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9장. 표향성
추억몽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잘생긴 편이었고 실력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는 진원 경지 4단계밖에 되지 않는 소년이었다.
‘도대체 무슨 재주로 요미여왕의 마음을 빼앗은 거지?’
추억몽은 놀란 얼굴을 한 채,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양준은 그녀에게 눈을 흘기더니 열심히 물고기를 구웠다.
굽는 향이 퍼지면서 추억몽과 낙소만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두 여인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상기되었다. 두 사람은 창운사지의 무인들에게 한 달 동안이나 쫓기면서 별로 쉴 시간이 없었다. 배고프고 지친 와중에 또 거미에게 잡히기까지 했다. 곤경에서 벗어난 지금에야 그들은 진정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선 언니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추억몽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선경라가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과 나 사이에는 그저 거래일뿐이니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선 언니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저와 소만이는 분명 액운을 피하지 못했을 겁니다.”
추억몽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또 복잡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더니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너한테도 고마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직접 도움을 주지 않았더라면 추억몽은 제때에 낙소만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양준은 싸늘한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추억몽은 양준의 태도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보름 뒤, 표향성(飄香城).
이곳은 바깥의 다른 성과 비교했을 때도 전혀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요미여왕의 행궁이 자리한 곳이었다.
창운사지는 차지한 면적이 넓어서 여섯 덩어리로 나뉘어 여섯 명의 사왕이 관리하고 있었다. 표향성을 중심으로 사방 천 리 안은 선경라의 구역이었다.
보름 동안, 선경라는 양준과 추억몽, 낙소만을 데리고 다른 두 사왕의 구역을 가로질러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이곳으로 왔다. 표향성에 발을 들인 그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름 동안 지내면서 창운사지에 대한 양준의 인식에 변화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추억몽과 낙소만도 창운사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창운사지 안은 곳곳에 사악한 무인들로 가득하고 마귀로 들끓는다고 했다. 아무나 잡아도 죽을 죄를 저지른 나쁜놈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경라의 얘기를 들으니 창운사지는 바깥의 소문과 완전 다른 곳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지배하는 구역은 그렇지 않았다.
창운사지에는 사악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진실하고 착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종문에서 잘못을 저지른 뒤 하는 수 없이 창운사지에 발을 들인 무인들도 많았지만, 큰 세력에 밉보여 재난을 피하고자 창운사지에 숨어든 사람들도 있었다. 또 일부는 수련하는 공법이 어두운 것이라 사람들에게 사마로 분류되어 따돌림을 당하다 견디지 못해 창운사지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창운사지에 있는 많은 무인들은 모두 짠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라고 해서 모두 악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은 밝은 길만 추구하고 마음속의 음울한 모습을 인정하지 않지. 그래서 우리를 사(邪)로 부르더군……. 하하, 참 괘씸한 일이지!”
이 말을 하는 선경라의 얼굴에서 무기력함이 느껴졌다. 비록 그녀는 6대 사왕 중 한 사람이었고, 사방 천 리나 되는 큰 땅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세상 사람들의 인식 속 깊이 자리잡은 고정관념을 바꿀 수 없었다.
양준은 지마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무엇이 사람이고 또 무엇이 마두인가? 결국 인간과 마두는 같은 뿌리라고 볼 수 있다네!’
사람의 마음속에는 모두 사마가 있었다.
성으로 들어간 양준은 떠들썩한 성곽에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 이곳이 창운사지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양준은 여기가 바깥과 똑같은 곳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곳의 모든 것은 바깥세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평범한 장사꾼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었고, 수많은 무인들이 길을 지나갔다. 또 사람들과 교류할 때 누군가를 괴롭히려는 기색도 없었다. 가끔씩 칙칙하고 사기로 가득한 무인이 지나갔지만, 그들도 표향성의 규칙을 엄수하며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성안에서 수시로 검은색 경장을 입은 무인들이 길을 지나갔는데 표향성의 질서를 유지하는 치안대 같았다. 표향성에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두 이 치안대의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창운사지 중에서도 표향성은 가장 안전한 성곽이었다. 선경라는 이 성을 더더욱 번성하게 가꾸었고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아주 드물었다.
그녀는 검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앞쪽에서 느긋하게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추억몽과 낙소만도 그녀의 뒤를 따르며 몰래 성곽 안의 풍경을 훔쳐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 성곽을 이토록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는 건 선경라의 수단이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길을 가던 양준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를 발견한 선경라는 몸을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양준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작별인사를 하자고.”
비록 미인의 흠모를 받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양준은 어느 날 갑자기 선경라가 참지 못하고 그의 목숨을 취할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소안과 떨어진 지도 한참 지난 지라 양준은 소안의 상황을 알아보고 싶었다.
