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5장.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양준은 곧바로 약방에 걸어 들어갔다.
약방 점원이 그를 맞이하며 친절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약방에는 약재든, 단약이든 없는 것이 없습니다. 가격이 합리적이고 누구든 속이지 않습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물건을 사려고 온 게 아닙니다.”
양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방금 들어간 사람을 보러 왔습니다.”
양준이 말했다.
점원은 그의 말을 듣고,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양준을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더니 화를 내지 않고 넌지시 물었다.
“혹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양준이 빙그레 웃었다.
“능소각에서 친구가 찾아왔다고 하면 알 겁니다.”
점원은 살짝 놀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점원은 내당(內堂)으로 말을 전하러 갔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걸어 나왔다. 그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부성 짙은 말투로 말했다.
“손님, 저를 따라오세요.”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당에 들어가서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점원은 문 앞에 이르러 공손하게 말했다.
“공자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점원은 말을 마치고 물러갔다.
양준은 방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푸근해 보이는 커다란 얼굴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씨 가문, 동경한이었다.
그의 등 뒤에는 풍운쌍위가 서 있었다. 두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늙고 굼떠 보이지만, 사실은 예리한 눈빛을 감추고 있었다. 그들은 양준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동경한의 옆에는 단아하고도 아름다운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뾰로통한 얼굴로 찻잔을 받쳐 들고 있다가 양준을 스쳐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소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커다란 두 눈을 부릅뜨고 멍하니 양준을 바라보다가 방금 전 마신 찻물을 내뿜었다. 옆에 앉아 있던 동경한이 찻물을 그대로 뒤집어썼다.
“왜 그래?”
동경한은 한창 형님 티를 내며 웃는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소녀가 찻물을 내뿜는 바람에 모습이 볼품없이 무너져 내렸다.
“저… 저… 바로 저 자야!”
소녀는 손가락으로 양준을 가리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동경한은 가까스로 머리 위의 찻물을 쓸어내리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좀 알아듣게 말해.”
“내가 산속에서 만났다는 그 남자 있잖아. 날 내팽개친 나쁜 놈!”
소녀가 얼른 설명했다.
동경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양준과 소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통통한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참 공교롭게 됐군…….’
양준도 궁금증이 일었다.
‘저 톡톡 튀는 계집애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여긴 동씨 가문의 점포이고 동경한과 나란히 앉아 있는 걸 보면 신분이 높은 듯한데 설마…….’
양준은 뭔가 어렴풋이 짚이는 데가 있었다.
“감히 내 앞에 나타나다니!”
소녀는 그날의 만남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동경한과 풍운쌍위까지 곁에 있으니 그녀는 금세 기세등등해졌다. 흰 이를 꼭 깨물고 턱을 쳐든 채 의기기양양한 모습으로 양준을 쳐다보더니 어디서 배웠는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히히, 이런 걸 뭐라더라… 길이 훤한 천당엔 안 가고, 문도 없는 지옥에 기어코 찾아오다니. 너 이제 죽었어.”
소녀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얼굴에서 노기나 살기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준은 피식 웃었다.
“생명의 은인을 이렇게 대할 거야?”
그는 말하면서 소녀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탁 쳤다.
소녀는 큰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낮추더니 토끼처럼 도망쳐 동경한의 뒤에 숨어서는 이를 갈며 양준을 쳐다보았다. 동경한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는 모양새였다.
“예를 갖춰.”
동경한이 뚱한 얼굴로 꾸짖었다.
소녀는 즉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양준에게 일갈했다.
“예를 갖추란 말이야!”
“너 말이야!”
동경한이 뒤돌아 그녀에게 눈을 부릅떠 보였다.
“뭐?”
소녀는 순간 당황했다.
“널 구해 줬다며? 고맙단 인사부터 해야지? 다 큰 애가 이렇게 예의를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동경한이 위엄이 서린 얼굴로 꾸짖었다.
“싫어. 쟤가 나를 던지지만 않았어도 나 혼자 약왕곡으로 피신할 수 있었단 말이야.”
소녀는 발을 구르더니 동경한에게 눈을 흘겨 보였다.
“위아래도 모르고, 당장 나가!”
동경한은 화가 나서 탁상을 두드렸다.
소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씩씩거리며 뛰쳐나갔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양준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소녀가 나간 다음에야 동경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풍운쌍위에게 눈짓했다. 쌍위는 곧 신식을 펼치더니, 잠시 후 동경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앉아.”
동경한이 손짓했다.
양준은 털썩 주저앉아 스스로 차를 한 잔 따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까 걔는…….”
“경연이야. 너희 전에 만난 적 있어.”
양준은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러니까 진짜로 사촌 지간이었네.’
그날 그녀는 무심코 양준을 ‘오라버니’라고 불렀었는데, 뜻밖에도 사실이었다.
양준은 동경연(董輕烟)에 대한 기억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유일한 만남은 십 년 전이었다. 그때 그녀는 동경한의 뒤를 따라다니는 계집애였다. 십 년이 지난 지금, 양준이 그녀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여자는 자라면서 열여덟 번 변한다더니만…….”
양준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는 물론, 동경연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일을 누가 그렇게 세세하게 기억하겠는가.
