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6장. 취혼향
은빛이 번쩍이자 방금 전 양준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었던 신유 경지 무인 세 명이 그대로 쓰러졌다. 그들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어 버렸다.
은빛의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추억몽과 낙소만에게도 덮쳤다.
이때, 추억몽의 귀걸이가 은은한 빛을 뿜었다. 그 빛은 곧 그녀의 머릿속에 파고들며 그녀를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정신을 차린 추억몽은 재빨리 방패를 꺼내 앞쪽을 막았다.
은빛이 방패에 부딪치자, 추억몽은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여인은 눈썹을 찌푸린 채 몸을 파르르 떨었다. 붉은 입술은 마치 피라도 흐를 것 같았다. 방금 전 진원을 사용한 탓에 지금의 상태를 견디기 힘든 듯했다. 여인은 더는 공격하지 않고 급히 비단 띠에 묶인 양준을 낚아채고는 서둘러 떠나갔다.
낙소만은 얼굴빛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눈빛이 몽롱한 상태였다.
“소만… 콜록콜록…….”
추억몽이 한쪽에 쓰러진 채 힘없이 그녀를 불렀다.
“네……!”
낙소만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이어 놀라서 얼굴빛이 변했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방금 전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입을 연 순간, 그녀는 환각에 빠져들었다.
방금 전의 광경을 떠올리자 낙소만은 부끄러워 당장 죽고 싶었다.
“소만… 나 좀 일으켜 줘.”
추억몽은 온몸의 진원이 들끓고 기혈이 역류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낙소만이 멍을 때리며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불렀다.
“네…….”
그제야 낙소만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너 왜 그래?”
추억몽이 낙소만을 수상쩍게 쳐다보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낙소만은 서둘러 대답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는 얼른 추억몽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품 속에서 단약 한 알을 꺼내 입안에 넣어 주었다.
낙소만은 눈앞의 신유 경지 고수 세 명의 시체를 두려운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추 언니, 방금 그 여자는 대체 누구야?”
낙소만은 무릎을 끌어안고 처량하게 땅바닥에 주저앉아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채로 물었다.
추억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몰라. 하지만 요녀(妖女)인 건 확실해. 나중에 다시 만나면 꼭 조심해야 해.”
“어…….”
낙소만은 찜찜한 마음으로 대꾸했다.
그 여인은 단 한마디 말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소녀를 단번에 요부로 만들었다. 필시 대단한 유혹술을 수련한 것이 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곳곳에 흩어져 있던 십여 명의 진원 경지 무인들이 그들을 찾아왔다. 그들 역시 이쪽에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백운풍도 그중에 있었다.
쌍방은 합류하여 서로의 상황을 알아보았다. 추억몽은 마음이 끝없이 가라앉았다. 이제 그녀 쪽에는 열 명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신유 경지 고수는 모두 살해당해 버렸다.
“먼저 여기가 어딘지 알아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 보자.”
추억몽은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공중에서 붉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방금 전 추억몽 일행과 대치했던 요염하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확실히 실력이 높아 나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양준은 분홍색 비단 띠에 묶인 채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호랑이 굴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늑대 굴에 잡혀가는군.’
여인은 사람 몇을 단번에 죽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손쉽게 죽이는 것을 봐서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왜 나를 잡아가는 거지?’
양준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몰래 진원을 가동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오직 신식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고수 앞에서 쉽사리 신식을 펼칠 수가 없었다.
“괜히 힘 빼지 마. 내 취혼향(吹魂香)에 중독되면 온몸이 무기력해지고 진원이 봉인되니까. 네가 나보다 실력이 좋지 않은 이상, 봉인은 풀 수 없어.”
“취혼향? 좋은 이름이네.”
양준이 싱긋 웃었다.
‘이름만 들어서는 최음제 같은데? 과연 방탕한 요녀군. 방금 전에도 얼굴에 옅은 정욕이 감돌았지. 이대로 잡혀 가면 온몸의 진원을 다 뺏기고 양기를 빨린 채 죽는 거 아니야?’
양준은 이 여인이 양기를 빼앗아 음기를 보충하는 사악한 공법을 수련했다고 추측했다.
