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7장. 나한테 방법이 있을 수도 있어
마음이 불안한 와중에도 백운풍은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양준, 내가 귀신이 되어서도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정신 나갔냐!”
양준은 어이없어하며 대꾸했다.
“하하…….”
백운풍이 음산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땅을 내리치지만 않았어도 우리가 거미 소굴에 떨어져서 거미들에게 잡혔겠어?”
“내가 땅을 내리치지 않았더라면 너희들은 벌써 곽원명 일당에게 죽임을 당했겠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겠어?”
양준이 냉소하며 말했다. 그는 백운풍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난 백씨 가문의 사람이야. 그 잡놈들이 감히 날 죽일 수 있겠어?”
백운풍이 성내며 말했다.
“내가 내 진짜 신분을 말하기만 하면 그들은 날 모시고 백씨 가문에 가서 돈이나 구걸할 텐데 어떻게 감히 내 목숨을 건드리겠어?”
“넌 죽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추씨 가문 큰 아가씨와 낙 낭자는 그들에게 잡히는 순간,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었어. 그들은 이 거미줄에 갇히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인간들에게 잡히고 싶지 않았을 거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난 나만 살아서 나가면 그만이야!”
백운풍은 폭언을 내뱉으며 화를 냈다. 그리고 말을 뱉자마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백운풍… 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 몰랐어.”
낙소만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는 큰 실망과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추억몽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기적이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어서 그럴 거야. 소만아, 신경 쓰지 마.”
“죽음을 두려워하는 걸 보니 백씨 가문의 인간들은 역시 겁쟁이야!”
낙소만이 비꼬며 말했다.
“너희들과 말을 섞지 않을 거야.”
백운풍이 투덜거렸다. 그는 두 여인과 완전히 척을 지고 말았다. 비록 칼을 겨눈 것은 아니었지만, 곤경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함께 다닐 수 없을 것이다.
양준과 선경라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침묵한 뒤,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떠나려면 지금 가도 돼. 여왕 거미도 널 남기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아.”
선경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널 못 보내준다고 하잖아.”
양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가 이 정도로 친하지는 않잖아? 추억몽이 말한 것처럼 이기적으로 굴지 않으면 세상 살아가기 힘들어.”
선경라는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심인 건 아니지? 내가 말했잖아. 독과부 혈통의 여인은 평생 한 남자에게만 마음을 준다고. 내가 널 속이는 줄 알았어?”
선경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난번에 네가 내 식해에 기운을 남기지만 않았어도 너를 신경 쓰지 않는 건데. 나쁜 자식, 하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나라고 무슨 방법이 있겠어?”
이미 감정이란 씨앗이 마음에 싹을 피웠으니 무럭무럭 자라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리고 독과부 혈통의 여인들은 마음을 빼앗기면 다른 여인보다 훨씬 정에 목을 맸다. 그래서 이 혈통의 여인들은 처량하고 슬픈 종족이었다.
선경라의 어머니 한비연은 어느 날 밤 무의식중에 선경라의 아버지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가 깨어난 뒤 본 것은 옆에서 싸늘하게 죽어 있는 남편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평생 고통 속에서 지냈다.
양준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선경라의 두 눈을 보면서 마음속 깊은 곳을 꿰뚫어보려고 했다.
선경라는 생긋 웃더니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식해의 방어를 풀고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못 믿겠다면 네가 직접 봐!”
양준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의 신식이 바로 그녀의 식해에 들어갔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지난번과 똑같았다. 바다의 위쪽에서 선경라가 우뚝 서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양준의 신식을 주시한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날 만지지 마. 이건 내 신식이야. 만약 만진다면 결과는 무시무시할 거야.”
“알고 있어.”
양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경라가 손을 움직이자 빛들이 양준의 신식 속에 들어왔다. 빛 속을 들여다보자 양준은 선경라의 모든 감정과 모든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하나하나의 장면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갔고, 직접 체험하는 것처럼 생생하기 그지없었다.
한참 뒤에야 양준은 천천히 그녀의 식해에서 나왔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치자 선경라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믿지?”
양준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요녀가 수련한 공법이 이토록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양준은 쓴웃음을 짓고 나서 입을 열었다.
“영광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에 대한 선경라의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그의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도 진실이었다.
선경라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혈통의 여인 중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끌리는 마음은 거부할 수 없어. 그러다 결국 사랑하는 남자를 죽이게 되는 거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라면 죽어도 행복하다는 말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뿐이었다. 만약 정말 그런 시기가 온다면 웃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체질을 바꿀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당연히 해보았지. 하지만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선경라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 이 얘기 그만하자.”
“응.”
“날 두고 떠나는 게 정 마음에 걸리면 우선 여기를 벗어날 방법부터 찾아보자.”
“닷새 뒤, 여왕 거미가 깨어나면 다시 얘기해 볼게.”
“만약 안 된다면?”
양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 된다면 그때 나라도 나가지 뭐.”
선경라는 생긋 웃어 보였다.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양준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네가 원래의 실력을 회복하면 이곳을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가능하지.”
선경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겨우 진원 경지 3단계까지밖에 회복하지 못했어. 원래의 실력으로 돌아오려면 적어도 몇 달은 걸릴 거야.”
“나한테 방법이 있을 수도 있어.”
양준은 히죽 웃었다. 선경라의 마음을 들여다본 그는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놓았다. 이 요녀는 보기엔 방탕하고 음란해 보이고 수련한 공법과 사용하는 비보 모두 저속하지만, 사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몸과 마음 모두 깨끗한 여인이었다.
“너한테 무슨 방법이 있는데?”
선경라가 호기심에 차서 물었다.
양준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위에는 만약영고 한 조각이 있었다.
“입 벌려.”
선경라는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비록 양준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고분고분 예쁜 입술을 벌렸다. 그렇게 그녀는 만약영고를 삼켜 버렸다.
“이제 연화해 봐!”
양준이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만약영고가 입에 들어오는 순간, 선경라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다급히 눈을 꼭 감고 수련하는 공법을 운행했다. 그녀의 실력이 떨어진 주요한 원인은 공법을 운행하던 중, 방해를 받아서였다. 결국은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이 만약영고의 도움이 있으면 이런 상처는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여왕 거미는 닷새 뒤에 다시 깨어난다. 선경라가 만약영고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 전에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경라 몸에서 전해지는 기세와 진원의 파동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녀는 지금 빠른 속도로 회복하는 중이었다.
이쪽의 변화를 감지하고 줄곧 침묵을 지키던 추억몽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름다운 눈을 깜박거리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을 찌푸렸다. 갇힌 나날 동안 그녀의 실력은 이미 회복되었다. 하지만 바깥에 6급 요수가 너무 많은 나머지, 그녀는 거미줄을 헤치고 나갈 수 있다 해도 감히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선경라의 행동에서 그녀는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다만, 선경라가 전에 내건 조건 때문에 추억몽은 뜸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래도 추씨 가문의 큰 아가씨인데 어떻게 이름도 없는 어린 사내의 시녀 노릇을 한다는 말인가? 그녀뿐만 아니라 낙소만의 신분만으로도 그보다 훨씬 고귀했다. 만약 이것이 소문으로 퍼지기라도 한다면 추씨 가문과 자미곡의 체면은 어찌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기한이 일 년이나 되었다. 일 년 동안 양준이 무슨 짓을 할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