그의 말을 들은 선경라는 눈을 굴리더니 그의 마음속 생각을 꿰뚫어보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양준의 팔을 덥석 잡고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이렇게 열정적으로 굴 건 없잖아.”
양준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가장 걱정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선경라가 그를 풀어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 오는 길에서 그도 여러 번 도망치려고 했으나 도망치려고 할 때마다 선경라에게 들켰다. 선경라가 이렇게 강한데 정말 그를 잡아 두려고 한다면 그도 방법이 없었다.
“지금 밖은 전란이 잦아서 이곳에서 나가도 위험해. 나랑 좀 더 지내자.”
“얼마나 더?”
“글쎄 내 기분을 봐야지. 하하…….”
양준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젠장, 남는다면 이 요녀의 기생오라비가 되는 거잖아?’
추억몽과 낙소만은 고소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괜히 마음이 후련했다.
선경라에게 잡히자 몸의 진원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요녀는 고분고분하게 한 손으로 양준의 팔을 잡은 채, 그윽한 얼굴로 그에게 기댔다. 그녀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보았더라면 표향성에 난리가 났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선경라의 행궁에 도착했다.
행궁은 매우 화려하게 지어져 있었고, 차지한 면적도 아주 컸다. 용과 봉황이 조각된 건물은 그 기세가 매우 웅장했다.
행궁에 들어선 양준은 이 커다란 행궁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굽이굽이 돌아 복도를 지나자 귓가에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그림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행궁에는 시녀 몇 명 말고 다른 사람은 없어. 항상 조용하니까 너희들도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는 없어!”
선경라가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행궁으로 돌아온 그녀는 이제야 안심했는지 얼굴의 면사포를 풀고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아름다운 몸매가 드러났다.
“누구냐!”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자색 그림자가 신속하게 다가왔다.
“나야!”
선경라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귀여운 생김새에 아담한 여인이 사람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인!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이 여인은 기껏해야 스무 살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것이 한창 예쁠 때였다. 그녀는 선경라를 보더니 기쁨과 안도감이 가득 담긴 눈을 반짝거렸다. 너무 기쁜 탓에 그녀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양준은 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구름 같은 긴 머리와 가는 버들잎 눈썹, 가늘고 아름다운 눈매, 오똑한 코, 발그레한 볼, 앵두 같은 입술을 가진 그녀는 꽃처럼 아름다웠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날씬한 몸매까지 겹쳐져 더욱 아름다웠다.
양준은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요미여왕의 시녀답네. 이렇게 아름답다니.’
신식으로 그녀를 살짝 훑자 이 소녀가 진원 경지 7단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추억몽보다 못했지만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도 추억몽보다 한두 살 어린 것 같았다.
양준이 신식으로 훑자 그 소녀는 갑자기 몸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양준을 보더니 한참 주시했다.
‘느낌 한 번 예민하네!’
양준은 가볍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소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선경라가 왜 세 사람을 데리고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굳이 따지고 들진 않았다.
“대인, 수왕의 매복병에게 당했다면서요! 괜찮으세요?”
“괜찮아.”
선경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그럼 다행이에요! 수왕도 참 치사해요. 이번 일로 장로들이 하마터면 그와 싸울 뻔했다니까요. 참, 대인, 지금 밖에서 중도 8대 가문이 각 대종문들과 연합하여 성지를 공격하고 있어요. 우리 표향성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참전했어요. 장로들 말씀으로는…….”
“내일 얘기하자. 오늘 좀 피곤하네.”
선경라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장로들이 알아서 하면 되지.”
“네.”
소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의아한 얼굴로 선경라와 함께 온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 세 분은…….”
선경라는 미간을 찌푸린 채, 추억몽과 낙소만을 보더니 갑자기 웃으며 손으로 빛을 쏘았다.
추억몽과 낙소만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녀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진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선 언니, 이게 무슨 뜻이죠?”
추억몽이 억지로 웃으며 물었다.
“별거 아니야.”
선경라가 웃으며 말했다.
“벽락(碧洛)아, 이 두 낭자를 영향루(迎香樓)로 모시거라.”
“네.”
벽락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추억몽과 낙소만을 훑어보았다.
‘이 두 사람이 무슨 일로 대인에게 밉보였기에 영향루에 갇히는 거지?’
그녀는 궁금했으나 묻지 않고 손뼉을 쳤다.
곧이어 묘령의 여인 몇 명이 나타났다. 이 여인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실력도 낮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시녀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들을 영향루로 데려가.”
벽락이 지시했다.
“네!”
“잘 모셔야 한다. 두 낭자를 섭섭하게 대하면 안 돼!”
선경라가 웃으며 당부했다.
추억몽과 낙소만은 안색이 어두워졌으나 반항하지 않고 그저 쓴웃음만 지어 보이고는 시녀들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