‘이렇게 죽으면 너무 비참한데.’
“취혼향을 몰라?”
여인은 미심쩍은 듯 양준에게 다시 물었다.
“내가 그걸 알아야 해? 됐어. 말 시키지 마. 참느라 힘들어.”
양준은 곧이어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들끓는 욕망을 억눌렀다.
여인은 양준이 대담하게 말하자, 저도 모르게 깔깔 웃더니 시선을 내려 양준을 훑어보았다.
‘취혼향도 모르는 걸 보면 성지(聖地)의 제자가 아닌가?’
마침 양준도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의 미소는 아름다웠고, 홍조를 띤 고운 뺨은 비할 데 없이 매혹적이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양준은 얼떨결에 한 손을 내밀어 여인의 종아리를 만졌다.
여인은 천둥을 맞은 것만 같았다. 원래부터 힘들게 참고 있었는데 양준이 이처럼 살갑게 만지자 얼굴빛이 급변하더니, 두 볼은 더욱더 붉어졌다.
“나쁜 자식!”
여인은 화가 치밀어 이를 악물고 한마디 했다. 양준의 무례한 행동은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그녀의 유혹술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신체적 접촉은 그녀가 견디기 힘들었다. 그녀는 양준을 데리고 술에 취한 것처럼 공중에서 휘청거렸다.
“놔.”
여인은 이를 가볍게 악물고 발을 들어 양준의 어깨를 걷어찼다. 그러고는 비단 띠를 끌어당겨 양준을 옆으로 끌어 올렸다.
양준의 몽롱하고 열기가 가득하던 눈동자에 광기와 교활함이 번졌다. 그는 그녀에게 히쭉 웃어 보이고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너…….”
여인은 얼굴빛이 급변했다. 양준이 아직까지 의식이 또렷하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양준의 행동은 더욱 과감해졌다. 두 손으로 여인의 가느다란 허리를 꽉 껴안자 향기롭고 부드러운 느낌이 전해졌다. 여인의 허리는 마치 뼈가 없는 것처럼 탄력이 좋았으며 조금만 힘을 주어도 허리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이거 안 놔!”
여인은 이를 악물고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안 놔!”
양준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요녀의 상태가 말이 아니군. 강한 최음제에 중독된 것 같단 말이야. 가벼운 신체 접촉만으로도 어쩔 줄을 모르네.’
여인의 실력이 너무 높아 양준은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여인의 손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런 비열한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죽을래? 이거 안 놓으면 우리 둘 다 죽어!”
두 사람은 지면과 점점 가까워졌다. 백 장 높이 고공에서 추락하면 여인의 실력이 아무리 높아도 묵사발이 될 것이다.
“여인의 치마폭에 싸여 죽는 것도 나쁠 건 없지!”
여인은 끝내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나쁜 자식, 뻔뻔스럽긴.’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서 마음속 욕망을 억지로 참으며 진원을 돌려 추락하는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나 진원은 곧 몸에 전해지는 감각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다.
퍽-
양준과 여인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껴안고 몇 바퀴나 뒹굴어서야 겨우 멈춰 섰다. 다행히 마지막에 떨어지는 속도를 최대한 조절한 덕분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떨어짐과 동시에 양준의 운신은 좀 더 자유로워졌다.
흙먼지가 날리는 가운데 양준은 막무가내로 여인을 짓눌렀다.
여인은 반항할 힘을 완전히 잃었는지 눈을 꼭 감고 기다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유연한 그녀의 몸이 꼼지락거렸다. 그녀는 마치 운명에 맡긴 듯 더는 반항하지 않고 두 손으로 양준의 머리를 부드럽게 받쳐 들고서 그를 위로 끌어 올려 입을 맞췄다.
“너……!”
양준은 한 글자를 내뱉자마자 눈앞이 어질해지며 순식간에 감각을 잃고 여인의 품에 쓰러졌다.
여인은 끊임없이 숨을 헐떡이며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가라앉혔다. 잠시 뒤, 힘을 회복한 그녀는 양준을 몸에서 밀쳐 내고 이를 꼭 깨문 채 화를 삼켰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땅바닥에 혼절해 있는 양준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한 손으로 잡아들고 다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