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280화 (280/853)

제 280장. 기세등등한 그녀

선경라는 얼굴빛이 흐려지더니, 실눈을 뜨고 그쪽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이쪽으로 다가온 이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금세 기세등등해졌다. 양준은 의아한 눈초리로 그녀를 훑어보며 동시에 나타난 이들을 경계했다.

“어……!”

갑자기 나타난 이들은 땅에 내려서자마자 양준과 선경라를 발견했다. 이들은 추억몽 일행을 쫓다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붉은 옷으로 몸을 감싼 선경라를 보자 그들은 얼굴빛이 급변하더니 일제히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선경라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온몸의 기세는 더욱더 두드러졌다.

그녀가 이처럼 노려보자 나타난 무리들은 하나같이 강적을 만난 것처럼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누군가 했더니 수왕의 못난 부하들이었군!”

선경라는 시큰둥해서 콧방귀를 뀌더니 느릿느릿 말했다. 거만한 태도에는 뼈를 파고드는 냉기가 배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몸을 흠칫 떨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중 신유 경지 3단계 고수가 급히 앞으로 나와 공손하게 예를 올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원명(郭元明)이 요미여왕을 뵙습니다. 실례를 범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말할 때 눈을 내리깔고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감히 선경라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여왕님을 뵙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서둘러 예를 올렸다. 그들의 표정은 경건함 속에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네놈들이 날 추격하다니. 간이 제법 크구나.”

선경라가 코웃음을 치자 그자들은 더욱 두려움에 떨었다. 선경라는 말하는 사이 얼굴빛이 어두워졌고,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살기가 번뜩였다.

선경라의 추궁에 곽원명 일행은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어찌 여기서 이 요녀를 만났을까?’

“아닙니다. 저희는 성지에 침입한 진원 경지 무인들을 뒤쫓고 있었습니다. 대인을 쫓을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신경 쓰이게 해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곽원명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오, 그래.”

선경라가 나긋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곽원명 일행의 귀에는 하나도 감미롭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선경라는 여유 있게 난화지(蘭花指)를 들어 자신의 손톱을 가볍게 만지작거리더니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못을 알았다면서 뭘 꾸물대고 있느냐? 내 손으로 직접 죽여 주랴?”

곽원명은 후들후들 떨면서 털썩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끼쳤다. 그의 뒤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식은땀이 뚝뚝 떨어져 목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 들어갔다.

양준은 눈을 반짝이며 선경라의 등 뒤에 말없이 서 있었다.

그는 선경라의 수단을 처음 보았다.

‘이것이 진정한 요미여왕의 모습인가?’

양준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 나타난 무리들의 주인과 선경라 사이에 은원관계가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면 이렇게 만나자마자 그녀가 영문 없이 괴롭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지금 선경라는 실력이 떨어진 것을 염두에 두고, 선제 공격해 그들을 쫓아내려는 의도도 있었다.

“깔깔깔… 장난이니 그만 일어나거라. 진담으로 받아들이니 재미가 없군.”

선경라는 애교 띤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곽원명은 여전히 꼼짝도 못했다. 그는 선경라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만약 일어섰다가 그녀가 곧장 죽여 버리면 어떡한단 말인가.

그는 연거푸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대인!”

선경라는 그들을 차갑게 힐끗 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서 너희 주인에게 전해라. 지난 번에 있었던 일은 반드시 되갚아 줄 것이라고. 어서 꺼져!”

곽원명은 그제야 서둘러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면서 공경을 표하며 대답했다.

“말씀 꼭 전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빠른 시간 내에 내 시야에서 멀어지지 않으면 영원히 붙잡아 둘 것이다.”

슉- 슉- 슉-

무인들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허둥지둥 달아났다. 그들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우리도 그만 가자.”

선경라는 콧방귀를 뀌더니 뒤돌아보며 말했다.

양준은 선경라의 뒤를 바싹 따르며 마음속으로 그녀의 수단과 방금 드러낸 위압감에 감탄했다.

선경라는 걸음걸이가 점점 더 빨라지더니 한참 지나서 아예 바람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뭘 그리 서둘러? 이미 그들을 속여 넘기지 않았어?”

양준은 그녀를 쫓아가면서 의혹에 차 물었다.

“잠깐 고비만 넘겼을 뿐이야. 곽원명은 영악한 놈이라서 금방 눈치챌 수 있어. 난 뇌정수왕과 사이가 안 좋아. 지난번에는 그가 보낸 사람에게 습격당해서 중상을 입은 거야. 그들에게 잡히면 끝이야.”

선경라는 급히 설명하며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계속해 날아갔다.

“너도 어쨌든 사왕 중 한 명이잖아. 뇌정수왕과 같은 신분인데도 대놓고 너를 공격하다니. 심각한 이익 충돌 관계가 아니면 네 미모를 탐해서겠군.”

양준의 표정이 야릇해졌다.

“입 닥쳐!”

선경라는 싸늘한 얼굴빛을 하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양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곽원명 일행은 족히 십여 리를 빠져나가고 나서야 멈춰 섰다.

“왜 그래, 곽 형?”

