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6장. 닷새의 기한
순식간에 사람들은 또다시 거미줄에 묶여 버렸다.
팔각 거미들은 거대한 몸뚱이를 흔들며 무서운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와 거미줄을 토했다. 그리고 그들을 거미줄로 겹겹이 감싼 다음에야 조금씩 뒤로 끌고 갔다.
잔뜩 겁에 질렸던 사람들도 상황이 일단락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방금 전에 거미 한 마리가 왜 갑자기 사람들을 죽였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한창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거미 한 마리가 그들 쪽으로 다가오더니 날카로운 앞다리로 힘껏 내리찍었다.
푹!
피가 튐과 동시에 비명소리가 들렸다. 곽원명의 몸은 순식간에 관통되었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거미는 더 이상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다른 거미가 그를 끌고 가게 내버려 두었다. 곧이어 땅에는 핏자국이 늘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창운사지의 무인들은 죄다 이 거미에 의해 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운이 나쁜 몇 명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죽지 않은 사람들도 중상을 입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바닥에는 핏자국이 하나, 둘 늘어났다.
추억몽의 아름다운 눈에는 두려움이 서렸다. 방금 전, 곽원명의 비명소리를 들었을 때, 그녀도 하마터면 거미줄을 찢고 뛰어나갈 뻔했다. 만약 정말 뛰어나갔더라면 그녀도 같은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거미줄을 찢기 전에 추억몽은 양준과 선경라의 동정을 살폈고, 그들이 움직이지 않자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녀는 모든 희망을 선경라에게 걸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선택은 정확했다.
남은 창운사지의 무인들이 또 끌려갔다. 모든 요수들은 앞다리에 피가 가득 묻은 거미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들은 이 거미가 왜 갑자기 사람들에게 살수를 뻗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참 훑어본 뒤에야 요수들은 서서히 흩어졌다.
“왜…….”
곽원명은 배를 움켜쥐었다. 공법을 아무리 운행해도 흐르는 피를 멈출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약해졌다.
“왜 이렇게 된 거지?”
그 거미는 마치 일부러 창운사지의 무인들만 골라서 죽이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한 명도 건드리지 않자, 곽원명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바로 업보라는 것이다. 하하하!”
양준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한쪽에서 들려왔다.
“네가 한 거야?”
선경라는 놀란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양준이 그들을 혼내 주겠다고 말하자마자 그들이 처참한 공격을 당했다. 양준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해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뭘 하는 걸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6급 요수를 조종한 거지?’
“통쾌하지?”
양준이 웃으며 물었다.
선경라의 아름다운 눈에는 색다른 빛이 감돌았다. 그녀는 양준을 감동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발꿈치를 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선경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양준에게 말했다.
“오래 하면 안 돼. 만약에 정말…….”
양준은 표정이 굳더니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난 네가 욕구불만일 줄 알았어. 나처럼 젊고 기운 넘치는 사내가 어쩌다 네 손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뻔뻔스럽게 굴기는!”
선경라의 말투에는 뾰로통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른 남자들은 날 쳐다보지도 못하는데 넌 이미 커다란 이득을 본 셈이야.”
“먼저 얘기해 두는데 난 널 책임지지는 않을 거야.”
양준은 정색하며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들 뭐 하는 거야?”
추억몽이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랑을 속삭이고 있지!”
“뻔뻔스럽긴!”
추억몽은 다급히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어쩐지 옆에서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했어.’
시간이 흐르고 해가 떠올랐다.
거미들에게 잡힌 지도 이미 며칠이 지나가고 있었다. 거미줄 안에 갇힌 사람들은 여전히 곤경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양준은 선경라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이 요녀는 소문난 대로 동작 하나, 숨결 하나, 눈빛 하나만으로 양준의 정욕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하필 그녀의 체질 때문에 양준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었고, 그녀를 건드리지도 못하니 힘든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추억몽은 아주 태연자약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걱정스럽거나 두려운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낙소만은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항상 겁에 질려 있었다.
백운풍도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그는 현재 처한 상황을 깨달은 뒤, 줄곧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창운사지의 무인들은 모조리 죽었다. 죄다 과다출혈로 죽었는데 그 모습들이 매우 처참했다.
어느 날, 양준이 신식으로 관찰하던 중, 갑자기 기운이 아주 강한 존재를 감지했다. 이 존재는 6급 요수인 독거미들이 내뿜는 기운보다 한 단계 더 강렬했다.
