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4장. 그런 거 아니야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만약 다른 제자라면 오늘 죽을 죄를 면치 못했겠지만, 너는 입문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이번에는 용서해 주겠다. 어서 떠나거라. 다음에 또 잘못을 범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양준은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양준이 떠나간 것을 확인하자, 그 사람은 또다시 단성봉 꼭대기로 올라가 계속해서 산을 지켰다.
멀리서 양준은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역시 신유 경지의 고수가 지키고 있었군. 이제 어떡하지?’
만약 만약담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만 있어도 무슨 수를 써보겠지만, 지금은 아예 다가갈 수조차 없으니 손쓸 방도가 없었다.
우울한 얼굴로 걸어가던 양준은 멀리서 동경연이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발걸음을 빨리하자, 얼마 가지 않아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 철골초는 분명 내가 먼저 발견한 것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동경연의 말투에서 억울함이 느껴졌다.
곧이어 다른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매, 무슨 소리야? 그렇다면 이 들에 있는 약초들은 전부 우리가 먼저 발견한 것이지.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자랐으니 말이야.”
“누가 네 사매야?”
동경연은 화가 나 씩씩거렸다.
“나는 소 선생님의 제자야. 족보로 따지면 너희들은 나를 사숙이라고 불러야 해!”
“흠흠…….”
동경연과 대치하던 약왕곡의 젊은 제자들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소부생이 늘그막에 제자를 받다 보니 동경연은 나이가 어렸지만, 약왕곡 사람들보다 등급이 높아 진택과 동급이었다. 이 제자들은 모두 그녀의 아랫사람이었다.
“왜? 사숙이 점 찍은 약초를 빼앗을 셈이야? 응?”
동경연은 의기양양해서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사숙은 무슨…….”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불만 섞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운이 좋아서 소 선생님 밑으로 들어간 거면서. 만약 소 사숙께서 나에게도 그 독단을 먹어 보게 했다면 나도 시험을 통과했을 거야.”
“흥!”
동경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이런 말을 해도 소용없어. 순순히 내가 찜한 약재를 내놔. 안 그러면 사부님께 너희들이…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고 무례를 범했다고 일러바칠 거야!”
동경연의 목소리는 한결 높아졌다.
소부생의 이름이 나오자 약왕곡 제자들의 안색이 변했다. 이런 불손한 죄명은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운은봉은 규율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다른 산봉우리에서는 규율이 엄격해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고 무례를 범한 것은 매우 큰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동경연보다 나이가 많은 데다가 또 남자이니 여자애 앞에서 체면을 구길 리 없었다.
우두머리가 눈알을 굴리더니 앞으로 나서며 히죽 웃고는 입을 열었다.
“사숙께서 운은봉의 제자시라니 분명 연단 천재시겠네요!”
“물론이지!”
동경연은 의기양양해서 대답했다. 그녀도 연단에 푹 빠져 있는지라 예쁘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연단을 잘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더욱 기뻤다. 그의 말을 들은 동경연은 바로 으쓱해졌다.
“사숙께서 철골초를 찾으시나요?”
그 사람이 또 물었다.
“그래!”
“약왕곡에는 철골초가 많지 않은데 사숙께서는 얼마나 필요하신가요?”
“열 뿌리를 캐야 하는데 아직 두 뿌리밖에 구하지 못했어…….”
“그럼 잘됐네요. 저희가 철골초를 좀 캤는데 사숙께 드리면 되겠네요.”
“나한테 주겠다는 거야?”
동경연은 기쁨으로 얼굴이 확 피었다. 순간 그녀는 이 젊은이들이 잘생겨 보이기까지 했다.
곧이어 그 사람이 히죽 웃더니 말했다.
“그냥 드릴 수는 없고… 저는 이 철골초를 걸고 사숙과 한 번 겨뤄 보고 싶습니다. 만약 사숙께서 이기시면 철골초는 물론, 마음에 드는 다른 약재들도 마음껏 가져가십시오. 어떻습니까?”
그의 말을 듣고, 동경연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입을 삐죽거렸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하는 순간, 한쪽에서 양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룬다면 나와 겨루자!”
“양 호위!”
그녀는 양준을 보자마자 기뻐하며 손을 흔들었다.
양준은 몸을 날려 동경연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약왕곡 세 제자들을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겨뤄 보겠다고?”
“바로 쟤야. 시험에 통과해서 운은봉 소속으로 들어갔다는 제자가!”
약왕곡 제자 중 한 명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얼굴에는 부러움과 질투 어린 표정이 섞여 있었다.
“여자를 괴롭히는 게 뭐 대단한 재주라고. 싸우고 싶으면 나한테 덤벼.”
양준은 세 사람에게 말했다.
양준이 이렇게 강하게 나오자 약왕곡의 세 제자들도 욱했다.
우두머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좋아. 정 원한다면 내가 혼내 주지!”
“잠깐!”
양준이 손을 들었다.
“너희들 방금 철골초를 걸겠다고 말한 건 유효하지?”
“당연하지!”
“그럼 됐어.”
양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 명 다 한꺼번에 덤벼.”
