다.
이것은 전설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설에는 언제나 과장된 요소가 있기 마련이므로 다 믿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도 전설 중에 한 가지만은 사실이었다. 단성이 실존했다는 것이다. 단성상(像)은 약왕곡의 금지 구역에 우뚝 솟아 있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전혀 풍화의 흔적 없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자체가 기적이었다.
약왕곡이라는 이름에는 산골짜기 곡(谷) 자가 들어가 있지만, 세력의 범위는 어느 한 산골짜기가 아니었다.
주변 십여 개의 산봉우리가 둘러싸서 원형을 이루었고, 부지의 면적은 거의 사방 몇백 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방 몇백 리는 모두 약왕곡에 속했다.
각 산봉우리에는 실력이 강한 연단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떤 이는 제자를 널리 받아들이고, 어떤 이는 혼자서 힘들게 수련하며 연단술을 깨우치기도 했다. 산봉우리에는 약밭이 있었는데, 약밭에는 모두가 욕심내는 각종 약초가 심어져 있었다. 약왕곡에는 무궁무진한 연단 재료가 있었다.
산봉우리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심이야말로 하나의 산골짜기와 같았다. 주변에 있는 십여 개 산봉우리들의 고요한 분위기와는 달리 이곳은 오랜 세월 동안, 매일 같이 떠들썩했다. 무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산골짜기에 세워진 작은 마을은 바로 약왕곡과 외부 무인들과의 교류의 장이었다.
무인들은 재료를 넉넉히 가지고 와서 약왕곡의 제자를 찾아 단약을 부탁해야 했다. 약왕곡의 제자들은 단약을 만들 때 돈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단약이 만들어진 다음, 그중의 삼분의 일을 보수로 받았다.
약왕곡에 와서 어떤 품질의 단약을 만들든지, 범급이든 천급이든 상관없었다. 만약 제련에 실패하면 어쩔 수 없었지만, 제련에 성공하면 열 알 중의 세 알은 연단사의 보수로 주어야 했다.
이런 보수 지급 방식은 너무 부당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스스로 재료를 수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제련에 실패했을 때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위험 감수까지 해야 했다. 설령 제련에 성공한다 해도 그중의 삼 할은 보수로 주어야 했다. 하지만 불합리하다 해도 약왕곡에 찾아와 단약을 부탁하려는 무인들의 열정과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는 연단사가 단약을 제련하다가 실패할 확률이 매우 낮았다. 또한 단약이 만들어지면 품질도 외부의 연단사가 제련한 것보다 훨씬 높았다. 때문에 아무리 각박한 조건을 들이댄다 해도 무인들은 여전히 이곳에 찾아와 단약을 만들기를 원했다. 무엇보다 외부 연단사들이 제련하다가 여차하면 모든 재료를 날려 먹는 것보다는 나았다.
약왕곡의 명성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대한국의 무인들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들에서도 늘 이곳에 와서 약왕곡의 장로들에게 청해 단약을 제련해 갔다.
장로들은 웬만해서는 단약을 제련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청하려면 최소한 천급 내지 현급의 재료를 써야 했고, 보수도 더 많이 받았다.
약왕곡에는 주변 십여 개의 산봉우리에 진을 치고 있는 십대 장로가 있었다. 하나같이 절기(絶技)를 지니고 있으며, 연단술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인은 물론, 약왕곡의 제자들조차 이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장로들은 모두 환갑의 나이에 들어섰고, 일 년 내내 폐관하여 연단술만을 연구했다. 일부 특별히 비싼 재료가 나타났을 때에야 비로소 직접 단약을 만들었다.
약왕곡 마을에는 점포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이런 점포들은 약왕곡의 자산이 아니었다. 그중의 구 할은 크고 작은 세력들이 이곳에 낸 것이었다.
이곳은 연단사들의 중심지였다. 각 세력들은 이곳에 점포를 두고 약재를 팔거나 재료를 수집하거나 정보를 탐문하는 등 다양하게 사용했다.
약왕곡은 어떤 세력과 척을 지지도 않고, 어느 한 세력과 일부러 친분을 맺지도 않았다. 약왕곡은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줄곧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해 왔다.
약왕곡 마을에서는 싸움을 엄금했다. 무인들이 끊임없이 드나든다 하더라도 마을 안에서는 감히 규칙을 어기는 이가 없었다.
일단 마을 안에서 싸움을 하는 이가 있으면, 약왕곡이 손쓸 필요가 없이 다른 이들이 싸우는 이들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러나 산골짜기를 벗어나는 경우, 약왕곡은 각종 은원에 관여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 부근을 주위로 천 리는 완전히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였다.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산골짜기 안은 번성하면서도 평화로웠지만, 그 밖의 길게 이어진 수십 리 구간에서는 곳곳에서 싸움과 살육의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산골짜기 안에서 분쟁이 생겼으나 감히 그 자리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밖에 나가 사활을 걸고 싸우는 것이었다.
