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290화 (290/853)

제 290장. 추혼인

“그럼 저 분은요?”

벽락은 양준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는 남자의 정체가 매우 궁금했다. 선경라가 한 번도 젊은 남자를 데리고 행궁에 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왕이 방문해도 손님을 맞이하는 곳에만 머무르게 했지 이렇게 조용한 곳에는 남자를 들인 적이 없었다.

“쟤는…….”

선경라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똑같이 양준의 몸속으로 빛을 쏘았다.

양준은 얼굴을 굳히더니 슬며시 진원을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몸속에 낙인이 하나 생겼을 뿐이었다. 그것도 스스로 절대 풀 수 없는 낙인이었다.

“봉환루(鳳還樓)로 데려가 쉬게 해!”

선경라는 웃는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은 표정이 매우 어두웠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봉환루…….”

벽락은 선경라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눈빛을 했다. 그곳은 행궁에서 가장 깊숙한 곳이자, 가장 좋은 누각이었다. 대인이 아가씨일 때 머물렀던 곳이기도 했다.

‘안에는 대인이 썼던 침구와 베개도 있고, 대인의 체향도 남아 있을 텐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이 대인의 소싯적 기억이 있는 곳이라는 거야. 이런 사적인 곳에 어떻게 남자가 머무르게 허락할 수 있지?’

벽락도 전에 봉환루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선경라에게 몇 달 동안이나 사정해 보았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이름도 모르는 남자를 봉환루에서 지내게 하라니.

‘이 녀석이 누구기에 이토록 대인이 특별히 여기는 거야!’

그녀는 놀란 얼굴로 끊임없이 양준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질투와 못마땅함이 담겨 있었다.

“오느라고 힘들었을 텐데 오늘은 일찍 쉬어. 내가 일을 마치고 널 찾아갈게.”

선경라가 웃으며 말했다.

양준은 그녀를 흘겨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구역에 있으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벽락이 손뼉을 쳐 시녀들을 불러오려고 하자 선경라가 말했다.

“네가 직접 봉환루로 데려다 줘.”

벽락은 멍해졌다가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선경라는 또 나지막한 목소리로 양준에게 당부했다.

“쟤는 괴롭히지 마. 벽락은 어려서부터 나와 함께해서 자매 같은 아이야.”

“알았어.”

양준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가요!”

벽락은 양준을 이끌고 행궁 안을 거닐었다.

요염한 소녀의 뒤를 따르며 양준은 길 가는 내내 행궁을 살펴보았다. 그는 선경라의 행궁이 아주 조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비록 바깥은 번성한 성곽이었지만 안에서는 조금도 밖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곳곳에 향기가 가득하고 길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수시로 마주치게 된 아름다운 시녀들은 모두 벽락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준을 훑어보았다.

양준은 행궁 안에서 남자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잠시 뒤, 봉환루에 도착했다.

우아한 건물은 3층으로 나뉘었는데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운치가 있었다. 건물 앞에 많은 꽃과 풀이 심어져 있었고, 마침 꽃들이 활짝 필 시기라서 향기가 가득 풍겼다.

“이봐요…….”

벽락은 앞에서 길을 안내하며 양준에게 당부했다.

“길을 걸을 때, 이 꽃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이것들은 모두 대인께서 손수 재배하신 거예요. 만약 밟아서 망가지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네!”

양준은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소녀가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녀의 퉁명스러운 말투를 따지지 않았다.

‘무슨 사람이 이래!’

벽락은 속으로 계속 투덜거렸다.

‘이 남자는 그다지 대단한 인물인 것 같지도 않고 옷차림이나 기질에서도 출신이 고귀한 티가 전혀 안 나는데 대인께서는 왜 이 사람한테 마음을 빼앗긴 거지? 게다가 대인은 이 사람에게 날 괴롭히지 말라고 했어! 이 사람이 날 이길 수나 있겠어?’

벽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경라가 양준을 신경 쓰지만 않았어도 벽락은 참지 못하고 양준과 무예를 겨룬다는 핑계로 혼쭐을 내줬을 것이다.

누각에 들어와 위층으로 온 벽락은 방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기쁜 표정이 드리웠다. 그녀는 양준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 안에 있는 커다란 침대 위로 올라가서 두 팔을 쩍 벌린 채로 엎드렸다. 그녀는 방석 하나를 안고 코를 문지르며 힘껏 냄새를 맡아 보았다. 냄새를 맡는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이건 대인께서 누우셨던 침대고, 이건 대인께서 베고 주무셨던 베개, 그리고 이건 대인의 체취…….’

벽락은 넋이 나간 것처럼 얼굴이 상기되었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며 속으로 몰래 웃었다. 이 소녀는 마음속으로 선경라를 숭배하는 대상으로 보는 듯했다.

자세히 방을 살펴본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쁘지 않네!”

순간, 벽락이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다급히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으르렁거렸다.

“나쁘지 않네?”

양준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여인이 쓰는 규방이었다. 그가 여기서 변태처럼 굴지 않고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내린 것만 봐도 이미 괜찮은 편이었다.

