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4장. 여기는 어디지
잠시 뒤, 양준은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미 허공 통로에서 벗어나 있었다.
다음 순간, 추억몽과 낙소만이 멀지 않은 곳에서 나타났다. 두 여인이 나타난 곳은 거리가 가까웠지만, 갑자기 낯선 환경에 오게 되자 두 여인은 어쩔 줄을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양준을 공격하는 것도 잊었다.
슉-
또 하나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셋은 그 사람을 제대로 확인한 다음,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추억몽이 데려온 추씨 가문의 신유 경지 5단계 고수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는 반쪽 몸만 밖으로 나오고, 나머지 절반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절세 고수가 반으로 자른 것처럼 몸이 가지런하게 잘려 있었다.
반쪽 몸이 떨어지면서 오장 육부가 여기저기 흩어졌고,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어떻게…….”
추억몽은 떨리는 눈동자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낙소만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하마터면 구토할 뻔했다. 그녀는 입을 막는 한편, 추억몽 쪽으로 다가갔다.
“네가 한 짓이냐?”
추억몽은 고개를 쳐들고 냉혹한 표정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온몸의 진원도 점차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녀는 허공 통로의 비밀을 알 수 없었다. 양준이 통로에 함정을 설치해 가문의 고수가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는 분노했다.
양준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어두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에는 그와 맞은편의 두 여인 말고는 누구의 종적도 감지할 수 없었다. 훨씬 먼저 떠난 능소각의 사숙, 사제들은 물론이고, 그보다 한 걸음 앞선 소안도 이곳에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처음 보는 곳이었다. 지난번 능태허와 함께 순간 이동해서 떨어졌던 곳도 아니었다.
양준은 곧장 신식을 펼쳐 사방 이십 리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잠시 뒤, 그는 절망감을 느꼈다.
사방 이십 리 안에 다른 사람들을 발견했지만, 능소각 사람들이 아니라 맞은편 두 여인이 데리고 온 진원 경지, 신유 경지 무인들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그들이 통로에서 나온 위치는 이곳과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또한 여기저기 사방에 흩어져 있고, 인원수도 열댓 명 정도였다. 그중에는 신유 경지 고수가 두세 명 정도 있었다.
‘방금 전 허공 통로에서 싸워서 그런가?’
양준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진원이 허공 통로에서 서로 충돌하면서 통로가 파괴되고 안에 있던 이들이 낯선 곳에 오게 된 듯했다. 지금 땅에 떨어져 있는 반쪽 시체도 나머지 반쪽은 아마 허공 통로에 남아 있을 것이다.
‘정말 위험했군.’
여기까지 생각하자 양준은 식은땀이 났다.
‘순간 이동도 마음대로 할 게 아니네. 자칫하면 반항할 기회조차 없이 죽겠군. 그래도 소안은 능소각의 다른 이들과 합류했을 거야. 어쨌든 내 앞에 있었으니까.’
양준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야, 묻잖아.”
낙소만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양준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자그마한 종문의 제자가 잘난 체하긴! 추 언니는 아름다움으로 널리 이름을 알렸어. 평소 중도 8대 가문 공자들이 언니한테 말을 걸어도 본체만체할 텐데. 지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언니가 먼저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해!?’
양준은 고개를 들고 음침한 표정으로 맞은편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서슬 퍼런 냉기가 스쳐 지나갔다.
‘이것들이 나타나서 방해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소안과 함께 만 리 밖에 있을 텐데.’
그는 방금 전에 소안과 함께 손잡고 놀러 다니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이 나타나면서 두 사람은 갈라지게 되었고, 현재로선 어디 가서 찾아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양준은 답답하다 못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여긴 어디야?”
추억몽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양준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그녀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쭉 빠진 두 다리, 그리고 가느다란 허리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도 빚은 듯이 아름다웠다. 특히 가느다란 허리는 보랏빛 허리띠에 꽉 묶여 한 줌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추씨 가문의 큰아가씨로써 기질이 고귀하고 도도했다. 평소 동년배 젊은 남자들은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압박감을 느끼고 조금도 방자하게 굴지 못했다. 그녀의 물음에는 언제나 대답이 따랐다.
양준은 얼굴에 혐오감과 귀찮음을 드러내며 냉소를 흘렸다.
“어디냐고? 제기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양준이 상스러운 말을 내뱉자, 맞은편 두 여인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낙소만은 깜짝 놀라 가슴을 들썩이면서 이를 악물고 꾸짖었다.
“감히 우리에게 언성을 높여?”
추억몽의 예쁜 얼굴에는 비웃는 표정이 떠오르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군. 아직까지 대놓고 날 욕한 남자는 없었는데, 네가 처음이야.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돼. 좀 있다 잡히면 천천히 물을 테니까.”
그녀는 당연하게 이 모든 것이 다 양준의 농간이라고 생각했다. 양준도 이곳이 어디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양준은 콧방귀를 뀌고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진원이 일렁인 순간, 그만의 보법을 펼쳐 신속하게 두 여인에게로 접근했다.
그는 주변에 있는 신유 경지 고수 세 명이 추억몽과 낙소만의 종적을 알아채고 이쪽으로 신속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반드시 둘 중의 한 명을 인질로 잡아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유 경지 고수에게 포위당하는 순간 끝이었다.
그가 이처럼 대담하게 나오자 낙소만이 소리쳤다.
