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8장. 우리도 데려가줘
사흘 뒤.
선경라는 갑자기 눈을 떴다. 촉촉한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회복되었어?”
양준이 다급히 물었다.
“응.”
선경라는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양준을 훑어보며 말했다.
“너한테 이런 보물이 있을 줄이야.”
칭찬하던 그녀는 또 손을 내밀어 양준의 가슴팍을 꼬집으며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좋은 물건이 있으면서 왜 나한테 주지 않았어? 너 이 나쁜 자식, 역시 속으로 날 경계하고 있었지?”
양준은 어색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그녀의 머릿속 생각을 다 보지 않았더라면 양준이 어찌 그녀가 실력을 회복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회복됐으면 이제 나가자.”
양준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선경라는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힘들게 왔는데 여왕 거미의 독액은 챙겨야지. 이번에 널 데리고 떠난다면 여왕 거미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테니 나중에 오지 못할 거야.”
“자신 있어?”
“조금은. 너 거미 한 마리를 조종했었지?”
“응.”
“걔가 소란을 피우게 해 줘.”
“좋아!”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조종하는 거미에게 명령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거미는 갑자기 분노에 휩싸이더니 이유 없이 다른 거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른 거미들은 이를 보더니 다급히 싸움이 난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선경라는 손을 움직여 거미줄에 흠집을 내고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의 목소리만 양준의 귀에 들려왔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까!”
양준은 당연히 함부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바깥의 기척을 살폈다. 그가 조종하는 거미는 지금 이 순간, 다른 거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6급 요수는 영리하지는 않지만, 간단한 사고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공격당한 거미는 동료가 왜 갑자기 미친 듯이 날뛰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동료가 왜 갑자기 잡아들인 사람들을 잔뜩 죽였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잠깐 방어만 하던 거미들은 어떤 식의 소통을 펼쳤는지 공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동료가 이성을 잃은 것을 발견한 것 같았다. 짧은 순간에 양준이 조종하는 6급 요수는 죽임을 당했다. 모여들었던 거미들은 그제야 뿔뿔이 흩어졌다.
“양준!”
추억몽이 갑자기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양준은 굳은 얼굴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선경라 언니가 실력을 회복한 거지?”
추억몽이 다급히 물었다.
양준에게서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추억몽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양준, 너 이렇게 옹졸한 남자였어? 지난번 일은 내가 잘못한 거니 사과할게. 그럼 됐지?”
“됐어. 고귀하신 추 낭자의 사과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네.”
양준이 대답했다.
추억몽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됐어, 됐어. 내가 정말 잘못했어. 사람을 거느리고 너희 능소각을 쳐들어가지 말았어야 했어. 사실 나도 널 어찌할 생각은 없었어. 네 실력이 이렇게 강한데 진짜로 싸우게 된다면 누가 이길지도 모르는 거잖아. 그전에 난 작은 종문에서 너 같은 제자를 양성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
“아부하는 말은 그만하지. 들어도 구역질 나니까 말이야.”
“너나 나나 알 건 다 아는 사람인데 굳이 얄밉게 말을 돌리지 않을게.”
추억몽이 웃으며 말했다
“언니가 돌아온 뒤, 그녀에게 나와 소만도 데리고 나가달라고 부탁해 줄 수 없어? 그녀의 허락만 받아내 준다면 우리 추씨 가문에서 반드시 후하게 사례할게!”
“그녀가 너희들을 구할지 말지는 그녀의 의지야. 내가 간섭할 수는 없어.”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너희들이 그렇게 사이가 좋아 보이는데? 요미여왕은 그 어떤 남자와도 이렇게 친밀한 적이 없었어. 네가 우리를 도와 말 좀 잘 해준다면 언니는 분명 우리를 살려줄 거야.”
말을 하던 추억몽의 목소리가 갑자기 나긋나긋해졌다.
“나와 소만이를 시녀로 부리는 것만 아니라면 다른 요구는 마음껏 얘기해도 좋아! 네가 우리 추씨 가문 방계의 젊은 낭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 해도 들어줄 수 있어! 하지만 선 언니 앞에서는 이 얘기를 안 꺼내는 게 좋을 거야. 그 언니가 질투할 수도 있으니까.”
양준은 짜증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내가 말했잖아. 구하든 말든 그건 그녀의 의지고. 난 지금 내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들어. 나한테 길게 말해 봤자 소용없어.”
추억몽은 처량하게 쓴웃음을 짓더니 훌쩍이며 말했다.
“하지만 난 너한테밖에 희망을 걸 수 없단 말이야. 네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나와 소만은 살아서 나가기 어려워.”
말을 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넌 정녕 우리가 죽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거야?”