세 사람은 경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양준은 말을 마치자마자 날아왔다. 세 사람은 잔영이 날아오는 모습만 보았을 뿐, 이내 세 번의 타격 소리와 함께 벌렁 나동그라졌다. 그들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너무 약한데?”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너무 으스대니 재주가 있는 줄 알았는데, 일격도 견디지 못할 줄이야. 방금 전의 공격은 오 할의 실력밖에 쓰지 않은 것으로 단지 떠보는 것에 불과했다.
“너… 때리는 게 어딨어!”
말을 하던 연단사는 땅에 나동그라진 채, 떨리는 손으로 양준을 가리키며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양준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안 때리고 대련하는 사람 봤어?”
양준은 당당하게 앞으로 다가가 세 사람의 약 광주리를 전부 뒤엎은 뒤 철골초를 모두 챙겼다.
“양 호위, 그만하고 얼른 가자!”
동경연은 빨개진 얼굴로 양준을 잡아끌며 운은봉으로 도망치다시피 떠났다.
“너희들 너무하잖아!”
등 뒤에서 처량하고 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 선생님께 일러바쳐서 너희들이 엄벌을 받게 할 거야!”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겨루겠다고 했잖아? 졌으면서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다니.”
“흠흠…….”
동경연의 안색이 더욱 빨개졌다.
“왜 도망치는 거야? 철골초는 그들이 걸겠다고 한 거니까 이겨서 가져가는 게 당연하잖아. 우리가 빼앗은 것도 아니고.”
“말하지 마. 창피하니까.”
*운은봉에 다다르자, 두 사람은 속도를 늦췄다. 양준은 의아한 얼굴로 동경연의 빨개진 얼굴을 계속 쳐다보았다.
“왜 그래?”
양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동경연은 그를 힐끗 보더니 깊게 숨을 들이쉬고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해명했다.
“오라버니, 연단사 사이에서 겨룬다는 것은 연단술을 말하는 거야. 같은 재료로 단약을 제련한 다음, 단약의 수, 품질 그리고 제련한 시간 등으로 승패를 가리는 거지. 오라버니처럼 주먹다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녀는 말하면서 주먹을 휘둘러 보였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양준은 깜짝 놀랐다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쟤들이 말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
동경연은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이건 상식이라고… 심하게 두들겨 패지 않은 게 다행이지. 만약 다쳤더라면 큰일 날 뻔했어.”
말을 마친 동경연은 이마를 짚고 무기력하게 말했다.
“역시 무인들은 손부터 나가는 야만인이라니까…….”
양준도 더없이 난감해졌다.
‘어쩐지 그 세 녀석, 내가 겨루기를 승낙하는 걸 보고 좋아하는 모습이 이상하다 했어.’
할 말이 없어진 양준은 돌아가는 길에서도 침묵을 지켰다. 오히려 동경연은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입을 막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산봉우리로 돌아와서 채집한 약재를 두 부인에게 넘겨준 뒤, 그들이 준비한 약선을 먹은 양준과 동경연은 각자의 방으로 쉬러 들어갔다.
다음 날, 양준이 방문을 나서기도 전에 밖에서 그윽한 향내가 퍼져 왔다.
양준은 방에서 나와 향이 퍼져 나오는 곳으로 향했다.
얼마 걷지 않아, 방 두 칸짜리 집이 한 채 보였다. 그리고 방 두 칸에는 각각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는 큰 항아리가 있었다. 항아리 속에는 이상한 약재들이 끓고 있었는데, 두 부인은 한 사람당 한 방씩 맡아서 땀을 뻘뻘 흘리며 화로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연단 중이신가?”
동경연도 걸어 나오더니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훑어보았다. 커다란 두 눈은 흥분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양준은 힐끗 보고서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저희가 도와드릴까요?”
향씨 이모가 그 소리를 듣고 일어서더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양준은 옷소매를 걷어 올리며 물었다.
“뭘 도와드리면 되죠?”
향씨 이모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당분간 너희들이 할 건 없어. 이 두 약탕은 너희들을 위해 만든 것인데 밤새 끓인 거야. 이제 다 되어가.”
“우리를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요?”
양준은 경악했다.
난씨 이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한 달 동안 소 선생님께서 각종 약재를 배합하셨지. 너희들이 어제 채집해 온 것들도 전부 이 안에 있어.”
“제 몫도 있나요?”
양준은 왠지 감동했다. 소부생이 동경연을 위해 애써 뭔가를 준비했다면 그나마 이해가 되었다. 동경연은 이미 그의 밑으로 들어간 제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몫도 있다니, 이에 양준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향씨 이모는 살짝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물론이지. 운은봉에 들어오면 운은봉의 사람이야. 너희 둘은 먼저 뭘 좀 먹고, 준비하고 나서 한 시진 뒤에 다시 오너라.”
양준은 입을 달싹였다. 그의 눈에는 감동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아침 식사는 이미 주방 안에 준비되어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음식을 먹으면서 향씨 이모와 난씨 이모가 바삐 일하는 것을 본 양준은 마음속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에 느껴 보는 것이었다.
한 시진 뒤, 양준과 동경연은 각자 약탕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