“위험을 자초하는군.”
그녀의 몸에서 남색의 빛 고리가 하나하나 흘러나왔다. 빛 고리마다 날렵하고 부드러운 힘이 내재되어 있어 양준의 속도를 방해하는 한편, 그의 체내에 침투해 들어갔다.
양준은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진원을 세차게 돌렸다. 낙소만의 초식은 그의 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가 빠른 기세로 달려들자 낙소만은 드디어 얼굴빛이 살짝 바뀌었다.
“조심해!”
추억몽은 급히 일깨워 주는 한편, 손을 흔들어 뭔지 모를 무공을 펼쳤다. 동시에 낙소만의 어깨를 낚아채 신속하게 뒤로 물러났다.
양준은 걸음을 멈추고 옆쪽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진원이 공중에서 부딪치면서 격렬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곧이어 튕겨 돌아온 힘에 양준의 몸이 흔들렸다.
그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한쪽에서 추억몽이 깔깔 웃었다. 그녀의 유연한 몸은 마치 부평초 같았다. 공중에서 가볍게 발을 내딛자 아무 흔적도 없이 순식간에 양준에게 접근했다.
대단한 보법이었다. 추억몽이 보법을 펼치자 그녀의 실체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양준은 무거운 표정으로 신식을 펼쳐 추억몽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염양삼첩폭을 내질렀다.
이내, 추억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고, 체내 진원도 더욱 세차게 돌아갔다.
신음소리와 함께 양준은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났다. 반면 추억몽은 담담한 표정으로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양준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여유 있게 말했다.
“나름 재주가 있군. 하지만 거기까지 하고 고분고분 항복해. 더는 손속을 봐주지 않을 테니까.”
‘생각보다 만만치 않군!’
양준은 그녀의 말에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원래는 낙소만을 인질로 삼으려고 했으나 추억몽이 만만치 않았다. 만약 전력으로 싸우면 그녀를 이길 수 있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상대편 신유 경지 고수가 이쪽으로 신속하게 다가오고 있었기에 양준에게는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도망가려고? 내가 있는데 어림없지.”
추억몽의 눈동자에 의기양양함과 간교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양준의 속마음을 간파하고 그가 대답하기 전에 달려들었다.
“비켜!”
양준이 소리치며 동시에 두 손바닥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백호인과 신우인을 동시에 날렸다. 호랑이가 표호하고 소가 울부짖었다. 붉은 요수 두 마리가 뛰쳐나와 추억몽에게 달려들었다.
추억몽은 놀라는 대신 기뻐하며 생긋생긋 웃었다.
“역시 뭔가 있군. 백운풍이 너한테 패할 만했어.”
그녀는 말하는 한편, 두 손을 휘둘렀다. 줄기줄기 진원이 육안으로 볼 수 있게 쏟아져 나와 하늘을 가리는 커다란 손으로 변하더니 아래로 내리쳤다.
두 수혼은 추억몽에게 닿기도 전에 산산이 흩어졌다.
양준은 흉악하게 웃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수라검이 쥐어져 있었다. 온몸의 진양원기는 단전으로 흘러 들어갔고, 금신의 사악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하늘을 찌르는 사악한 기운이 나타나자 양준은 온통 검은 안개 속에 감싸였다. 오직 뻘건 눈동자만이 섬뜩한 빛을 뿜고 있었다.
수라검을 손에 쥐자, 양준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추억몽은 거세게 흐르는 사악한 기운을 느끼고 드디어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그녀는 놀라서 소리쳤다.
“능소각에는 역시 사공을 수련하는 자가 있었어.”
그녀는 말하면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곧이어 손가락 끝에 커다란 번개 덩어리가 만들어졌다. 추억몽은 그것을 숨 쉴 틈 없이 양준에게 던졌다. 번개가 번쩍이며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그 속에는 무시무시한 힘이 숨겨져 있었다.
양준은 검으로 추억몽의 공격을 내리쳤다.
검을 휘두르자 번개 덩어리가 산산이 부서지고, 그 속에서 작은 번개 빛이 뱀처럼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튀어나와 사방의 십몇 장을 모두 덮어 버렸다.
추억몽은 신속하게 물러섰다. 그녀는 더는 양준을 무시하지 못했고, 얼굴빛도 신중해졌다.
양준은 번개가 번쩍이는 공간 속에서 걸음을 옮겼다. 흐르는 번개 빛이 그의 몸에서 반짝였지만 그를 막지는 못했다. 양준은 속도를 올려 순식간에 추억몽의 앞으로 다가가 검으로 내리쳤다.
추억몽은 검에 내재된 살기와 사악한 기운을 감지하고 아연실색해 소리쳤다.
“막아!”
그녀의 손에는 고풍스러운 방패가 나타났다. 방패는 자욱한 빛을 뿜으며 그녀를 감쌌다. 수비용 비보였다. 재력이 상당한 추씨 가문인 만큼 등급도 높았다.
챙-
수라검이 방패를 갈랐다. 두 사람의 진원이 격렬하게 부딪치며 그 자리에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추억몽은 십몇 장 밖으로 물러났으나 한참 동안 휘청거렸다. 이번 접전에서 그녀는 살짝 밀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손에 든 방패를 보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진원 경지 3단계가 나를 이 정도로 압박하다니. 얕본 걸 인정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