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9장. 우리 큰일 난 거 같은데
창운사지에는 사주 아래로 6대 사왕이 있었다.
각각 뇌정수왕(雷霆獸王), 패천역왕(覇天力王), 음명귀왕(陰冥鬼王), 요미여왕, 섬전영왕(閃電影王), 절멸독왕(絶滅毒王)이었다.
사주가 세상에 나타난 관계로 양준도 얼마 전에 창운사지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아보았다. 당연히 6대 사왕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6대 사왕 중에서 여인은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눈앞의 뼛속까지 요염한 절세가인 선경라였다.
‘어쩐지 이름을 들었을 때 귀에 익더라니.’
선경라는 양준의 놀라는 모습에 가볍게 웃으며 여유 있게 물었다.
“그래 맞아. 바로 이 몸이지. 왜 이제 좀 무서워?”
“무섭긴 뭐가 무서워? 하늘 아래 가장 요염한 여인이 눈앞에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나네.”
양준은 씩 웃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선경라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혀를 찼다.
‘소문난 요미여왕이 이런 모습이었군. 소문보다도 훨씬 더 요염한데.’
“그만 쳐다봐. 음흉한 자식!”
선경라는 양준의 뜨거운 눈빛에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손에 들고 있던 고기를 무기로 삼아 냅다 던졌다. 양준은 몸을 비틀어 가볍게 피하고는 웃으면서 다시 앉았다. 그러고는 눈살을 찌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이동 진법이 무너지면서 그는 창운사지로 오게 되었다. 이는 소안 일행이 간 곳 하고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한동안 그들을 만나는 건 어려울 듯했다. 게다가 이곳은 창운사지라 사마(邪魔)가 가득할 것이다.
‘이곳을 어떻게 벗어나지?’
우선 눈앞의 선경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했다. 그녀의 신분과 수단으로 그를 창운사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아마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양준은 결정을 내리자 곧 고기를 한 조각 더 찢어내 선경라에게 친절하게 건넸다.
선경라는 화가 나서 그를 힐끗 보더니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네 침이 묻었잖아. 안 먹어.”
“내 침을 처음 먹은 것도 아니고…….”
양준은 툴툴거리면서도 강요하지 않았다.
선경라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난번 어쩔 수 없이 입맞춤 한 것을 떠올리자 이가 갈렸다.
*울창한 숲 속에서 추억몽 일행은 황급히 도망치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는 몸에 이리저리 상처 자국이 가득한 낙소만과 백운풍이 따르고 있었다. 그 외에도 원래 십여 명이던 진원 경지 무인들은 두세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의 뒤에는 쫓아오는 무리가 있었다.
일행은 죽을 둥 살 둥 내달리다 보니 진원이 빠르게 소모되었다. 곧이어 앞쪽에 자그마한 산골짜기가 나타났다.
추억몽은 가볍게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앞쪽에서 잠깐 쉬자. 뒤쪽 무리들이 금방 뒤쫓아오지는 못할 테니까, 잠깐 쉬면서 회복한 뒤에 다시 움직이자.”
그녀의 말에 일행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모두들 하루 밤낮을 도망치다 보니 많이 지쳐 있었다.
얼마 안 되어 그들은 은폐된 골짜기에 이르렀다. 각자 자리를 찾아 앉고서는 단약을 먹고 회복했다. 마침 옆에는 산 정상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샘물이 있었다.
추억몽과 낙소만은 얼른 그쪽으로 가 물 몇 모금을 마시고 메마른 목을 축였다. 얼굴까지 씻고 나니,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날 요염한 붉은 옷의 여인을 만나고 나서부터 그들에게는 연이어 불운이 닥쳤다. 같이 왔던 신유 경지 고수는 모두 그 여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뒤로 진원 경지 무인 열댓 명은 추억몽의 인도 하에 주위의 지형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사공을 익힌 무인들에게 포위되었다. 격전을 거쳐 어렵사리 돌파구를 뚫었으나 너무 소란스럽게 싸운 바람에 더 많은 무인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일행은 실력이 약한 편이 아니었으나 적이 너무 많았다. 며칠간 뒤쫓아오는 무리들이 점점 더 많아짐에 따라 추억몽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이끌고 밀림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곳의 지형을 이용해 포위를 뚫을 돌파구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두 여인이 피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추 언니, 근데 여기가 어디야?”
낙소만의 커다란 눈에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추억몽은 낙소만의 물음에 순간 당황했다. 이윽고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도 창운사지 같아.”
“뭐, 창운사지?”
낙소만은 비명을 질렀다. 아름다운 눈망울이 가볍게 떨렸다.
다른 이들도 모두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운풍은 미간을 찌푸리고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어째서 여기가 창운사지라는 거야?”
추억몽은 담담하게 그를 슬쩍 보더니, 덧붙여 말했다.
“창운사지가 아니고서는 사공을 익힌 무인들이 이렇게 많을 리가 있어? 그놈들 싸울 때 표정 못 봤어?”
“그렇다고 꼭 창운사지라고 할 수는 없잖아……. 혹시 그냥 어느 사종에 들어온 건 아닐까?”
백운풍은 여전히 미덥지 않아 했다.
추억몽은 가볍게 웃으며 확신에 차서 말했다.
“틀림없이 창운사지야.”
“그럼 어떡하지?”