“허허… 나쁘진 않죠!”

벽락이 가볍게 이를 악물더니 씩씩거리며 말했다.

“여긴 대인께서 어린 시절에 묵으신 방이에요. 제가 아무리 사정해도 대인께선 절 들여보내지 않으셨는데 출신도 알 수 없는 당신이 만족할 줄도 모르고 기껏 하는 말이 나쁘지 않다예요?”

“음…….”

양준은 경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녀가 왜 자신에게 이토록 큰 적의를 품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코를 만지작거리더니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벽락 낭자, 뭔가 저한테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오해는 무슨!”

벽락은 씩씩거리며 일어서더니 베개를 안은 채, 쿵쾅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베개는 왜 들고 가요?”

양준은 어이가 없었다.

“이건 대인이 썼던 거예요.”

벽락은 몸을 홱 돌리더니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또 씩씩거리며 돌아와 침대 위의 이불도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이것도 대인 거예요.”

매서운 눈빛으로 양준을 쏘아본 그녀는 도도하게 떠나갔다.

양준은 깜짝 놀랐다.

‘선경라를 숭배하는 정도가 엄청나는군.’

그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침대 위에 올라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표향성은 절대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선경라가 수련하는 공법은 사람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다. 만약 남아 있게 된다면 언젠가 그녀의 몸 위에서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선경라의 실력이 회복되어 양준은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만약영고를 주지 않는 건데!’

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늑대 굴을 벗어나니 호랑이 굴에 떨어진 셈이었다. 그리고 선경라가 양준의 몸에 심은 낙인은 추적하는 용도였다. 도망치려면 반드시 이 낙인을 지워야 했다.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은 양준은 몸속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가 수련한 신식으로는 몸 안의 상황을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잠시 뒤, 양준은 가슴과 복부 사이 늑골에 희미한 기운이 구더기처럼 붙어 있는 것을 느꼈다. 진양원기를 움직여 없애 보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금신의 사악한 기운으로도 정화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곳에 착 붙어 있었는데 몸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고, 진원의 운행을 막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기운은 마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등탑처럼 선경라는 손쉽게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지마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마가 있었다면 그것이 어떤 기운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마는 곤룡골 아래에 있는 마두의 몸으로 들어간 다음부터 지금까지 소식이 없었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양준은 갑자기 신식 한 가닥이 그의 옆까지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다.

“나쁜 놈, 지금 뭐 하고 있어?”

선경라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그 목소리는 마치 투덜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려고 했어.”

양준은 눈을 희번덕거렸다.

‘이 요녀가 내 몸속에 심은 기운이 문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 움직임이 이렇게 그녀한테 전해지는 줄은 몰랐군.’

선경라가 웃으며 말했다.

“괜한 힘을 빼지 마. 그건 내 추혼인(追魂印)이야. 내 손으로 해제하지 않는 이상, 신유 경지 정상의 고수가 와도 어찌할 수 없어. 이 낙인만 있으면 네가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내가 찾아낼 수 있지!”

“그럴 필요까지는 없잖아.”

양준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깔깔…….”

선경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너더러 자꾸 딴마음 품으래? 네가 얌전히 있었으면 내가 이러겠어? 됐어, 됐어. 너 먼저 하룻밤 쉬어. 내일 다시 찾아올게. 심심하지 않게 놀아 줄게.”

“사양할게.”

“매정하긴!”

선경라는 코웃음을 치더니 신식을 거두었다.

양준도 하는 수 없이 추혼인을 없애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푹 잤다.

다음날.

양준은 아래층에서 전해지는 발걸음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는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방문이 열리더니 몸매가 풍만한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 여인은 나이를 알 수 없었지만 기껏해야 스물다섯을 넘지 않은 것 같았다. 요염한 용모가 선경라보다는 못했지만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잘 익은 과일 같은 매력을 풍겼는데 움켜쥐면 과즙이 터질 것 같았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양준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고 말했다.

“공자께서는 어젯밤에 잘 주무셨나요?”

“뭐 그럭저럭!”

양준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앞으로 다가오더니 침대 옆에서 예를 올리고 입을 열었다.

“공자께 아룁니다. 소인은 공자를 모시라고 대인께서 특별히 보낸 사람입니다. 절 운려(蕓麗)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리고 시녀 두 명이 더 있습니다.”

여인이 자신을 소개하는 한편, 손을 흔들자 그녀의 뒤에서 기질이 다른 묘령의 두 소녀가 걸어 들어왔다. 한 명은 부드럽고 얌전해 보였으며 다른 한 명은 우아하고 단아해 보였다. 이 여인과 두 소녀 모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이 즐거워졌다.

“이쪽은 약우(若雨)예요.”

여인은 부드럽고 조용한 소녀를 가리키며 소개하다가 또 다른 단아한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약청(若晴)이에요!”

“공자를 뵙습니다!”

두 사람은 예를 올렸다. 행동으로나 옷차림으로나 명문가 아가씨들 같은 것이 전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양준은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선경라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날 미색에 빠뜨리려는 건가?’

양준은 고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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