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278화 (278/853)

제 278장. 요미여왕 선경라

“네가 내 식해 안으로 들어왔어. 너 어떻게 내 식해에 들어온 거야?”

선경라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예쁜 얼굴에는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나도 몰라.”

양준은 고개를 저으며 내려다보았다. 과연 그의 몸은 보이지 않았다. 신식만이 무의식중에 상대의 식해 안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호기심이 찬 눈빛으로 망망대해를 훑어보았다. 바닷물에는 파괴력이 내재되어 있는 듯했다. 양준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여기가 네 식해구나.”

“빨리 나가!”

선경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식해에는 한 사람의 모든 비밀이 담겨 있었다. 일단 남한테 식해를 침투당하면 비밀을 숨길 곳이 없게 된다. 게다가 남의 식해에 침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 무인들은 수비용 영혼 비보나 신혼기(神魂技)로 신식의 침투를 막았다. 선경라 같은 고수는 영혼 비보가 있거나 수비용 신혼기를 수련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양준이 그녀의 식해에 침투한 것이다.

양준은 선경라의 식해에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선경라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동시에 양준의 행동에 화가 치밀어 이를 갈며 말했다.

“지금 바로 안 나가면, 이 안에 영원히 가둬 버릴 거야.”

양준은 깜짝 놀랐다.

“갈게, 갈게. 식해는 처음이라, 구경 좀 해 봤어.”

그는 말하면서 서둘러 도망쳤다.

양준의 신식이 나가고 나서야 선경라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선경라는 의문투성이였지만 지금은 경지를 돌파하는 고비라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의심을 내려놓고 전심전력으로 공법을 운행했다.

양준 역시 공법을 운행했다. 뚜렷이 보이는 진원이 흰 번데기에서 흘러나와 그의 경맥에 흘러들면서 진원이 점차 강해졌다. 마치 명주실을 뽑고 고치를 벗기듯 선경라 몸 밖의 번데기가 점점 작아지면서 그녀의 몸이 드러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열흘이 지나갔다.

양준은 천천히 눈을 뜨고 굳었던 몸을 살짝 움직였다. 한바탕 콩 볶는 듯한 폭발음이 몸 곳곳에서 들려왔다. 온몸에서 무궁무진한 힘이 넘쳐나는 것 같았고, 체내의 진원이 용솟음치며 몸 상태가 전례 없이 상쾌했다.

진원 경지 4단계!

열흘 간의 좌선과 함께 선경라의 흰색 번데기에서 순수한 진원을 적지 않게 빼앗아 수련한 양준은 단숨에 경지를 돌파했다.

양준은 맞은편에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 보았다. 선경라가 나른하게 동굴 벽에 기대어 앉아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양준은 문득 섬뜩해져 체내의 원기가 저절로 운행되었다.

“널 죽이려고 했으면 진작 죽였어.”

양준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맞는 터라 곧 홀가분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살려줘서 고마워!”

선경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부터 죽일 생각 없었어. 어쩔 수 없이 널 잡아온 거야.”

그녀는 말하는 한편, 가볍게 기침을 했다. 얼굴빛도 살짝 창백해 보였다.

“왜 그래?”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았다.

‘온몸의 기운이 전보다 훨씬 약해졌네. 부상당한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선경라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예쁜 눈에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나 때문이라고?”

양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양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너 왜 내 힘을 흡수해 갔어?”

선경라가 이를 갈며 화냈다.

양준은 멍한 표정으로 좀 전의 일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환각 상태에서 널 만나 잠자리를 같이 했어. 그리고 공법을 돌려 환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선경라는 얼굴이 발그스름해져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랑?”

“음, 네가 아주 적극적이고 정열적이던데.”

양준은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서 선경라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피가 끓어올랐다.

“아쉽군!”

그는 연신 탄식하면서 안타까워했다.

“징그러운 자식.”

선경라는 살짝 침을 뱉더니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게 너한테 영향을 미쳤다고?”

양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면? 한창 경지를 돌파할 때인데 네가 힘을 흡수해 버렸잖아……. 영향이 있을까, 없을까?”

선경라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양준은 순간 어쩔 줄 몰라 했다.

“난 몰랐어.”

“네가 알고 그랬다면 진작 죽여 버렸을 거야. 지금까지 살려 뒀겠어?”

선경라가 매섭게 그를 흘겨보았다.

“그럼 경지 돌파는?”

양준의 눈빛이 반짝였다.

“못했지! 돌파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네 공법에 역으로 당해 경지가 더 낮아졌어. 언제 다시 돌파할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말해 봐. 이게 네 잘못이 아니야?”

“그게 어떻게 내 탓이야… 그럼 네 지금 경지가……?”

양준은 코를 매만졌다. 선경라의 경지가 낮아졌다는 말에 양준이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진원 경지 1단계, 이제 속 시원하냐?”

선경라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새침하게 양준을 흘겨보았다.

“진작 얘기하지.”

양준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신중함과 조심성을 모두 던져 버리고 완전히 마음을 놓게 되었다.

‘요녀가 진원 경지 1단계라니, 나보다 경지가 더 낮잖아. 이제 더는 두려워할 필요 없겠네.’

