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6장. 고의는 아니었어
"안에 있던 사람이 되돌아 나와서 사령을 죽였을 가능성은 희박해. 하지만 밖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꼭 깨끗하게 처리해야 해."
도양은 형형한 눈빛으로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녀석인 것 같아. 게다가 수련한 공법이나 무공도 아마 이곳의 사령을 제압하는 데 최적인 듯해. 아니면 실력이 아무리 높아도 이렇게 빠를 수가 없거든."
다른 세 명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더는 양준을 얕보지 못했다.
*양준은 정령병을 들고 눈앞의 사령 본원을 담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봐도 정령병이 본원을 빨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의문이 들어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정령병도 한계가 있어 무제한으로 사령 본원을 흡수할 수 없는 듯했다.
양준은 고개를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사령 본원을 손바닥에 흡수한 다음, 경맥 안에서 몇 바퀴를 돌렸다. 순수한 진양원기가 돌면서 사령 본원이 빠르게 정화되고, 기운으로 바뀌어 금신에 흡수되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쉬웠다.
기운을 흡수한 금신에서 이상한 느낌이 전해졌다. 금신은 이런 기운을 굶주리고 있었던 듯 끊임없이 탐하고 있었다.
역시 이곳의 기운은 금신의 입맛에 맞았다. 이에 양준은 저도 모르게 화색이 돌았다.
지난번, 낙욱의 자색 사화를 흡수할 때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양준은 이곳이 금신의 명당일 거라고 짐작했었는데, 이제 보니 과연 그의 생각대로였다.
사령 본원을 흡수하는 것이 생각보다 간단하자, 양준은 아예 정령병 속의 본원 스무 개를 모두 경맥에 흡수했다. 이내, 양준은 십 분도 안 되어, 사령 본원을 모두 흡수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기운들은 양준의 실력을 향상시켜 주었을 뿐, 다른 각성 같은 것은 없었다. 심지어 신식의 힘도 강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양준은 빙그레 웃었다. 이만하면 만족할 만했다. 흉살사동 안에는 원래부터 특수한 사령의 본원이 적었고,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운에 달려 있었다.
양준은 계속해 앞으로 나아가며 탐색하려 했다. 바로 그때, 의념이 발동되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한쪽 방향을 바라보다가, 곧 표정이 이상해졌다. 양준은 미간을 좁힌 채 잠깐 생각하고는 그쪽 방향으로 달려갔다.
반 시진이 지나, 귓가에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쪽에서 각종 빛과 무공이 번쩍이고 있었다.
빛을 따라 바라보니, 그쪽으로 적지 않은 이들이 보였다. 모두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고, 아름다운 소녀의 지휘 하에 사령 몇 개와 싸우고 있었다. 그들이 시전하는 무공은 모두 사악했다. 또한 모두 두 손이 창백하고 차가운 냉기를 내뿜고 있었다. 수시로 누군가 귀신 얼굴 모양의 무공을 펼쳤고, 귀신 얼굴은 흉악하게 울부짖으며 사령과 엉켜 싸웠다. 귀신 얼굴 모양의 무공은 어떤 면에서 사령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똑같이 흐릿한 오관을 가지고 있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편이었다.
양준이 신경 쓰이는 것은, 지금 그들이 상대하는 사령이 그가 앞에서 만난 사령들과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가 만난 사령들은 모두 녹색이었으나, 지금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피처럼 검붉어 더 오싹해 보였다. 게다가 붉은색 사령의 실력이 녹색 사령보다 훨씬 더 강했다. 몸뚱이마저 녹색보다 훨씬 더 단단해 보였다. 때문에 이 무리는 도양 일행보다 몇 명이 더 많았으나, 단시간 내에 사령을 이길 수 없었다.
붉은색 사령 4~5마리가 주위에 모여서 수시로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울부짖음 속에서 그것들은 공명이라도 생긴 듯이 행동을 함께했다. 일격에 적중하지 못하면 잠시 물러나는 등 녹색 사령보다 훨씬 더 상대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무인들이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다. 잠깐 대치하다 붉은색 사령의 몸뚱이가 점점 어두워졌다. 그중 하나가 죽자, 승산은 완전히 무인들 쪽으로 기울었다. 귀신 얼굴 모양의 무공이 거듭 펼쳐지면서 파죽지세로 붉은색 사령들을 공격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붉은색 사령 한 마리가 죽기 전에 그들을 빙 돌아 곧장 양준에게 달려들었다.
양준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는 피하지 않았다. 그 역시 붉은색 사령의 전투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터라, 한쪽 손에 진원을 주입해 붉은색 사령 쪽으로 내밀었다.
