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294화 (294/853)

제 294장. 성질을 죽이다

몽글몽글한 느낌이 전해지더니 운려의 기다란 손가락에서 신비한 힘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이 지나가는 곳마다 피곤이 가시고 더없이 편하고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라면 여인의 부드러움을 거부하지 못한다는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양준도 태연하게 눈을 감고 이 기분에 심취했다.

방 안은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양준이 입을 열지 않자 부인도 말을 하지 않고 열심히 주무르기만 했다.

잠시 뒤, 건물 밖에서 벽락의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수련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약우와 약청에 의해 흐름이 깨진 듯했다. 하지만 선경라의 명령이 있으니 그녀는 또 다급히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불만이 가득한 것도 이해할 만했다.

“양준!”

건물 아래서 벽락이 허리를 짚고 매끈한 턱을 치켜올린 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양준은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바로 몸을 날려 창가에서 뛰어내리더니 그녀의 앞에 정확하게 착지했다.

“여인은 여인다운 모습이 있어야지. 이렇게 난폭하게 굴 것까지는 없잖아요.”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상관하지 말아요!”

벽락이 이를 악물며 아래위로 양준을 훑어보더니 화를 내며 말했다.

“지난번에 제 기분 좀 맞춰 주었다고 당신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착각하지 말아요. 대인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저는 당신을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럼 물건을 돌려줘요!”

양준은 진지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뭘요?”

벽락이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귀걸이 말이에요.”

벽락은 다급히 뒷걸음질 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양준을 바라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 거예요?”

“당신에게 잘 보여도 소용없는데 뭐 하러 잘 보이겠어요? 물건을 내놓으세요!”

양준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이봐요. 그러고도 당신이 남자예요?”

벽락은 갑자기 멍해졌다.

“한번 준 물건은 엎질러진 물이에요. 다시 빼앗는 게 어디 있어요? 너무 치사하잖아요!”

“그건 당신이 아는 게 적어서 그렇죠!”

양준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누가 줬다 뺏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내가 말했어요!”

벽락은 새하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안 줘요! 절대 못 줘요! 당신이 그날 저에게 준 거예요. 제 손에 들어왔으면 이제 제 물건이에요.”

“안 줄 거예요?”

“안 줘요!”

“좋아요!”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어딜 가는 거예요!”

벽락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몸을 날려 그의 앞을 막아섰다.

“당신네 대인에게 이르려고요. 당신이 보물 창고에서 비보를 훔쳤다고 할 거에요!”

양준은 도발적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당신… 당신…….”

벽락은 뒷걸음질 치더니 떨리는 손으로 양준을 가리키며 얼굴이 빨개진 채 소리를 질렀다.

“왜 이렇게 뻔뻔스러워요? 그때 분명 당신이 보물 창고에서 저한테 줬잖아요. 그러면서 말도 했잖아요…….”

“그날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요!”

양준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계집애, 참 단순하군. 정말 내가 좋은 마음에 선물한 줄 알았나?’

“그날 저는 단약 두 병 외에 아무것도 가져간 게 없는데요.”

양준은 태연하게 덧붙였다.

“이런 식으로 억지 부릴 거예요?”

벽락은 풀이 죽었다. 그녀는 드디어 다른 사람에게서 뭔가를 가지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도리를 깨닫게 되었다. 비록 속으로 양준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불쌍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훌쩍거렸다.

“당신 이런 사람이 아니잖아요? 제가 못되게 군 것은 사과할게요. 제가 대인께 오해를 받고 혼나는 것을 보고 싶으신가요?”

벽락은 글썽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을 하다 보니 눈시울이 붉어져서 세상 큰 억울함을 당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양준에게는 이 수가 통하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원래 매정한 놈이라서 받은 만큼 갚아 줘야 직성이 풀려요. 그래서 절 건드린 것은 절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에요.”

“당신… 알겠어요!”

