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284화 (284/853)

제 284장. 거미집

얼마나 지났을까, 양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몸에는 여전히 기운이 하나도 없어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바깥쪽은 거미줄에 겹겹이 싸여 있었다. 밖에서 비춰 들어오는 빛과 희미한 그림자를 통해 양준은 수많은 거미 알 같은 것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 눈에 익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로 한 달 전 선경라가 경지를 돌파할 때 만들어 낸 번데기와 똑같은 모양이었다.

적지 않은 거미 알 속에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보였다. 양준은 신식을 살짝 펼쳐 보았다. 많은 이들이 이미 깨어나 거미줄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거미 독에 중독되었는데 그들이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양준은 가슴 쪽에서 일정하게 열기가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코끝에는 은은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니 부드럽고 까만 머리카락이 보였다. 선경라가 그의 품에 안겨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선경라가 천천히 깨어났다. 그녀가 물기 어린 촉촉한 눈을 뜨자 양준이 다급히 일깨워 주었다.

“나한테 발정하지는 마!”

선경라는 특별한 체질이라 그녀가 발정하게 되면 그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양준은 깨어나자마자 기절하고 싶지 않았다.

선경라는 실눈을 뜨고 한참 기억을 되짚어 본 뒤, 그제야 모든 것이 떠오른 것 같았다. 더불어 방금 전 양준이 했던 행동이 떠오르자 그녀는 이를 악물고 양준을 흘겨보며 말했다.

“나쁜 자식,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양준은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일깨워 줬을 뿐이야.”

그녀가 화를 내기 전에 양준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우리 이제 어떡하지?”

선경라는 미간을 찌푸리고 살짝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녀와 양준은 거미줄에 촘촘히 묶여 몸을 움직이기 힘든 상태였다.

“이 거미줄은 질겨서 벗어나기 힘들어.”

양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비보로는 자를 수 있을 것 같아.”

“함부로 움직이지 마!”

선경라가 무거운 표정으로 다급히 말했다.

“지금 온몸에 기운이 없어서 거미줄을 자른다고 해도 도망치지 못해. 바깥에 6급 요수도 많은데 그들을 건드리면 더 빨리 죽을 거야.”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쉽게 거미줄을 자르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그가 기절하기 전에 6급 독거미 한 마리를 조종하기는 했지만 지금 보니 별로 쓸데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 독거미더러 바깥에서 자신과 선경라의 안전을 지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찾고 있던 게 이곳에 있다고 했지? 여기는 도대체 뭐 하는 곳이야?”

“여긴 거미집이야!”

선경라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혈통이 바로 이곳에서 지금의 체질을 가지게 된 거야. 몇백 년 전, 선조 중 한 분이 우연히 이곳에 왔다가 독거미에게 물린 뒤로 체질이 변했대. 그렇게 대대로 전해진 거지.”

세상에서 어떤 이들의 체질은 일반인들과 달리 아주 특이했다.

양준은 지금까지 특이한 체질의 사람을 약령성체인 하응상밖에 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또 독과부 체질인 선경라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비교해 보면 선경라의 체질이 훨씬 사악했다. 특이 체질은 대다수가 천성적인 것이지만, 극히 일부만 유전될 수 있었다.

독과부는 유전된 특이 체질이었다.

“다들 실력이 일정한 정도에 도달하면, 이곳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지. 그것만 있으면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거든.”

선경라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나도 이곳에 와 본 적이 없어. 어머니께 얘기만 들었지. 이렇게 우연히 들어오게 되다니. 하늘의 뜻인가 봐!”

그녀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경라도 지금 그녀의 처지가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양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옆에서 갑자기 추억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도 근처에 있다가 방금 깨어난 듯했다.

양준은 그 목소리를 따라 옆을 보니 삼 척 정도 되는 곳에서 발버둥 치는 하얀 거미 알이 눈에 들어왔다.

“언니…….”

낙소만의 울음소리도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공교롭게도 두 소녀는 모두 양준의 옆에 있었던 것이다.

“소만아, 괜찮아. 요수들의 주의력을 끌지 않게 함부로 움직이지 마.”

추억몽은 그나마 침착한 편이었다. 그녀는 낙소만을 위로했다.

“응.”

낙소만은 순순히 대답하고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

“양준, 옆에 있는 것 다 알아. 네가 말하는 목소리 다 들었어!”

추억몽은 낮은 소리로 불렀다. 위험한 곳에 있는지라 그녀는 큰소리를 낼 수 없었다.

