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283화 (283/853)

제 283장. 스스로 함정에 빠졌네

“죽고 싶지 않으면 날 대신해 저것들을 죽여. 그럼 오늘 일은 넘어갈 것이다.”

선경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곽원명이 냉소했다.

“허세는 그만 부리시죠? 당신의 전성기도 이제 끝났네요. 세 치 혀를 아무리 놀려도 오늘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일단 칼을 들었으니 아주 끝장을 보고 말 테니까.”

“목숨이 아까우면 곱게 항복하시죠. 싸워봤자 누구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원석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음험하게 선경라를 노려보았다.

선경라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가볍게 웃었다.

“만약 내가 필사적으로 싸우면 적어도 네놈들 중 세 놈은 황천길에 같이 갈 수 있어. 자, 누가 나하고 같이 갈 거야?”

몇몇 신유 경지 무인들이 주춤했다.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선경라가 필사적으로 나올까 봐 두려워, 그들은 에워싸고 있으면서도 섣부르게 공격할 수 없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했다. 어찌 됐든 선경라는 요미여왕으로 일반적인 고수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너희도 힘든 상황이구나.”

추억몽은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양준과 선경라를 바라보다가 문득 눈빛에 쾌감이 스쳐 지나갔다.

‘며칠 전만 해도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던 붉은 옷의 여인이 오늘은 왜 저리 힘을 못 쓸까?’

하지만 곧이어 눈앞의 위기를 떠올리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낙소만은 마치 하늘의 먹구름이 모든 빛을 가린 듯이 눈에 빛을 잃었다. 그나마 양준과 선경라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지금은 두 사람마저도 포위되었다. 이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 방금 전, 그녀의 애원이 웃음거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저들이 달려들면 넌 바로 이곳을 떠나!”

쌍방이 대치하는 가운데, 선경라가 양준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양준은 마치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미간을 찌푸리고서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야……!”

선경라가 남모르게 살짝 양준을 건드렸다.

양준은 정신을 차리고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아직 살길이 있어.”

“뭐라고?”

선경라가 의아해했다.

“아래쪽에 뭔가 있어!”

양준이 살며시 발을 굴렀다.

방금 전, 그는 근처에 도망칠 만한 곳이 없는지 살펴보려고 몰래 신식을 펼쳤다. 뜻밖에도 그들이 지금 서 있는 곳 아래에 많은 생명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생명의 기운은 수가 아주 많았으며, 그중 적지 않은 것들이 기혈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자 과연 이곳은 다른 곳과 좀 달랐다. 사방은 모두 밀림인데 유독 이곳 백 장 범위 안에만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았다. 아래쪽에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비록 아래쪽에 있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모험할 수밖에 없었다.

“덮쳐!”

곽원명은 양준과 선경라가 쑥덕거리며 눈빛을 교환하자 도망치려는 것임을 알고 더는 지체하지 않고 소리쳤다. 그는 진원을 무섭게 돌리며 일격을 날렸다.

그가 공격하자 다른 사람들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시간 좀 끌어 줘.”

양준이 포효하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성흔을 재빨리 가동했다.

“뭐 하는 거야!”

선경라는 놀라 비명을 지르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서둘러 손목의 은빛 팔찌를 흔들어 뺐다. 팔찌는 은빛으로 변해 날아갔다. 동시에 그녀의 흰 손에는 분홍색 부채가 하나 더 생겼다.

선경라가 부채에 진원을 주입해 흔들자 그림 위의 남녀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자욱한 빛이 뿜어져 나가더니 모든 이들을 감쌌다. 선경라는 가운데 서서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를 띠고 굴곡진 몸매를 드러냈다. 유혹술이 전개되며 장내를 뒤덮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추억몽 일행이든, 창운사지 무인들이든 모두 넋을 잃었다. 실력이 낮은 무인들은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곽원명은 대경실색해 진원을 돌리며 은빛 팔찌의 공격을 막아 내는 한편, 소리쳐 일깨웠다.

“경라선(輕羅扇)이다. 조심해.”.

신유 경지 고수들도 모두 낯빛이 변했다. 하나같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뒤로 물러서며 머릿속으로 침입하는 끝없는 유혹을 막아 냈다. 그들은 이 비보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비보는 선경라 일족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온 비보로 그녀의 이름도 비보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경라선은 선경라가 시전하는 환각술의 위력을 대폭 증가시켜주는 효능이 있었다.

사람들이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 선경라는 연신 요염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언제까지 버티는지 두고 보자!”

곽원명이 노하여 욕을 퍼부었다. 얼굴은 원숭이 엉덩이처럼 시뻘게진 상태였다.

선경라는 얼굴빛이 차가워지더니 수인(手印)을 날렸다. 그러자 은빛 팔찌의 공격이 더 빨라졌다.

이때, 하늘에 별빛이 나타났다. 마치 퍼런 대낮에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양준의 손등에서 빛이 조금씩 반짝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줄기줄기 아스라한 성흔이 펼쳐졌다.

