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301화 (301/853)

제 301장.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데?

양준은 깜짝 놀랐다. 그제야 벽락이 그날의 일 때문에 아직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성격상 이렇게까지 그의 비위를 맞출 이유가 없었다.

신식 수련으로 인한 피로감은 그때마다 운려의 안마로 모두 날려 버릴 수 있었다. 가늘고 긴 열 손가락으로 안마해 주면 정말 시원하고 날아갈 것만 같았다. 벽락의 안마는 운려보다 못했다. 그러나 매우 성심성의껏 주무르고 있었다.

한참 뒤에 벽락이 물었다.

“어때요? 시원하죠?”

“괜찮네요.”

양준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냥 괜찮다고요? 그럼 운려 언니가 해주는 것보다는 어떤가요?”

벽락은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운려보다 못해요.”

“흥!”

벽락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봉환루 밖.

운려가 약우, 약청과 함께 낙엽을 쓸고 있는데,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보니, 낯선 여인 둘이 눈앞에 나타났다.

행궁에는 낯선 이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운려는 이 둘을 본 적은 없었지만, 잠깐 생각해 본 뒤, 금방 누구인지 깨달았다.

며칠 전에 선경라가 데려온 추억몽과 낙소만이었다. 그녀들은 온몸의 진원이 봉인 당한 다음, 영향루에 갇혀 있었다. 그동안 태도가 좋았는지, 요 며칠은 행궁 안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녀들은 봉환루에서 수련에 거의 미쳐 있는 양준과 아는 사이인 듯했다.

운려는 곧 얼굴에 환한 미소를 떠올리고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추 낭자, 낙 낭자시죠?”

추억몽은 눈앞의 아름다운 부인을 훑어보았다. 눈동자에는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선경라의 행궁에 있는 여인들이 하나같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네. 언니는 성함이 어떻게 되죠?”

운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운려라고 불러 주세요.”

운려는 추억몽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잡혀 있지만, 어쨌든 신분이 높으므로 언니라고 부르게 할 수는 없었다.

추억몽은 옅게 미소 지으며 더 말하지 않았다.

운려가 웃으며 물었다.

“두 분께서는 양 공자를 찾아오셨나요?”

“네. 그가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좀 의논할 일이 있어 찾아왔거든요. 지금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지금요…….”

운려는 봉환루 2층을 뒤돌아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아마 괜찮을 거예요. 매일 이 시간에는 잠깐 쉬거든요.”

“쉰다고요? 평소 바쁜가 봐요?”

추억몽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네. 양 공자는 이곳에 오면서부터 계속 수련하고 있어요.”

추억몽은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와 낙소만도 부지런히 수련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늘상 수련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양준이 이곳에 온 뒤, 지금까지 줄곧 수련에 매진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그의 끈기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오세요. 지인이라 공자님께서 만나줄 거예요.”

운려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약우, 약청에게 한마디 말하고는 추억몽, 낙소만을 데리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주위의 환경을 살펴보고 나서, 추억몽은 표정이 더욱 씁쓸해졌다. 낙소만은 화가 나서 추억몽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 나쁜 자식은 완전 좋은 곳에서 지내고 있었네. 여기저기 꽃도 있지, 향기도 넘치지, 시야까지 탁 트였잖아.”

둘이 머무는 영향루는 이름에 ‘향’ 자가 있었지만, 풀도, 꽃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구석지고 어두컴컴해 마치 감옥과도 같았다. 눈앞의 봉환루와는 전혀 비교할 수가 없었다.

“독채에다 시녀가 셋이나 시중들고.”

낙소만은 말하면 말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왜 그녀와 추억몽은 감금되고, 양준은 대우가 이렇게 좋은지 알 수가 없었다. 신분과 지위로 따지면, 그녀와 추억몽이 양준보다 훨씬 높았다.

“와, 욕조까지 있네. 추 언니, 이곳에 온 다음부터 목욕이라고는 해보지도 못했어. 온몸이 다 근질근질하단 말이야. 여기서 시원하게 목욕이나 했으면 좋겠다.”

봉환루에 들어서자 낙소만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부러운 눈빛으로 커다란 욕조를 보며 가련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추억몽마저 온몸이 가려운 것 같았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낙소만을 불렀다.

“소만아!”

“나쁜 자식!”

낙소만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앞에서 안내하던 운려가 뒤돌아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공자님은 사실 좋은 분이에요. 두 분께서 공자님께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잠시 후에 두 분께서 목욕할 수 있게 제가 말씀드릴게요. “

“싫어요. 혹시라도 그 녀석이 나쁜 마음을 품고…….”

운려가 방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공자님은 수련밖에 몰라요.”

“정말인가요?”

추억몽의 눈동자에는 이채가 반짝였다. 양준이 미색을 앞에 두고도 계속 수련만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끈기, 자제력, 자질은 상당히 좋군. 추씨 가문에 영입해 수련 자원을 지원하면 앞으로 큰 성과를 이룰 수 있겠는데.’

추억몽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언제 자유를 되찾을지 모르는 지금, 그런 생각들은 너무 일렀다.

‘자유를 되찾으면 꼭 영입해야지. 이런 젊은이는 아주 드물단 말이지.’