“왜 불러?”

양준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이 여인에게 호감이 없었다. 그녀는 패기 넘치게 능소각에 쳐들어와 제대로 대화를 해보지도 않고, 무작정 사람들과 함께 공격을 펼쳤다. 그 바람에 다들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던가.

“아직도 화난 거야?”

추억몽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의 당황스러움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같은 처지인데 사내가 되어서 꼭 나같은 연약한 여인에게 그런 것을 따져야겠어?”

“연약한 여인?”

양준은 씨익 웃고는 비꼬았다.

“스물한 살이 지나지 않아 진원 경지 9단계에 이르렀다고 소문이 자자한 추씨 가문 큰 아가씨이자 추씨 가문의 희망이며, 중도 8대 가문 공자들도 달려드는 네가 연약한 여인은 아니지 않아?”

추억몽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나에 대해 관심이 많네. 왜? 내가 좋아?”

“미인계를 사용하려는 거면 사양할게.”

양준은 입을 삐죽거렸다.

“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요염한 여인을 안고 있어. 건드리면 톡, 하고 물기를 터뜨릴 것 같거든. 그런데 너 같은 게 눈에 들어오겠어?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해. 뜸 들이지 말고.”

선경라는 가볍게 양준을 꼬집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으쓱함이 스쳐 지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요염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마음이 있거나 그녀의 미색에 혹한 것이어서 별 감흥이 없었는데 양준이 하는 칭찬은 듣기 좋았다. 그런데 건드리면 물기를 터뜨릴 것 같다는 말은 좀 거슬렸다.

“말을 해도 참 거북하게 하네!”

추억몽은 미간을 찌푸렸다.

“듣기 싫으면 듣지 마. 나도 너하고 쓸데없이 말 섞기 싫으니.”

추억몽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네 말도 맞는 것 같아. 선 언니 앞에서 내 자태는 아름답다고 하기 힘들지.”

선경라는 눈빛을 반짝이며 양준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계집애 재미있네!”

양준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다른 목적이 있을 거야.”

추억몽이 말을 이었다.

“추씨 가문 추억몽이 선경라 언니를 뵙습니다. 전에 감히 언니인 줄 모르고 실례를 범했습니다. 언짢으신 게 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추억몽은 선경라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6대 사왕 중 하나인 선경라는 6대 사왕 중에서 실력이 가장 약하지만 또 가장 어리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녀는 분명 다른 다섯 명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한 달 전, 그녀의 신분을 모를 때는 방자하게 굴었지만 알게 된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깔깔…….”

선경라는 아름다운 눈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동생이 말도 참 예쁘게 하네. 다만 말끝마다 언니라고 하니 괜히 늙어 보이잖아.”

추억몽은 어색하게 두어 번 웃더니 말했다.

“언니가 어떻게 늙어 보일 수 있겠어요? 저보다도 어려 보이시는데요. 만약 우리가 함께 길을 나선다면 사람들은 분명 제가 언니인 줄 알 거예요.”

선경라는 더욱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요물!’

양준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추 동생은 말도 참 잘해.”

선경라는 더 이상 그녀를 난감하게 만들지 않았다.

추억몽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미여왕 같은 인물과 대화하다 보면 아무리 추씨 가문의 아가씨라고 해도 말실수를 할까 봐 시시각각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추 동생은 원하는 게 뭐야?”

“제가 어찌 감히 원하는 게 있겠어요!”

추억몽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저 언니에게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있는지 묻고 싶어요.”

이곳에서 선경라의 실력이 가장 강했다. 비록 그녀도 갇혀 있는 상태였지만 도망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곽원명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선경라였다.

“만약 언니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절 데리고 나가 주세요!”

추억몽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당연히 거저 도와달라는 게 아니에요. 추씨 가문에 미용에 좋다는 정안주(定顏珠)가 있는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천급 상품의 비보입니다. 오랫동안 몸에 지니고 다니면 늙지 않아요. 언니가 괜찮으시다면 동생이 저택까지 보내 드리겠습니다.”

선경라는 아름다운 눈을 깜박거리더니 마음이 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추억몽은 추씨 가문의 큰 아가씨답게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알았다. 선경라에게 그 어떤 천재지보나 영단묘약을 주겠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테지만,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비보를 거절할 수 있는 미인은 없었다. 누가 자신의 젊음이 영원히 유지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을까? 특히 선경라처럼 요염하고 아름다운 여인은 늙고 볼품없어질 미래를 더욱 두려워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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