낙소만은 주관이 없어 추억몽처럼 자신감을 가지고 전체 상황을 이끌 수 없었다. 그녀는 창운사지라는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나도 몰라!”
추억몽은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번에 사람들을 이끌고 능소각에 찾아갔다가 뜻밖에 만 리 밖에 있는 창운사지에 오게 되었다. 당초 생각했던 바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곳이었다.
창운사지에는 고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사마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이제 그들 곁에서 보호해 주던 고수마저 없어졌으니, 그들의 힘으로 봉쇄를 뚫고 안전하게 떠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지금 창운사지는 바깥의 세력들과 물과 불의 관계로 한창 교전 중이었다. 만약 일행이 적의 손에 떨어지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추억몽과 낙소만은 모두 아름다운 미모를 지녔다. 못된 짓을 일삼는 사공 무인들에게 잡히면 그녀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얼른 쉬어. 다행히 쫓아온 무리에 고수들이 별로 없었어.”
추억몽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낙소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눈을 감았다.
그들이 겨우 반 시진이나 앉아 있었을까, 추억몽이 눈을 번쩍 뜨더니 소리쳤다.
“어서 움직여.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그녀의 고함을 듣고 사람들은 황급히 좌선에서 깨어나 일제히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한 달 동안 추억몽은 몇 번이나 적의 동향을 미리 알아내고 많은 위험과 어려움을 피했다. 진원 경지 9단계밖에 안 되는 그녀가 어떤 수단으로 위험을 미리 알고 피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곳에 온 이들은 그녀의 수단에 감탄해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르게 되었다.
*양준과 선경라는 숲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거의 한 달 동안 함께하면서 양준은 선경라가 사실 심성이 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가냘프고 용모가 요염하며 나이도 대략 27~8살 정도 되는 듯했다. 하지만 외모 관리를 잘해 겉보기에는 십대 소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세월이 남겨 준 독특한 기질이 배어 있었다.
이러한 기질은 특히 남자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요염함이 더해져 그야말로 세상 남자들의 천적이었다. 남자들은 나이 불문하고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그녀와 함께 움직이는 동안, 양준도 침착하게 행동하고 더는 전처럼 허튼소리를 함부로 하지 않았다. 선경라도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17~8살 정도의 소년 중에 이렇게 침착한 성격을 가진 이는 흔치 않았다.
두 사람은 비록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선경라는 과묵한 편이었고, 양준도 남을 귀찮게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쉴 때마다 한시도 긴장을 풀지 않고 수련했다.
선경라는 이번에 무언가 찾으러 왔다고 했다. 그 물건은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것으로 과거에 그녀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도 찾아다녔다고 했다. 이번에는 그녀의 차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계획은 계획일 뿐. 이곳에 오기 전 그녀의 실력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양준의 공법에 역으로 당해 경지가 낮아졌고, 조금 회복했다고 하지만 진원 경지 3단계밖에 되지 않았다. 이 실력으로는 그 위험한 곳에 갈 수 없었다. 지금 그곳으로 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십여 일 동안 밀림 속에서 헤맸지만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던 양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의심스러운 듯 곁눈질로 선경라를 힐끔 보았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선경라도 걸음을 멈추고 담담하게 양준을 바라보았다.
“너 혹시 길 잃은 거 아니야?”
양준이 내심 짐작했던 바를 물었다.
선경라의 얼굴에 어설픈 표정이 떠오르며 눈빛이 반짝였다.
“정말이야!?”
양준이 놀라 다시 물었다.
선경라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콧방귀를 뀌었다.
“길을 잃었으면?”
양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길을 잃었으면 진작 말해야지. 난 네가 길을 아는 줄 알고 따라다녔잖아. 이거 며칠간 헛걸음만 했군.”
선경라는 며칠간 침착하게 길을 재촉했고 표정도 담담했다. 이곳의 경치가 눈에 익지 않았다면 양준도 아마 몰랐을 것이다.
‘아니 그래도 고수잖아. 어떻게 길을 잃을 수 있지?’
양준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가 뭘 알아. 이 숲 어딘가 진법이 있어. 사방 백 리 가까이가 모두 미로거든. 원래 실력이라면 헤매지 않고 금방 찾았겠지만, 지금은 경지가 낮아져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어.”
그녀는 말하다가 다시 원망에 찬 눈길로 양준을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결국 네 탓이야.”
“나랑 무슨 상관이야!”
“누가 경지를 돌파할 때 힘을 나눠 가지랬어? 누구 공법 때문에 내 실력이 크게 떨어졌는데?”
선경라가 조소를 머금고 연이어 쏘아붙였다.
그녀가 양준을 미로 속에 데려올 때, 본인도 양준의 공법에 역으로 당해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 그래. 다 내 탓이야.”
양준도 찔리는 것이 있어 더는 타박하지 않았다. 이내, 조심스레 신식을 펼쳐 보았으나 신식의 범위가 크게 줄어 사방 일 리 정도밖에 미치지 못했다.
선경라는 가볍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진원 경지 4단계에 신식을 수련하다니, 어딘가 이상해. 신유 경지가 아니면 나갈 길을 찾을 수 없어. 괜히 힘 빼지 마.”
“우리 큰일 난 거 같은데.”
양준의 얼굴빛이 살짝 변했다.
양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7~8개의 그림자가 공중에서 내려오더니 두 사람과 멀지 않은 곳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