벽락은 불쌍한 모습이 먹히지 않자, 눈물을 짜내기도 귀찮아져 이를 악물고 물었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

“너무 심심해서 당신 대인이랑 얘기나 하려고요!”

벽락의 진원이 용맹하게 솟구쳤다. 그녀는 매섭게 양준을 노려보았다. 마치 당장이라도 양준을 공격하려는 것 같았다.

양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히죽히죽 웃었다. 그는 벽락의 실력을 안중에 두지 않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 이곳에서 공격한다면 양준은 그 핑계로 선경라에게 난리를 쳐서 이 요녀의 속박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대치했다. 벽락의 기세가 순식간에 흩어지더니 무기력하게 말했다.

“내가 졌어요!”

그녀 평생 처음 받은 선물이 치명적인 약점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앞으로 죽어도 선물은 받지 않을 거야. 특히 남자의 선물이라면 더더욱!’

벽락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는 가릴 수 없는 그늘로 남을 것 같았다.

“절 존중해 주든가, 아니면 물건을 돌려줘요.”

양준은 느긋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겠어요!”

벽락은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그리고요?”

“밖을 좀 둘러보고 싶은데 같이 나가요.”

“네.”

“착하네요!”

양준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하고는 웃으며 나갔다.

두 사람이 떠나자 부인과 뒤따라온 약우, 약청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은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벽락 낭자가… 성질을 죽인 거야?’

표향성 안에서 벽락은 줄곧 두려워하는 것이 없었다. 선경라의 지시 말고는 그녀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출신도 불분명한 사내가 그녀를 굴복시킨 것이다.

아름다운 부인과 두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멍하니 서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참, 선경라가 말하지 않던가요? 만약 내가 사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그녀가 돈을 내주는 건지에 대해서요?”

행궁을 나서서 길거리에 도착하자 양준이 입을 열었다.

“네.”

벽락은 기운이 없어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 또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버럭 화를 냈다.

“대인의 이름을 어떻게 함부로 부를 수 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양준은 딱밤을 먹이며 말했다.

“난 걔 앞에서도 이름 불러요. 걔도 아무 말 하지 않는데 당신이 왜 잔소리를 해요?”

“당신…….”

벽락은 으르렁거렸다.

“경고하는데 사람을 너무 괴롭히지 말아요!”

양준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전히 앞에서 길을 걸었다.

성안을 한 바퀴 둘러본 뒤, 그들은 한 약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표향성 안에서 꽤나 강한 세력을 가진 사람이 연 약방이었다. 두 사람이 문에 들어서자 약방 주인이 비틀거리며 계산대 뒤에서 뛰어나왔다. 그는 벽락 앞으로 다가와 다급히 인사하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벽락 낭자, 오셨군요. 마중 나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주인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자 약방 안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왕좌왕하며 손님들도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새에 주인 한 명만 남았다.

양준은 경악한 얼굴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벽락 낭자가 표향성에서의 명성이 그다지 좋지 않나 보군.”

“응.”

벽락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벽락 낭자께서는 오늘… 뭘 사시려고요?”

주인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사려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살 거예요. 이 사람이 손님이에요! 이 사람을 접대하세요.”

벽락이 퉁명스럽게 양준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주인은 이해가 되지 않아 양준과 벽락을 번갈아 보았다.

“신식을 키워 주거나 회복하는 단약이 있나요?”

양준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있어요!”

주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양신단(養神丹), 보신단(補神丹), 회신단(回神丹) 모두 있습니다. 다 손님이 원하는 것이지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얼마나 있는데요?”

양준이 물었다.

“이런 단약은 많지 않아요. 작은 가게다 보니 서너 병밖에 없어요. 회신단만 다섯 병 있어요.”

“다 살게요!”

양준이 손을 내저으며 통쾌하게 말했다.

돈을 내줄 선경라가 있는데 안 사면 손해 보는 것이었다. 더구나 사방 천 리를 지배하는 사왕인 그녀에게 이까짓 돈은 돈으로 치기도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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