선경라의 경지가 양준보다 낮아지긴 했지만 고수로서의 저력은 여전했다. 정말 그녀와 싸우게 되면 반드시 이길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다행히 둘 다 상대에게 살심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서로 싸울 일은 없을 듯했다.

“에휴, 그래 너를 탓할 거도 없지. 널 여기 데려오지 않았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텐데.”

선경라가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그녀의 진심 어린 말에, 양준도 조금 죄책감이 들어 난감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난 네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 고마워.”

“그래도 양심은 있네.”

선경라는 입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었다. 경지 돌파에 실패했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듯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한담을 나누다가, 양준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잠깐 쉬고 있어. 나가서 먹을 것 좀 구해 올게.”

“조심히 다녀와!”

선경라가 나지막하게 당부했다.

양준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끔 보았다. 선경라가 왜 자신에게 신경 쓰는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뒤돌아 동굴을 나섰다.

양준이 떠나고 나서야 선경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야릇한 표정을 짓더니 희고 앙증맞은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오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랑의 씨앗인가… 휴!”

선경라는 특수한 체질이라 수련 공법도 특별했다.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고 그 남자와 단 한 번의 운우지정을 나눌 수 있었다. 그전에 반드시 마음속에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시기가 되어 씨앗이 싹트면 그때 사랑하는 사람과 운우지정을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사랑을 나눈 남자는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 그녀의 수련 공법이 대성을 이룰 수 있었다.

양준은 그녀에게 방자하게 굴면서 무의식중에 식해 안에 침투했다. 그리고 그녀의 식해 속에 본인의 신식을 남겨 두었다. 이는 결국 그녀의 마음속에 씨앗을 뿌린 것과 같았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씨앗이었다.

그녀와 같은 체질을 가진 일족의 슬픈 운명이었다. 그녀의 일족은 대대로 딸만 낳아 맥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매 세대의 여인들은 모두 이런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어야 했다.

선경라는 지금까지도 어머니가 여생 동안 얼마나 아버지를 그리워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평생 괴로움과 고통에 시달리다가 결국 우울하게 생을 마감했다.

사랑의 씨앗은 서로 사랑할 때만 무르익었고, 공법을 대성하려면 그녀의 일족도 진심을 바쳐야 했다.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사랑하는 이가 횡사한다. 이런 일을 어느 여자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지금 그런 일이 그녀에게 닥쳐오고 있었다.

선경라는 붉은 입술을 깨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원래는 몇 년 더 지나서 그녀에게 반한 남자를 찾아 사랑의 씨앗을 싹 틔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 외로 일은 갑작스럽게 벌어졌다.

*탁탁 기름이 튀는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코끝에는 은은한 고기 향이 감돌았다. 선경라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고는 가느스름하게 눈을 떴다.

양준은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 앉아 모닥불을 보고 있었다. 모닥불 위에는 반쯤 익은 들짐승이 있었다.

“걱정도 안 되나 봐!”

양준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가 방금 돌아왔을 때 선경라는 놀랍게도 잠들어 있었다.

“무슨 걱정을 하겠어? 네가 날 잡아먹기라도 할 거야?”

선경라는 미소를 지으며 양준을 바라보았다.

“잡아먹고 싶어. 너만 괜찮다면.”

“너한테 그런 복이 있을까?”

선경라가 연신 웃었다.

얼마 안 되어 들짐승이 구워졌다. 양준은 다리 하나를 찢어 선경라에게 건넸다. 선경라는 고기를 받아 들고 점잖게 한 조각을 찢어 입에 넣고 씹었다. 식사하는 자세가 우아했다.

반면 양준은 남은 들짐승을 안고 마구 뜯었다. 먹는 모습이 너무나 거칠었다.

“야만스럽긴.”

선경라가 그를 노려보았다.

양준은 씩 웃었다. 그는 고기를 씹으면서 물었다.

“미처 묻지 못했네. 근데 여긴 뭐 하는 곳이야?”

“여기가 어디인지도 몰라? 너 성지 제자 아니야?”

선경라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성지? 무슨 성지?”

양준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전에도 어디 제자인가 물었었지. 성지와 관련된 모양이군.’

양준이 깜짝 놀라 물었다.

“설마 여기 대한국이 아니야?”

선경라가 깔깔 웃었다.

“너 멍청해진 거야,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거야? 당연히 대한국이지.”

양준이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잘 몰라. 얼떨결에 여기까지 왔어.”

선경라는 양준이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 얼굴빛을 바로 하며 말했다.

“여긴 창운성지야.”

“창운성지? 창운사지가 아니고?”

양준은 간담이 서늘해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선경라를 바라보았다.

“너 정말 성지의 제자가 아니구나. 사지는 무슨! 참 듣기 거북하게 말하네. 너희들이 말하는 사도(邪道)가 우리에게는 정도(正道)거든. 서로 이념이 다를 뿐이야.”

선경라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화가 나서 말했다.

“창운사지… 선경라…….”

양준의 뇌리에서 뭔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형형한 눈빛으로 맞은편의 선경라를 바라보았다.

“요미(妖媚)여왕 선경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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