곧이어 세찬 진원의 파동이 전해졌다. 이런 파동은 신유 경지 고수라도 감히 얕볼 수가 없었다.

곽원명 무리는 깜짝 놀라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은 마침 별빛이 총총한 오른손을 들어 별빛 하늘을 만들고 있었다.

선경라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이채가 반짝였다. 그녀는 양준을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에게 이런 강한 공법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사람들이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인 순간, 양준의 오른손은 천천히 지면에 내리꽂혔다.

쾅!

대지가 흔들렸다. 곽원명 무리는 양준이 자신들이 아닌, 땅에 주먹을 내리꽂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지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았다. 양준이 주먹으로 내리친 곳을 중심으로 바닥이 갈라지더니 균열이 사방팔방으로 신속하게 커져 갔다.

곽원명은 미간을 찌푸렸다. 은연중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초식의 위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이 같은 효과를 낼 수 없었다.

그는 급히 신식을 펼쳐 살펴보았다. 이내, 그는 얼굴빛이 크게 변하며 말했다.

“큰일 났다. 아래가 비었잖아. 그리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와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 백 장의 지면이 무너져 내렸다. 모든 이들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양준은 크게 웃었다.

“가자!”

그는 이미 신식으로 아래쪽에 있던 기혈이 왕성한 놈들이 충격에 놀라 깨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을 더 지체했다가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양준은 팔을 뻗어 선경라의 허리를 잡아챘다. 선경라는 샐쭉한 표정으로 흘겨보고는 아무 반항도 하지 않고 함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곽원명 무리도 그들이 도망치게 가만 놔두지 않고 일제히 날아올랐다.

슉- 슉- 슉-

그러나 그들이 미처 공격을 날리기도 전에 아래쪽에서 연신 무언가 뻗어나왔다.

“아악……!”

이윽고,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원석의 목소리였다. 곽원명은 깜짝 놀라 서둘러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아래쪽에는 거대한 거미가 한가득 있었고, 그 외에 색상이 각각 다른 거미알들이 보였다. 원석은 거미줄에 감싸여 송아지만 한 크기의 거미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거미줄은 보기에도 단단하고 질겨 보였다. 신유 경지 2단계인 원석마저도 거미줄에 묵인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슉- 슉- 슉-

거미들이 입으로 흰색 물체를 뭉텅이로 뿜어 냈다. 그것들은 공중에서 하나하나 커다란 그물이 되어 천지를 뒤덮었고,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몇 분 사이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거미줄에 묶인 채 땅바닥에 떨어졌다. 빠르게 도망친 일부의 사람들만이 여전히 날고 있었지만, 그들도 얼마 가지 못했다.

양준과 선경라도 커다란 그물에 묶여 흔들거리며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이건 또 뭐야!”

양준은 얼굴빛이 크게 달라졌다. 그는 진원을 가동한 다음, 손에 수라검을 들고 미친 듯이 거미줄을 베었다. 수라검은 천급 비보로 매우 예리했다. 거미줄은 일반 신유 경지 무인들도 쉽게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질겼지만, 수라검은 비단을 베듯이 거미줄을 베어냈다.

“저 녀석이야. 원래 이곳에 있었구나.”

선경라가 고개를 숙이고 아래쪽을 내려다보더니 저도 모르게 환호했다.

“뭐라고?”

양준이 의아해서 되물었다.

“내가 찾던 게, 바로 아래쪽에 있어!”

선경라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을 냈다. 눈빛 속에는 기쁨이 넘쳤다.

“거미를 찾고 있었던 거야?”

양준은 깜짝 놀랐다. 문득 선경라가 본인의 체질이 ‘독과부’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독과부가 바로 거미 아닌가?’

“어떡해, 이 거미줄들은 독이 있어.”

선경라는 문득 생각이 나서, 안색이 창백해지며 일깨워 주었다.

만약 그녀가 신유 경지 9단계로 이곳에 왔다면 거미줄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실력이 크게 떨어져 독소의 침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진작 말하지!”

양준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그 역시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이내, 온몸의 힘이 빠지며 의식이 멀어져 갔다.

‘일이 커졌군. 곤경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스스로 함정에 빠졌네.’

양준은 성흔을 펼치기 전에 이미 아래쪽에 있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거미가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송아지보다 더 큰 팔각(八脚) 거미는 6급 요수가 틀림없었다. 아래쪽에는 이런 요수가 2~30마리 정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와 선경라는 곽원명 무리의 추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들도 함께 함정에 빠졌으니 형세가 최악은 아닌 셈이었다.

양준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의식을 점차 잃어 갔다. 완전히 기절하기 전에 양준은 양 손바닥을 합쳐 은은한 빛을 날렸다. 빛은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독거미를 적중했다.

양준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선경라와 껴안은 채 땅바닥에 떨어졌다.

독거미는 한순간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거미줄 한 덩이를 토해내고는 두 사람을 감싸서 뒤쪽으로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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