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5장. 스스로 무위를 폐해라
추억몽은 이내 방패를 체내에 거두어들인 뒤, 두 손으로 재빨리 결인(結印)을 날렸다. 서로 다른 속성의 원기 파동이 그녀의 체내에서 뿜어져 나왔다. 바람, 구름, 천둥, 번개 네 개의 속성이 그녀의 주변에서 무서운 기운을 형성했다.
“너랑 실랑이할 시간 없어!”
양준은 마음이 급해져 수라검을 마구 휘두르며 제자리에서 위로 날아올라 이곳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추억몽 때문에 지체된 탓에, 가까이 있던 신유 경지 고수가 이미 그들이 있는 곳에 당도해 버렸다. 사람이 보이기도 전에 공격이 먼저 날아들었다.
양준은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피하는 한편, 만검귀일의 앞부분 초식을 시전했다.
챙-
가벼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양준의 주변에는 수많은 검기가 나타났다. 수라검을 휘두르자 많은 검기 중에서 절반은 그의 주위를 감싸고, 나머지 절반은 앞쪽으로 날아갔다.
“감히 어딜 도망치려고! 아가씨께 무례를 범하다니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오만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옆쪽에서 들려왔다. 곧이어 무지막지한 공격이 들이닥치며 양준이 날린 검기가 모조리 깨져 버렸다.
앞쪽에서 사람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신유 경지 6단계의 고수가 양준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한번 덤벼 보시지!”
양준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냉소를 지었다. 그의 몸 밖에는 또다시 수많은 검기가 나타났고, 그것들은 하늘과 땅을 뒤덮으며 앞쪽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수많은 핏빛 꽃잎이 그의 몸에서 피어났다. 꽃잎마다 예리하기 그지없는 살상 무기였다.
천예혈해당!
낙화교의 진문 비보를 흡수한 뒤, 양준은 아직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힘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족히 천 개나 되는 핏빛 꽃잎이 양준의 몸을 감쌌다. 그가 의념을 전달하자 꽃잎은 하늘을 꽉 메운 붉은 빛이 되어 신유 경지 6단계 고수에게 달려들었다.
“천급 비보다!”
그 고수는 눈썰미가 대단해 한눈에 천예혈해당의 비범함을 알아차렸다. 그는 가슴이 철렁하는 동시에, 실력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온몸의 짙고 순수한 진원을 폭발시키고, 두 손을 앞으로 밀어냈다. 커다란 산 같은 형상이 그의 앞에 나타나더니 천예혈해당을 제압했다.
천 개의 꽃잎이 한순간에 부서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산 같은 형상도 공중에서 휘청거리다가 어두워졌다.
이 기회를 틈타 양준은 수라검을 들고 다가가 신유 경지 6단계 고수를 내리쳤다. 상대방은 방금 전에 진원 소모가 엄청난 무공을 펼치고 미처 숨을 돌리지 못한 터였다.
신유 경지 무인은 수라검의 사악한 기운을 느끼고 얼굴빛이 크게 변하더니 황급히 피했다. 하지만 양준은 일부러 공격하는 척을 했을 뿐이었고, 이내 몸을 슬쩍 스치면서 날아가 버렸다.
“어딜 도망치려고.”
추억몽의 의기양양함과 냉랭함이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거대한 흡입력이 뒤쪽에서 전해졌다. 양준은 저도 모르게 신형을 멈칫하면서 고개를 돌려 보았다. 추억몽이 네 개의 속성이 뭉친 파괴적인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습지로 변한 듯 양준의 몸을 흡입해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망할 계집!”
양준은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수라검을 휘두르자 주변의 수많은 검기가 일제히 추억몽에게 날아갔다.
추억몽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입가에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고풍스러운 방패가 다시 나타나더니 양준의 공격을 막아 주었다. 그러나 밖으로 흩어졌던 천 개의 꽃잎이 조용히 그녀를 포위하고 있었다.
“추 언니, 빨리 피해.”
낙소만은 추억몽에게 말해 주는 한편, 두 손을 움직여 여러 갈래의 빛을 날렸다. 빛이 번쩍이자 공중에서 각양각색의 무기가 만들어지더니 천예혈해당과 맞섰다.
“이제 못 가. 순순히 잡히는 게 좋을 거야!”
추억몽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양준과 싸우는 한편, 큰소리로 외쳤다.
“넌 이제 빠져나갈 수 없어!”
그림자 두 개가 좌우에서 날아왔다. 다른 신유 경지 무인 두 명이 도착한 것이다.
양준의 안색은 극도로 침울해졌다. 마음속에서도 옅은 무기력감이 일었다. 신유 경지 한 명을 상대하면서도, 그는 최선을 다해 모든 비보와 무공을 다 펼쳐야 겨우 살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상대편 신유 경지 세 명이 모두 도착해 버렸다.
‘이걸 버틸 수가 있나? 실력이 너무 모자라! 진원 경지 3단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뒤쫓아온 두 신유 경지 무인은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양준에게 각자의 무공을 펼쳤다.