신유 경지 2단계 고수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곽원명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선경라가 있는 곳을 뒤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요녀가 오늘 좀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잘못됐어?”

“왜 우리를 이렇게 쉽게 풀어줬지? 수왕께서 요녀를 습격한 게 불과 얼마 전이잖아. 그전의 은원 관계를 따지지 않는다 해도, 이렇게 우리를 쉽게 보내 주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곽원명은 생각할수록 의심이 들었다.

“그러게? 왜 우리를 그냥 풀어줬을까?”

곽원명은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가 주저하며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지난 습격 때, 요녀를 잡지는 못했지만 크게 부상을 입혔다고 했어.”

“그래 맞아. 아까 보니 원기가 불안정했어. 그때 중상을 입고 아직 회복이 덜 됐나?”

“하긴 우리 수왕께 공격당했으면 회복이 느리겠지. 그래, 중상을 입은 게 틀림없어. 안 그럼 그 독한 여자가 우리를 쉽게 보내줄 리가 없지. 반년 전, 원석의 동생이 요녀를 훔쳐봤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잖아……. 요녀가 원래 모질고 손속이 매서운데 이리 만만할 리가 없어.”

이 말에 원석(元石)의 흉악한 얼굴에 독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콧방귀를 뀌더니 한마디 했다.

“만약 저들 일족이 수련하는 공법이 특별해서 윗대 여왕이 대부분 무위를 그대로 물려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리 강한 실력일 수 있겠어! 난 진작에 그 여자를 죽이고 싶었어.”

곽원명은 눈알을 굴리더니 웃었다.

“원 사제, 동생 복수를 하려면 지금이 기회야.”

사람들은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모두 깜짝 놀랐다.

요미여왕을 노리다니. 누구나 감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겁나? 우리를 풀어준 건 분명 우리와 싸워서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서 그런 거야.”

곽원명은 냉소를 지었다.

원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곽 형의 말도 일리가 있어. 그러나 짐작일 뿐이잖아. 혹여 부상을 입지 않았거나 이미 회복되었으면 어떡해?”

“시험해 보면 되지. 다들 그럴 배짱이 있나, 없나 문제 아닌가?”

곽원명은 허허 웃었다.

다른 무인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 서로 마주 보며 주저하는 표정이었다. 곽원명의 말은 일리가 있으나 ‘만에 하나’가 두려운 것이었다.

곽원명은 몇 사람이 동요하는 것을 보고 계속 몰아붙였다.

“요염하기로 널리 이름을 알린 요미여왕이야. 너희들은 탐나지 않아?”

그는 계속해 말을 이어 갔다.

“게다가 요녀 일족은 무위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으니, 우리에게 전수해 줄 수도 있잖아. 신유 경지 9단계 실력이야. 우리가 똑같이 나눠 가진다 해도 적어도 한두 경지는 올릴 수 있어.”

그 말에 사람들은 드디어 마음이 동했다.

원석은 음험한 눈빛을 반짝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곽 형 말이 맞아. 요미여왕의 무위를 가질 수 있다면 확실히 해볼 만해.”

다른 몇몇도 자세히 궁리해 보더니, 모두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곽원명은 크게 웃었다.

“모두 의리가 있군. 늦으면 안 되니까 빨리 쫓아가자.”

*양준과 선경라는 방향을 잡지 못한 채 미로 숲속에서 나는 듯이 달렸다.

반나절이 지난 뒤, 그들 등 뒤에서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선경라는 얼굴빛을 굳히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역시 간파당했군.”

그녀는 말을 하면서 걸음을 멈춘 뒤, 심호흡을 해 기혈을 안정시키고 양준과 함께 여유 있게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들이 맞아.”

양준은 신식을 펼쳐 쫓아온 인원수를 감지하고는 역시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선경라의 걱정은 일리가 있었다. 좀 전에 그녀는 기세당당한 모습으로 곽원명 무리들을 쫓아내며, 언행에서 아무 허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용의주도한 자라면 그 안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냈을 것이다. 이는 마치 망망대해에 피비린내가 조금만 있어도 흉악한 상어가 그 냄새를 맡고 쫓아오는 것과 같았다.

“대인!”

잠시 뒤, 곽원명 무리가 멀지 않은 곳에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러나 좀 전처럼 조심스러운 태도는 아니었다. 각자 눈빛을 교환하며 눈에는 의미심장한 빛이 반짝였다.

“무슨 일이냐?”

선경라가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허허… 대인의 속도가 어찌나 빠르신지, 겨우 따라잡았습니다.”

곽원명의 태도는 전에 비해 눈에 띄게 건방졌다. 분명 탐색 중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추측에 대해 팔 할 이상 확신이 있었다. 그녀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지만, 반나절을 뒤쫓아서야 겨우 따라잡았다. 어딘가 찝찝한 데가 없으면 이렇게 빨리 도망칠 필요가 있겠는가?

“허튼소리는 그만하고. 도대체 무슨 일이야?”

선경라는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차갑게 일갈했다.

“깜빡한 것이 있어서요. 수왕께서 대인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은 마음에 두지 마시라면서요.”

곽원명은 말하는 한편, 손에 잡히는 대로 선경라에게 물건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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