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9장. 내가 어떻게 해야 화가 풀릴까?
신유 경지의 고수들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더니 공격하기 시작했다.
콰광-
낙욱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들도 하는 수 없어서 낙욱을 기절시킨 것이었다. 낙욱은 스스로의 기운에 잠식되어 있었다. 그는 아직 몸속의 사악한 기운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다. 바로 이 원인 때문에 그들은 전에 양준이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막지 못한 것이었다.
양준이 두 번째 천급 비보를 꺼내자 그들은 막기 싫어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양준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낙욱이 좀 다치는 것은 괜찮아도 양준 뒤에 있는 세력을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세력이든, 사람이든, 낙씨 가문이 건드릴 만한 상대가 아닌 것 같았다. 더구나 그는 선경라의 손님이 아닌가!
“무슨 뜻이지?”
양준은 싸늘한 얼굴로 자신의 앞을 막아선 낙씨 가문의 사람을 바라보며 침착하게 천예혈해당을 거두어들이고는 덤덤하게 물었다.
“공자, 죄송합니다…….”
낙씨 가문의 신유 경지 고수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공수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공자, 화를 푸십시오. 우리 도련님께서 저지른 잘못을 공자께서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공자께서도 보셨다시피 도련님이 사기를 사용하는 바람에 이성을 잃었습니다. 절대 공자와 죽을 때까지 싸우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번 싸움은… 여기까지 하죠.”
양준은 눈썹을 치켜뜨더니 비꼬며 말했다.
“낙씨 가문은 참 대단하네요. 치고 싶으면 치고 관두고 싶으면 멋대로 관둡니까?”
“그게…….”
순간 할 말을 잃은 낙씨 가문의 사람은 안색이 난처해졌다.
하지만 그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양준은 처음부터 분명 단약을 사러 온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도련님이 굳이 억지를 부리며 상대방을 도발한 것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순간, 양준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가 당신들에게 맞아서 기절했으니 제가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네요.”
“공자, 죄송합니다!”
낙씨 가문 사람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큰 짐이라도 덜어낸 것처럼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양준이 이렇게 순순히 넘어갈 줄 몰랐던 그는 무척 감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양준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돌아서면서 싸늘하게 말했다.
“이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낙씨 가문 사람들의 안색이 바로 어두워졌다.
*벽락은 품에 신식을 회복시켜 주는 단약 열몇 병을 안고서 양준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갔다. 그녀는 복잡하면서도 괴로운 표정으로, 그리 우람해 보이지 않는 양준의 뒷모습을 끊임없이 훑어보았다.
그녀는 오늘 일이 무척이나 후회되었다.
오늘 그녀가 양준을 데리고 낙천 약방에 가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원래는 낙욱을 이용해 양준을 혼쭐 내주려고 마음먹었으나 정작 때가 되니 또 모질지도 못해서 결국 양준에게 밉보이게 되었다. 문제는 양준의 실력이 높아 낙욱과의 싸움에서 결코 열세에 처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얼떨결에 싸움이 끝나고, 벽락은 자신이 결국 양쪽 모두에게 원망만 사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양준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냉담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더욱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가까스로 행궁으로 돌아온 벽락은 더는 참을 수 없어 빠른 걸음으로 양준의 앞에 걸어가 그를 막고서 화난 말투로 말했다.
“이봐요!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양준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벽락은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는 말했다.
“당신 대단한 거 알아요. 그렇다고 사람을 이렇게 무시하면 안 되죠. 사실 낙천 약방에 간 건 낙욱을 이용해서 당신에게 겁을 주려고 한 거 맞아요. 나중에는 막으려고 했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벽락은 고아에 출신도 고귀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경라 곁의 실세로서, 외모도 빼어나다 보니 평소에는 거의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도도했다. 더하여 그녀는 남다른 성적 취향 때문에 남자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선경라는 양준을 데려와 봉환루에 거주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행궁에서 가장 뛰어난 여인 셋을 보내 시중들게 했다. 벽락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양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선경라의 명에 따라 그를 상대하긴 했으나 마음속으로 줄곧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성미와 도도함으로 볼 때, 지금 진심으로 사과까지 한 건 이미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양준은 미간을 마구 구긴 채, 그 자리에서 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벽락은 금세 불쾌해하더니 뾰로통해서 말했다.
“사과도 했는데 용서 안 해줄 거예요? 남자들은 도량이 넓다면서요, 아닌가 봐요?”
양준은 벽락의 멱살을 확 휘어잡고 눈앞으로 끌어왔다.
