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2장. 제 코가 석 자
양준은 저번의 달콤한 입맞춤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감정이 깊을수록 독성이 더 강해져! 저번에는 경고 차원에서 입 맞춘 거야.”
양준은 멋쩍게 웃었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네가 아무 이유 없이 먼저 날 잡았잖아. 음… 그런데 모든 체액이라면…….”
선경라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침을 내뱉었다.
“뻔뻔한 자식!”
반면 양준은 대경실색했다.
“그러면 죽을 수밖에 없잖아?”
“그래.”
선경라는 심호흡을 했다. 왠지 양준에게 모든 걸 알려준 것이 후회되었다.
양준이 눈동자를 굴리더니 말했다.
“아니면… 내가 널 흥분시킬 테니까, 저 자식들에게 침을 뱉어 독살시키는 건 어때?”
“너 좀 진지해질 순 없어?”
선경라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때가 어느 땐데 이 자식은 도대체 무슨 궁리를 하는 거야?’
“나도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양준이 정색하며 말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바람처럼 내달렸다. 곧이어 눈앞이 탁 트이고 숲을 벗어날 수 있었다.
둘은 멈칫하고 놀란 표정으로 앞쪽을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는 뜻밖에도 두 무리의 사람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한 무리가 다른 한 무리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고, 포위당한 이들은 하나같이 창백하고 분노에 찬 얼굴이었다.
양준은 그들을 훑어보고는 저도 모르게 어, 하고 가볍게 소리를 냈다.
포위된 무리는 추억몽을 중심으로 한 무인들이었다. 낙소만과 백씨 가문의 백운풍도 그 속에 있었다. 그들 외에도 서너 명의 진원 경지 무인들이 더 있었다. 그리고 땅 위에는 선혈이 낭자한 몇 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바깥 무리들은 음침하게 추억몽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다수는 음란한 눈빛으로 추억몽과 낙소만의 아름다운 몸매를 훑고 있었다.
추억몽은 연신 쓴웃음을 지었고, 낙소만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두 여인은 서로 등을 기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들의 진원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인 듯했다.
추억몽 일행은 여러 날 동안 도망치다가, 끝내는 창운사지 무인들에게 따라잡혔다. 그들은 치열한 싸움을 거쳐 많은 사상자를 내고서 포위되고 말았다. 이제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는데, 마침 양준과 선경라가 나타난 것이다.
양준과 선경라는 한창 이야기를 하면서 달리다 보니 미처 앞쪽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두 사람이 나타나는 순간,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추억몽 일행을 포위한 무리들은 창운사지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수적으로나, 실력으로나 모두 추억몽 일행을 훨씬 웃돌았다. 지금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 이른 두 여인의 몸부림과 저항을 구경하려는 심산으로, 여유 있게 두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때문에 절대적인 우세를 점했으면서도 서둘러 추억몽 일행을 공격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하… 운수 대통이군!”
양준과 선경라가 모습을 드러내자, 바깥 무리 중 진원 경지 8단계 무인이 눈을 번쩍이며 방자하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선경라는 천하제일 요염한 여인으로서 그녀만의 독특한 운치가 있었다. 이런 운치는 추억몽과 낙소만 같은 소녀들보다 더욱 매력적이었다. 남자는 뜨거운 눈빛으로 선경라를 바라보면서 저도 모르게 거칠게 호흡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형님, 저기요. 또 한 명의 미녀가 나타났어요.”
“오늘 여자 복 제대로 터지는구먼!”
“하하하!”
무리들의 음담패설에 추억몽과 낙소만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선경라도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무리 중, 유일한 신유 경지 고수가 넋을 놓고 선경라를 보다가 얼굴빛이 바뀌면서 사납게 일갈했다.
“모두 입 다물어.”
고함소리와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왜 그러세요?”
사람들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왜 귀신을 본 것처럼 두려움에 휩싸인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신유 경지 무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정중한 표정으로 선경라에게 공수 인사했다.
“수왕 부하 고천라(古天羅), 여왕 대인께 인사드립니다.”
다른 자들은 선경라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신유 경지 무인은 선경라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선경라는 요염하기 그지없었고, 눈가 아래쪽에 점이 있었으며 붉은색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잔인하고 악랄하여 사람을 마구 죽인다는 요미여왕이 아닌가? 평소에 어느 남자가 감히 음탕한 눈빛으로 여왕을 볼 수 있겠는가. 그랬다간 여왕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었을 거야. 그런데 저 눈이 삔 미친 자식들이 감히 여왕을 우롱하다니? 큰일 났네. 저 인간 성미로는 우리를 죽이고도 남을 거야.’
고천라는 공경하게 예를 올리면서 가슴이 서늘해졌다. 방금 전의 의기양양함과 승기를 잡은 듯한 자신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오직 짙은 두려움만 남아 있었다.
‘멍청한 것들, 죽음을 자초해도 분수가 있지. 나까지 엮이면 안 된다고!’
고천라는 마음속의 갑갑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또한 선경라의 얼굴빛을 보니 이번에는 죽음을 피하기 어려울 듯했다.
고천라가 이렇게 정중하게 예를 올리자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 그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여왕 대인? 여왕 대인? 요미여왕?’