양준은 겨우 막아 낼 수 있었지만, 온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뼈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그는 줄이 끊어진 연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양준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신유 경지 무인 셋, 그리고 추억몽과 낙소만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들은 모두 험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억몽은 양준의 손에 들려 있는 수라검이 탐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 몇은 그런 감정을 그대로 눈빛에 드러냈다. 그리고 아직 주변에서 흩날리는 천예혈해당도 마찬가지로 탐나는 비보였다.
“또 도망가 보시지?”
추억몽은 양준을 비웃으며 바라보았다. 신유 경지 고수들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더니 동시에 압박을 가했다.
“사마 자식, 스스로 무위를 폐해라. 안 그럼 내가 직접 폐할 것이다.”
신유 경지 무인 한 명이 차갑게 일갈했다.
역경에 처했지만, 양준은 여전히 냉소를 흘렸다. 온몸의 사악한 기운이 꿈틀거렸다. 이미 포위된 상황이었지만 도망칠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불굴지오를 펼치고, 동시에 양염지익을 사용하면 도망칠 가능성이 몇 할이나 될까?’
양염지익이 날아오르는 속도는 일반 신유 경지 무인보다 훨씬 빨랐다. 이들의 첫 공격을 막아 낸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만약영유가 있어, 상처를 입는다 해도 빠르게 치료할 수 있었다.
‘이들의 첫 공격을 막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군. 게다가 여럿이서 하는 협공이잖아. 휴!’
양준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당장 무위를 폐하지 못할까!”
방금 전 말했던 신유 경지 고수는 양준이 스스로 무위를 폐하려 하지 않자, 짜증을 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성큼 앞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양준은 모험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그때, 신유 경지 고수 세 명은 일제히 얼굴빛이 바뀌더니 경계를 높이며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양준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오는 강한 압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압박감은 눈앞의 신유 경지 고수 세 명이 가져다주는 압박보다 훨씬 강했다.
“조심하십시오.”
세 고수는 양준을 거들떠볼 겨를도 없이 추억몽과 낙소만의 앞을 막아섰다. 모두 얼굴빛이 무척이나 어두웠다.
곧이어 허공에 다홍빛이 나타났다. 모두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아름다운 그림자가 불과 십여 장 떨어진 공중에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요염하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몸매가 훤하게 드러나는, 몸에 꽉 끼는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굴곡진 몸매를 가졌으며 피부가 눈처럼 하얬다. 부드러운 손목에는 은빛 팔찌 두 개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옥으로 만든 신 밖으로는 앙증맞은 발가락이 귀엽게 나와 있었다. 가냘픈 몸매는 미풍이 스쳐도 부러질 것만 같았고, 눈꼬리 아래쪽에 쌀알만 한 점이 있어 요염함을 더해 주었다.
소안의 차갑고 고결한 아름다움, 하응상의 천진난만하고 순박한 아름다움과 달리, 이 여인은 뼛속까지 요염했다. 그녀는 그곳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매력이 넘쳐흘렀다.
남자 몇 명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추억몽은 곧 정신을 차리고 속으로 경외심을 느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를 악물며 가볍게 침을 뱉었다.
“남자들은 다 똑같은 물건이야.”
신유 경지 고수 세 명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연신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방심하지 못했다. 그들마저 압박감을 느끼는 여인인데 실력이 낮을 리가 없었다.
여인은 함초롬한 눈으로 몇몇을 둘러보더니, 마지막에는 양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는 빨간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양미간에는 옅은 고통과 갈등하는 기색이 비치더니 그녀는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넌 어디 제자지?”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감미로웠다.
“뭐라고?”
양준은 눈썹을 찡그리더니 의심스러워하며 되물었다.
순간, 여인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의문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양준이 이렇게 빨리 정신을 차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그녀가 일단 입을 열고 말을 하면 누구든지 영향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온몸에 사악한 기운이 넘치는 이 소년은 그녀의 유혹술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사실 양준은 오랫동안 합환공의 고통을 참아 냈기에 남들보다 마음속 욕망을 억누르는 데 적응되어 있었다.
“됐어. 너랑 긴 얘기 나눌 시간 없어.”
여인의 갈등은 더 깊어졌다.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양준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분홍색 비단 띠를 던졌다. 이윽고 비단 띠는 마치 뱀처럼 양준의 허리를 휘감았다.
양준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수라검을 들어 반격하려 했다. 그런데 여인이 이미 그의 눈앞에 다가와서 앵두 같은 입을 벌려 양준에게 입김을 불었다. 난초 같기도 하고 사향 같기도 한 향기가 풍겨 오는 순간, 양준은 온몸의 기운이 빠지며 반항할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실력이 높군. 이미 신유 경지 절정이잖아. 나이가 별로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이렇게 강한 거지?’
“너희들에게 들킨 이상, 살려 둘 수는 없지.”
여인은 나지막하게 탄식하더니 손목을 흔들었다. 은빛 팔찌가 날아가 맞은편 신유 경지 고수들을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