벽락은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손을 써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곧 놀라운 양준의 전투력을 떠올리고 꾹 참으면서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뭐 하려는 거예요?”
“한 번 더 허튼 수작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양준이 콧방귀를 뀌며 경고했다.
말투가 차갑고 단호한 것이 농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벽락은 그의 진지함을 알아차리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녀가 계속해 뻗대고 몇 마디 하려는데, 양준이 놓아주었다. 그는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피를 왈칵 토했다. 토해 낸 피 속에는 자색 기운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악……!”
벽락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저리 꺼져!”
양준은 장풍을 날려 벽락을 십여 장 밖으로 밀어냈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은 자색 사화에 싸여 활활 타올랐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전해지며 그의 머리카락과 옷에 삽시간에 새하얗게 서리가 뒤덮였고, 차디찬 기운이 실체처럼 줄기줄기 퍼져 나갔다.
쩍- 쩍-
양준이 서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사방 십여 장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벽락은 떨리는 눈동자로 양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낙욱의 초식을 완전히 해소한 게 아니었구나. 체내에 봉인했다가 지금 다시 발작한 거야.’
이는 흉살사동에서 나온 자색 사령의 사화로, 진짜 불이 아니라 자색 사령의 사악한 기운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낙욱은 이를 흡수하고 제련해 본인의 초식에 섞었던 것이다.
이런 사악한 기운은 다루기 힘들었다. 일단 당하면 실력이 낙욱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은 이상, 조만간 사악한 기운에 온몸의 원기가 다 먹혀 결국 얼어 죽게 돼 있었다. 이에 대해 벽락은 들어만 봤지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부상당했나요?”
벽락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양준의 지금 상태를 알게 되자 그녀의 마음속 불만은 곧 양심의 가책으로 바뀌었다.
“당신도 랑아방에 좀 맞아 보시지.”
양준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서 진양결을 돌려 몸을 감싼 자색 사령의 사화를 다시금 경맥 안에 억제해 집어넣었다.
낙욱은 젊은 세대 고수다웠다. 그와의 대결은 끝까지 진행되지 않았고, 표면적으로는 낙씨 가문의 신유 경지 고수까지 뛰쳐나와 사과하는 바람에 양준이 이긴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결과는 양준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정말 끝까지 싸웠다면 그 역시 이길 자신이 없었다. 낙욱의 경지는 그보다 작은 경지 4단계가 더 높았다. 게다가 랑아방의 위력도 대단했다. 비록 천예혈해당으로 방어하고 있었으나 양준은 오장 육부가 모두 뒤틀렸고, 지금까지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어떡해요?”
벽락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치료해야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아, 네. 그럼 얼른 돌아가요.”
벽락이 서둘러 다가와 양준을 부축하고는 신속하게 봉환루로 갔다.
양준이 그녀에게 막말을 해도, 벽락은 전혀 화내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그녀는 양준의 말투에서 차가운 살기를 느낄 수 없었다.
‘이제는 화가 많이 누그러졌나 봐.’
*봉환루.
양준은 돌아오자마자 1층으로 갔다. 가는 길에 옷을 벗어 던지고 곧장 온수가 가득 찬 욕조에 뛰어들었다.
바깥에 양준을 시중드는 세 여인과 벽락이 나란히 서 있었다.
“공자님, 무슨 일 있었어?”
운려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낙욱과 싸우다 부상을 입었어.”
벽락이 조용히 대답했다.
“낙씨 가문 공자와? 어쩌다가?”
운려는 붉은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눈동자에는 놀라움뿐이었다.
“내 잘못이야. 더는 묻지 마.”
벽락은 한숨을 연신 내쉬며 품속에 있던 단약을 꺼내 약우, 약청에게 건넸다.
운려는 짐작가는 바가 있어 벽락을 몇 번 더 살펴보았다. 그녀는 곧 무슨 일인지 눈치챘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운 언니, 내가 어떻게 사과해야 저 사람의 화가 풀릴까?”
벽락이 잠깐 침묵하다 고개를 돌려 운려에게 물었다.
“사과? 해가 서쪽에서 떴나? 설마 너 저 사람……?”
운려의 눈동자에는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놀란 눈빛으로 벽락을 바라보다가 농을 던졌다.
“아니야.”
벽락은 그녀를 사납게 노려봤다.
“됐어, 이젠 언니한테 말하지 않을래.”
벽락이 화나서 궁시렁거리고는, 한마디 당부했다.
“잘 시중들고 있어. 난 이만 돌아갈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응.”
운려와 약우, 약청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