추억몽은 몰래 마음을 정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곧 2층에 이르렀다.

운려가 조용히 말했다.

“공자님은 안에 계세요. 잠깐 기다려 주세요.”

추억몽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운려가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리려고 하는 순간, 눈앞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곧이어 요염한 소녀가 세 사람의 눈앞에 나타났다.

“앗!”

벽락은 깜짝 놀라 멍하니 눈앞의 세 여인을 바라보다가 곧 이를 악물고 얼굴을 붉힌 채 그녀들 앞에서 후딱 종적을 감추었다.

벽락이 간 뒤, 한참이 지났지만 세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운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떨리는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녀는 차마 둘과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저… 공자님을 만나실 건가요?”

추억몽은 심호흡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운려는 다시 문밖에 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공자님, 추 낭자와 낙 낭자가 찾아왔습니다.”

“들여보내세요.”

운려는 잠깐 멈칫한 다음, 추억몽과 낙소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들어가세요.”

추억몽과 낙소만은 얼굴빛을 가다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들이 방안에 들어가자, 운려는 도망치듯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양준은 금과 옥으로 장식된 태사의(太師椅)에 느긋하게 앉아 옷차림을 단정하게 하고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살 판 나셨네. 미녀들이 시중까지 들어주고, 떠나기 싫겠는데?”

양준은 웃으며 추억몽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눈썹을 치켜세웠다.

“날 찾아온 게 부러워하러 온 건 아닐 거고. 간 보지 말고 본론만 얘기하지? 난 내 앞에서 꼼수를 쓰는 여자를 제일 싫어해.”

추억몽은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가 여길 떠날 수 있게 도와줘.”

양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그럴 힘이 있어 보여?”

“적어도 넌 실력이 봉인되지는 않았잖아. 시도는 해볼 수 있겠지.”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우리와 달라. 우리는 진원이 봉인되서 저들을 상대할 수 없어. 넌 능력도 되는데 평생 여기서 지낼 거야?”

그러고는 다시 입을 가리고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아니다. 넌 아무 근심 걱정도 없는데다 요미여왕이 뒷배가 되어 주잖아. 수련 자원도 걱정할 필요 없고, 미인들이 시중까지 들어주니 남자라면 떠나기 싫은 게 당연하겠지.”

“나한테 격장지계(激將之計) 같은 게 통할 거 같아?”

양준이 냉소하며 물었다.

추억몽은 눈살을 찌푸렸다. 양준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 솔직하게 말할게. 먼저 네 조건을 말해 봐. 어떻게 하면 도와줄 거야?”

“넌 왜 내가 너희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해?”

양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 여자는 너무 잘난 척한단 말이지.’

“너 요미여왕과 보통 사이가 아니잖아. 네가 여왕 앞에서 우리를 위해 몇 마디 말해 주면 될 거 아니야. 나와 소만은 여왕에게 있어 크게 가치가 없거든. 우리를 여기에 남겨 두어도 소용이 없잖아. 우리를 보내주면 추씨 가문과 자미곡에서 여왕에게 배상해 줄 거야.”

양준이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을 보고 추억몽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냥 말만 전하면 돼. 우리는 여왕을 만날 기회가 없어. 아니면 널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야.”

“나도 여왕을 만나지 못해.”

양준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럴 리가? 여왕이 너에게 그렇게 잘해 줬는데?”

추억몽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믿거나 말거나. 선경라는 지금 표향성에 없어. 여기 고수들하고 뇌정수왕의 영토로 간 것 같아.”

양준도 이 사실을 낙욱과 싸우는 날, 무심결에 신유 경지 고수들의 대화를 듣고 알게 된 것이었다.

“아니… 여왕도 없는데 그럼 넌 왜 안 떠났어? 정말 평생 이곳에 있을 거야?”

추억몽은 격양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데?”

양준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온통 적의가 가득했다.

“그건…….”

추억몽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래. 어디로 간단 말인가? 능소각은 이미 텅 비었을 것이고, 동문들도 모두 종적을 찾을 수 없으니… 저 녀석은 갈 곳이 없지.’

양준의 말에, 추억몽은 그의 현재 상황을 떠올렸다. 그리고 추억몽이 모르는 이유도 있었다. 양준의 체내에는 선경라의 추혼인이 있었다. 추혼인이 있으면, 양준이 세상 끝까지 도망친다 해도 선경라가 그를 찾을 수 있었다.

“나하고 같이 추씨 가문으로 가지 않을래?”

추억몽이 진중한 표정으로 제안했다. 눈에는 진정성이 넘쳐났다.

이는 기회였다. 추억몽은 양준과 선경라 사이가 겉보기와 같이 가깝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만약 이런 때에 좋은 조건을 내걸어 양준을 포섭할 수 있다면 이는 추씨 가문에 인재를 영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추억몽은 결단력이 있어서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무슨 그런 농담을 해?”

양준은 냉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냉소했다.

“진심이야. 우리 가문에서 여기보다 더 좋은 대우를 해줄 수 있어. 수련 자원이며, 시중 들어줄 미인이며, 없는 게 없어.”

추억몽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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