순식간에 그들은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얼굴에는 놀라움과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은 좀 전에 희롱한 여인이 요미여왕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사태가 급변하자, 추억몽은 그 속에서 생존의 기회를 엿보고 급히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양준!”
양준은 그쪽을 향해 씩 웃고는 몰래 선경라의 손바닥을 꼬집으며 얼른 가자고 눈짓했다. 그들도 신유 경지 무인들에게 쫓기고 있는 처지라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선경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저 코웃음만 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들과 서서히 거리를 벌렸다.
추억몽은 급히 억지 미소를 짜내며 말했다.
“양준, 우리를 이렇게 죽게 놔둘 거야? 그래도 우리는 함께 왔잖아.”
추억몽은 선경라의 실력을 이미 경험해 보았다. 한순간에 신유 경지 무인 세 명을 죽일 수 있는 경지였다. 그녀와 원한 관계가 있다고는 하나, 같은 여인으로서 선경라의 손에 잡히는 것이 눈앞에 쓰레기들한테 잡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날 선경라는 양준을 잡아갔지만, 지금은 둘이 함께 이곳에 나타난 데다 사이도 가까워 보였다. 추억몽은 둘 사이에 뭔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양준에게 희망을 걸었다. 선경라가 나서 준다면 그들은 이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양준, 우리를 구해 줘.”
낙소만도 같이 외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기대와 애원의 빛을 가득 담고 있었다.
“허허… 우리가 아는 사이야?”
양준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도 지금 제 코가 석 자라 남의 생사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하물며 추억몽이 사람들을 데리고 능소각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소안과 함께 즐겁게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 맞닥뜨릴 일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두 여인이야말로 모든 일의 화근이었다. 양준이 그녀들을 괴롭히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히 여겨야 할 터였다.
“양준, 난 낙소만이야. 전에 만났었잖아.”
낙소만은 양준이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고 설명하는 한편, 다급하게 애원했다.
“부탁해. 우리를 구해 줘.”
“너희들을 구하면 무슨 이득이 있는데?”
양준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짧은 시간에 그와 선경라는 이미 적지 않은 거리를 벌렸다.
“뭘 원하는데? 우리가 뭐든 해줄 수 있어.”
“나? 너희 둘을 원해. 되겠어?”
낙소만은 대뜸 말문이 막혔다. 추억몽도 양준의 말을 듣고 순간, 얼굴에 혐오감이 드러났다.
“가자. 가기 전에 그래도 저 두 여자는 건드리지 말라고 네가 한마디만 해 줘.”
양준은 나지막하게 선경라에게 말했다.
“쟤네 둘 좋아해?”
선경라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쟤들이 괴롭힘 당할 걸 생각하니까, 괜히 찜찜해서 그래. 그리고 사실 나 여인을 엄청 아끼는 편이야.”
양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선경라는 깔깔 가볍게 웃었다. 그녀가 미처 말을 하기도 전에 뒤쪽에서 곽원명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칠 생각하지 마.”
두 사람은 안색이 약간 변했지만 다른 것을 살필 겨를도 없이 그 자리에서 재빨리 날아갔다.
고천라는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곽 형?”
곽원명은 깜짝 놀라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고 사제, 어서 선경라를 쫓아!”
“어억…….”
고천라는 대경실색했다.
‘아니, 오늘은 재수 옴 붙은 날인가. 아랫것들이 눈이 삔 것도 모자라 곽원명까지도 미친 건가? 미칠 거면 곱게 미칠 것이지, 왜 나까지 끌어들이는 건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이런 기회 없어. 지금 여왕이 중상을 입어서 힘을 못 써!”
곽원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고천라는 순간 몸을 꼿꼿이 폈다.
‘왠지 애들이 희롱해도 거들떠보지 않고 급하게 걸어간다 했더니, 중상을 입은 거였군!’
다음 순간, 고천라의 얼굴에서 겸손함과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과감하게 두 손으로 결인을 맺었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금빛이 날아갔다.
양준과 선경라는 십몇 장밖에 날아가지 못했다. 금빛은 그들 앞으로 날아오더니 별안간 반짝이는 빛의 장막으로 변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빛의 장막에 맞부딪쳤다. 놀라운 탄성이 전해지며 두 사람은 나란히 뒤로 날아갔다.
두 사람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곽원명 무리가 바싹 다가와 사방으로 흩어져서 둘을 포위했다.
“제기랄!”
양준은 격분해 욕을 퍼부었다.
‘오늘 재수 없는 날이군. 도망칠 수도 없잖아.’
“하하하!”
곽원명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음침하고 사악하게 선경라를 바라보았다.
“대인, 어차피 도망치지 못할 테니 괜히 힘 빼지 마십시오.”
선경라는 콧방귀를 뀌더니 아름다운 눈동자로 고천라를 바라보며 꾸짖었다.
“고천라, 너도 결국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고천라는 목을 움츠리고는 비웃음을 흘렸다.
“대인, 어찌 그런 말씀을. 누군들 죽고 싶겠습니까. 오늘 우리 애들이 눈이 삐어서 대인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대인과 잘 말해 보고 싶을 뿐입니다. 잘 봐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