“경연이가 며칠 전에 나이가 엇비슷한 소년이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말했어. 그런데 그게 너일 줄은 몰랐네.”
동경한도 한참을 탄식했다.
“우연히 만난 것뿐이야!”
양준은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날 그는 별로 큰 힘을 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구한 이도 사촌 여동생이었다. 특별히 말할 거리가 못 되었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동경연이 그들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섰다. 그녀는 손에 고옥(古玉) 하나를 쥐고 있었다. 고옥은 미약한 원기 파동을 내뿜었는데 원기가 전해지자 그녀의 모든 기운을 가려주었다. 기운이 완벽하게 가려지자, 신유 경지 고수들의 신식으로도 그녀를 감지할 수 없었다.
곧이어 동경연은 고양이처럼 문밖에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양준은 동경한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이는 그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동경한은 평소에 그녀를 꾸짖은 적이 없었는데, 방금 전에는 그녀를 아예 쫓아내기까지 했다.
동경연은 틀림없이 뭔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일부러 자신을 따돌린 것이라 생각했다.
‘흥… 무슨 얘기를 하는지 꼭 듣고 말 거야.’
방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동경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긴장된 나머지 얼굴도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녀는 긴장되는 한편 흥분되기도 했다. 평소 동씨 저택에 있을 때에도 그녀는 고옥을 이용해 얼마나 많은 비밀을 엿들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엿듣는 데에 무척이나 익숙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
동경한이 양준을 보며 물었다.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들렀어.”
“무슨 부탁?”
“약왕곡에 들어가고 싶은데, 무슨 방법 없냐?”
양준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동경한을 담담하게 쳐다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느 봉에 갈 건데?”
동경한은 얼굴빛을 바로 했다.
“단성봉.”
그 말에 동경한 뒤에 서 있던 풍운쌍위도 양준을 흘끔 바라보았다.
동경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약왕곡에는 열두 개의 산봉우리가 있어. 그중 열 곳은 장로들이 살고, 한 곳은 곡주가 살고 있지. 가운데 있는 주봉이 단성봉인데, 그곳은 약왕곡의 금지 구역이야. 네가 다른 봉에 가겠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지만, 단성봉은… 정말 들어갈 방법이 없어.”
“아예 방법이 없는 거야?”
양준은 단념하지 않았다. 그도 단성봉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동경한을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현재 양씨 가문의 힘을 동원할 수 없지만 동경한은 달랐다. 그는 동씨 가문의 공자이자 미래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자연히 동씨 가문의 권력과 인맥을 동원할 수 있었다.
동경한은 눈썹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더니 말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양준은 눈앞이 훤해지는 것만 같았다.
“방법이 뭔데?”
“두 달 뒤에 이곳에서 연단 대회가 열릴 거야. 모든 문파의 연단사들이 연단 대회에서 실력을 가리지. 그리고 매번 50등 안에 든 연단사들은 단성봉에 들어가 단성상을 보고 연단술을 각성할 수 있다고 해. 네가 만약 50등 안에 들면 당당하게 단성봉에 들어갈 수 있어.”
양준은 눈을 희번덕거렸다.
“넌 내가 연단사로 보이냐?”
동경한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지만 그게 단성봉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 외에 네가 약왕곡의 장로가 되는 방법도 있군.”
양준은 쓴웃음을 연발했다.
두 가지 방법은 모두 어불성설이었다. 약왕곡의 장로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연단 대회에서 50위권에 든다는 것도 말이 안 되었다.
양준은 연단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찌 연단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연단 대회에 나가는 수준이라면 모두 이 분야에서 조예가 깊은 이들일 것이다.
양준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오만상을 찌푸렸다.
“단성봉을 제외하면 어느 봉이든 들어가게 해줄 수 있어. 그리 어렵지도 않아.”
동경한도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했다. 사촌 동생이 처음으로 일을 부탁하는데 도울 방법이 없다니,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어렵지 않다고?”
동경한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간단해. 좀 귀중한 천재지보를 가지고 가서 약왕곡의 장로들에게 제련해 달라고 하면 돼. 그러면 어느 봉이든지 갈 수 있거든. 하지만 기껏해야 반나절 정도 머무를 수 있을 거야. 더 있으려고 해도 약왕곡에서 내쫓아. 장로들은 모두 한 성격 하거든. 거기 제자들도 모두 눈이 정수리에 가 붙었어. 너희 중도 8대 가문 공자들보다 더 안하무인이란 말이야.”
양준은 그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나절밖에 들어갈 수 없다면 시간상 너무 부족했다.
“다른 방법이 없는지 고민해 볼 테니까 오늘은 일단 돌아가 있어. 단성봉에 왜 들어가려는 건지는 묻지 않을게. 나중에 무슨 일 생기면 우리 동씨 가문을 들먹이지만 마.”
동경한의 표정은 근엄하고 진지했다.
양준은 동경한이 심각하게 말하자 씩 웃었다.
“내가 뭘 하러 가는 줄 알고 이래?”
“네가 뭘 하려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난 말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겠지만, 자신은 없어.”
동경한은 탄식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알았어.”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경한과 작별하고 객잔에 돌아온 양준은 좌선하면서 어떻게 하면 단성봉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동경한의 뜻은 이미 확고했다. 그도 양준을 단성봉에 들여보낼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 희망을 걸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