이날 마차 한 대가 먼 곳에서 달려오더니, 약왕곡에서 오십 리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마부는 채찍을 거두고 차 안에 대고 소리쳤다.
“손님, 약왕곡에 도착했습니다.”
“벌써요?”
양준은 좌선하다가 깜짝 놀라 깼다. 그는 기쁨에 찬 얼굴로 차 안에서 걸어 나와 둘러보더니 의아해서 물었다.
“여긴 어디죠?”
주변은 허허벌판으로 약왕곡이 아닌 황야임이 분명했다.
마부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손님은 잘 모르실 겁니다. 약왕곡은 곳곳이 위험합니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감히 접근할 수도 없거든요. 손님들은 항상 여기까지 모셔다 드립니다.”
양준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마부는 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 약왕곡 주변의 여러 상황에 대해 조심스럽게 설명해 주었다.
마부의 말을 듣고 난, 양준은 미간이 점점 펴졌다.
‘일부러 날 이곳에 던져 버린 것은 아니었군.’
그는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아무튼 몇십 리밖에 남지 않은 터였다. 그는 되는 대로 은표 한 장을 건네고는 보법을 펼쳐 여유 있게 산봉우리로 접근해 갔다.
비록 방금 전에 마부에게서 약왕곡 밖의 도사리고 있는 위험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한 사실은 그의 상상을 훨씬 초월했다.
삼십 리도 채 안 되는 길을 지나는 동안 피 터지게 싸우는 무리가 너댓 곳이나 되었다. 이들은 모두 약왕곡 마을에서 충돌이 생겨 밖에 나와 해결하는 중이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심지어 아직 채 식지 않은 시체들도 적지 않았다.
양준은 이 광경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밖에서는 쓸데없이 시비에 말려들지 말자는 원칙에 따라 그는 몰래 지나쳐 갔다.
얼마 가지 못해 뒤쪽에서 추격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옷자락들이 펄럭이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마침 하늘색 긴 치마를 입은 소녀가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열예닐곱 살 정도 된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 순간 그녀의 커다란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예닐곱 개의 그림자들이 바싹 뒤쫓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얼굴에 노기와 살기가 가득했다. 하나같이 검을 차고 있어 극악무도해 보였다.
“너 당장 거기 서!”
저쪽에서 분노에 찬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더욱 빨리 달렸다.
“어서, 골짜기에 숨어들지 못하게 막아. 안에 들어가면 못 잡는다.”
그자들은 소녀가 가는 곳이 약왕곡임을 깨닫고는 얼굴빛이 크게 달라졌다.
약왕곡 내에서는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엄금했다. 소녀가 안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녀는 양준 앞쪽으로 달려갔다.
양준이 자신을 경계하며 훑어보는 것을 알아챈 소녀는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곧 새하얀 이를 드러내더니, 숨을 헐떡이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오라버니, 빨리 안 뛰고 뭐 해?”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소녀는 마치 바람결처럼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은은한 향기만 남겼다.
“제길. 저놈도 한패다!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생포해!”
방금 외치던 사람의 낯빛이 크게 변했다.
뒤쫓아오던 사람들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제기랄!”
양준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고 욕을 했다. 그러고는 뒤돌아 소녀를 뒤쫓았다.
하늘색 긴 치마를 입은 소녀도, 뒤쫓아오는 사내들도, 모두 실력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가장 높은 경지가 진원 경지 3, 4단계였다.
양준은 이런 실력의 무인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쓸데없이 번거로운 일에 휘말리게 되자 더없이 화가 날 뿐이었다.
양준은 보법을 펼쳐 짧은 시간에 이미 소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소녀는 깜짝 놀라, 바쁜 와중에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양준은 소녀에게 이를 드러낸 채 험악하게 웃어 보였다. 미소가 험상궂어 너무나 무서웠다.
“동생……!”
양준이 이를 갈며 다정하게 불렀다.
“허억……!”
소녀의 예쁜 얼굴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온몸에는 소름이 쫙 돋았다. 그녀는 양준의 속도가 이렇게 빠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웃음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양준은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달리는 도중에 커다란 손으로 소녀를 덥석 쥐었다.
소녀는 얼굴빛이 크게 달라지며 자그마한 손바닥을 번쩍 들어 맞섰다.
양준은 진원을 돌려 그녀와 한 합을 겨루었다.
소녀의 신형이 휘청거리더니 순간 속도가 늦어졌다. 그녀가 미처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양준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런 다음, 달리던 몸을 우뚝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