선경라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기도 전에 땅이 쩍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두운 와중에 사람들은 갑자기 머리꼭대기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음을 느꼈다.
양준은 안색이 크게 변하더니 진원을 운행했다.
선경라가 갑자기 입을 열고 말했다.
“움직이지 마!”
“왜?”
그녀의 표정을 보니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분이야.”
선경라의 아름다운 눈이 파르르 떨리면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
“여왕 거미!”
선경라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7급 요수야! 우리 중에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7급?”
양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응.”
선경라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이 요수들이 왜 이렇게 편히 살고 있다고 생각해? 6급 요수의 요단도 꽤나 값지거든. 만약 여왕 거미가 자리를 지키지 않았더라면 이 6급 요수들은 진작 몰살당했을 거야.”
7급 요수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누군가 이곳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도망친 것이다.
“하지만 여왕 거미는 대부분의 시간을 저 알 속에서 자고 있어. 누군가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아.”
선경라는 낮은 소리로 설명했다.
“이곳에 거미 석상이 있어. 저기 좀 봐!”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양준은 어렴풋하게 멀지 않은 곳에 석상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석상은 매우 거대했고 팔각 거미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여왕 거미는 평소에 저 안에서 쉬고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여왕 거미가 내뿜는 독액이야! 세상에서 저 석상 안을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독과부 혈통의 여인밖에 없을걸.”
“그럼 여왕 거미도 네 혈맥을 감지할 수 있다는 거네?”
“음, 그럴 거야.”
선경라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도 이곳에 처음 온 터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럼 잘 얘기해서 우리를 풀어 달라고 해봐.”
“얘기해 볼게!”
선경라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도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어머니가 남긴 방법대로 여왕 거미와 소통을 시작했다.
잠시 뒤, 감미로운 목소리가 사람들의 고막을 울렸다. 심지어 양준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응? 네가 독과부 혈통의 여인이냐?”
양준은 안색이 변하더니 주변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나긋나긋한 것이 마치 아름다운 부인이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아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선경라는 다급히 설명했다.
“당황하지 마. 여왕 거미가 신식으로 나와 소통하고 있는 거야!”
양준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신식으로 인간과 소통하는 요수라니!’
이런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요수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이 여왕 거미는 7급 요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
선경라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네! 소녀 여왕님을 뵙습니다!”
“한비연(寒妃煙)이랑 무슨 사이냐?”
여왕 거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제 어머니이십니다!”
선경라는 실수할 세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삼십 년이 지났군… 후세도 이렇게 자랐으니 말이야. 하지만 넌 경지가 왜 이리 낮은 거냐?”
선경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고가 있었는데 곧 회복될 겁니다.”
“그래.”
여왕 거미는 나지막이 대답하고서는 한참 뒤에야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가져갈 건 가지고 떠나거라. 너희 혈통과 인연이 있으니 말이다!”
여왕 거미가 순순히 나오자 선경라는 기쁜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
“여왕님, 용서해 주세요. 소녀는 일행과 함께 왔어요. 그도 저와 함께 떠나면 안 될까요?”
양준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선경라가 이토록 의리를 지킬 줄 몰랐다.
“흥!”
여왕 거미는 코웃음을 쳤다.
“이놈들이 내 집을 망가뜨렸는데 그냥 보내주라고? 너 말고 다른 이는 모두 죽을 것이다!”
“여왕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더 말하지 말거라!”
선경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양준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곧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여왕님, 딱 이 사람만 데리고 나갈게요!”
“무엄하다!”
여왕 거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밖에 있던 팔각 거미 몇 마리들도 습습, 소리를 내며 거미줄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너한테 닷새의 시간을 주지. 잘 생각해 보거라. 닷새 뒤에 깨어났을 때, 네가 떠나지 않았다면… 너도 나갈 생각을 하지 말거라!”
여왕 거미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짓누르고 있던 안개도 사라졌다. 여왕 거미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추억몽과 낙소만의 눈동자가 떨렸다. 방금 전, 선경라와 여왕 거미의 대화를 듣고 그들도 양준처럼 깜짝 놀랐다. 그들은 세상에 이토록 강한 요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백운풍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닷새 뒤에 다 죽는 거야?”
여왕 거미가 나타나기 전에 사람들은 불안해했으나 거미들이 그들을 해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소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닷새라는 시간이 정해지자 그들은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