그녀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연기를 한다는 것을 알아챈 양준은 짜증이 나서 더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기 싫었다. 꿍꿍이가 많은 여인에게 양준은 항상 반감을 느꼈다.
“양준, 양준…….”
추억몽은 조금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두 사람의 말소리는 낮았으나 옆에 있는 소만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양준이 이토록 냉혹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낙소만도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입을 열었다.
“추 언니, 우리 이제 어떡해?”
추억몽은 한숨을 내쉬고 양준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다려 봐. 설마 여기서 죽기야 하겠어?”
바로 이때, 향긋한 냄새가 풍기더니 요염한 그림자가 양준의 앞에 나타났다. 그 그림자가 손을 휘두르자 양준을 속박하고 있던 거미줄이 싹둑 잘렸다.
“가자!”
선경라가 긴장한 얼굴로 양준을 잡아끌더니 몸을 움직여 위로 날아올랐다.
양준도 무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그가 신식을 펼쳐 살펴보니 여왕 거미의 왕성한 기운이 빠른 속도로 깨어나고 있었다. 방금 전, 선경라의 행동이 그것을 깨운 것이 틀림없었다.
“선 언니.”
추억몽이 다급히 소리를 내며 선경라를 불렀다. 이를 악문 그녀의 얼굴에는 고민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이번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선경라가 이렇게 떠나면 그녀와 낙소만은 정말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선 언니, 전에 말씀하신 조건, 받아들이겠습니다. 저와 소만이도 데려가 주십시오!”
추억몽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경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두 갈래의 분홍색 띠가 하늘을 가르고 날아오더니 추억몽과 낙소만을 감싼 채, 빠른 속도로 그들을 끌어당겼다.
선경라가 자신들을 포기하지 않은 것을 보고 추억몽과 낙소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히 어디를 가는 것이냐!”
이때, 여왕 거미의 노기 띤 소리가 들려왔다.
말하는 동시에, 새하얀 거미줄 두 줄기가 공중에 쏘아졌다.
이 거미줄은 말이 안 될 정도로 속도가 빨랐는데 거의 순식간에 눈앞까지 드리워졌다. 선경라와 양준은 안색이 변하더니 빠르게 손을 뻗어 막았다. 원기가 서로 부딪히자 두 줄기의 거미줄은 겨우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 힘에 의해 선경라의 손에 있던 띠가 잘리고 말았다. 바로 낙소만의 몸을 감싼 띠였다.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낙소만의 눈빛은 두려움으로 가득해졌다.
양준은 빠르게 발을 움직여 추억몽의 허리를 감쌌다. 부드럽고 단단한 힘이 전해지면서 추억몽은 소만에게 날아갔다. 추억몽은 떨어지기 전에 낙소만의 옷을 덥썩 잡고 그녀를 들어 올렸다.
“추 언니…….”
낙소만은 떨리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눈에는 콩알만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가슴을 들썩거렸다.
“잡았잖아. 걱정하지 마. 절대 손을 놓지 않을 거야.”
추억몽은 낙소만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표정에도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선경라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양준을 힐끗 쳐다보더니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양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방금 전에 움직인 것은 전혀 생각을 거치지 않은,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이때, 아래쪽에서 갑자기 백운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데려가! 이 치사한 놈들아. 왜 나만 남겨 두는 건데? 귀신이 되어서도 너희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추억몽과 낙소만은 얼굴을 굳히며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게 되고 세월이 지나야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했다. 전에 두 여인은 백운풍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비록 그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일등 가문의 공자인지라 돈과 세력이 있었고,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젊은 여인들의 선망을 받았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뒀던 진짜 모습이 드러나고 말았다. 참 개똥만도 못한 남자였다. 추억몽과 낙소만은 그를 동정할 마음마저 들지 않았다.
*거미굴에서 탈출한 그들은 그다지 크지 않은 호수 옆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호수는 달빛을 받아 반짝였고, 맑은 호수 아래로 자유롭게 노니는 물고기와 하늘거리는 수초가 언뜻언뜻 보였다.
양준은 모닥불을 피우고 물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낙소만과 추억몽은 초라한 몰골로 옆에 앉아 자유의 공기를 쐬며 또 한편으로는 복잡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수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리더니 선경라가 요염한 자태로 물속에서 나왔다. 세 사람은 다급히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깔깔…….”
선경라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요염하게 웃었다.
“좀 조심스럽게 행동하면 안 돼?”
양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 앞에서 그럴 필요가 있어?”
선경라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추억몽과 낙소만의 표정은 경악으로 바뀌더니 양준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이상해졌다. 비록 추억몽은 전부터 양준과 선경라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으나 직접 보지 않은지라 둘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지 알지 못했다.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그의 옆에 앉아 있다니. 양준에게 마음이 없다면 어느 여인이 이렇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