양준의 일격에 붉은색 사령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천지 간에 흩어지고 사령 본원만 양준 앞에 떠다녔다. 그것은 양준이 전에 얻은 것들보다 기운이 훨씬 강했다.
양준은 사령 본원에 손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방금 전 삼킨 기운 덕에 금신이 구미가 당겼는지 흡입력이 생기며 곧바로 눈앞의 사령 본원을 체내로 빨아들였다. 양준이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쪽 무인들은 양준이 일격으로 사령을 죽이자 모두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바로 본원마저 빨아들이자 모두들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이봐, 친구. 욕심이 과한 거 아니야?"
곧 잘생긴 청년 한 명이 나서서 양준을 바라보며 일갈했다.
"아, 미안해. 고의는 아니었어."
양준은 본인이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구태여 변명하지 않았다.
"고의가 아니야? 우리의 몫까지 다 흡수해 갔으면서 고의가 아니라고?"
그 청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금 전에 양준의 재주에 놀라긴 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들은 7~8명이었고, 하물며 양준이 말한 이유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남의 눈앞에서 날치기를 하다니. 이게 고의가 아니고 뭐야?'
그의 말을 듣자 다른 이들도 모두 앞으로 걸어 나와 음침하게 양준을 훑어보았다.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오직 꽃다운 나이의 소녀만이 사색이 되어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경악스러움이 떠올랐고, 몸도 저도 모르게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과거의 끔찍하고,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 떠올랐다.
"그럼 시비를 가려볼까. 우리 귀왕곡이 큰 종문은 아니어도 만만하게 보면 큰 코 다친다."
우울한 표정의 청년이 냉소하며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보상할게."
"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그 청년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됐어. 그럴 필요 없어."
양준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들 뒤에 숨어 있던 소녀가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그녀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공포감은 이미 사라지고 담담하게 양준을 바라보았다.
"사매……!"
그 청년이 소녀를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아는 사이야. 그런 거 따지지 마."
소녀는 냉담한 표정으로 양준을 바라보다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문득 유명산에서 자맥과 함께 양준을 유혹했던 황당한 짓거리가 떠올랐다.
'참, 그땐 자맥 그 멍청한 애 말을 듣고 양준이 말 못할 병이 있는가 했지. 그래서 쟤 좋은 일만 잔뜩 했잖아.'
"저놈을 알아?"
청년은 점점 더 오리무중에 빠져 소녀와 양준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 내 은인이야."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차가운 여인의 미소는 어딘가 억지스럽고 굳어 있었다.
"냉 낭자, 또 보네."
양준이 웃으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바로 귀왕곡의 냉산이었다.
자맥과 냉산의 머릿속에는 양준이 남긴 신식 낙인이 있었다. 때문에 거리가 너무 멀지 않으면 양준은 그녀들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었다. 양준은 이곳에서 냉산을 만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게 또 만났네."
냉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한편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양준은 유명산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려는 생각도 없고, 신식 낙인으로 그녀를 괴롭힐 생각도 없는 듯했다. 애초에 양준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냉산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했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 것을 확인하자, 귀왕곡의 제자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울한 표정의 청년도 적의를 거두어들였다.
"넌 먼저 사령 본원을 흡수해. 그걸 체내에 빨아들이고 재빨리 정화하지 않으면 위험하거든."
냉산은 양준에게 한마디 해주고는 다시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도 본원을 잘 챙겨. 그리고 사령에게 빈틈을 보이지 말고 주위를 경계해."
"알았어."
그들은 냉산의 말을 듣고 바삐 움직였다.
양준은 싱긋 웃고는 진양결을 돌렸다. 붉은색 사령의 본원에 내재된 기운은 확실히 녹색 사령보다 훨씬 강했다.
잠시 뒤에 양준은 온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 됐다."
"벌써? 사령 본원을 이렇게 빨리 흡수했다고? 제대로 정화하기는 했어?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면 잘못될 수도 있어."
음울한 표정의 청년이 놀라서 소리치며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이 냉산의 은인이라는 것을 알아서인지, 청년은 호의적으로 본원의 위험성에 대해 일깨워 주었다.
"난 양성 공법을 수련해서 괜찮아."
양준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렇군. 어쩐지 사령을 너무 쉽게 죽인다 했지. 그런 공법을 수련하고 있었구나. 그런 것도 모르고 깜짝 놀랐잖아."
음울한 표정의 청년은 얼굴이 환해지더니 큰 소리로 웃었다.
"난 심혁(沈奕)이라고 해. 아깐 미안했다."
"양준이라고 해."
상대방이 먼저 용서를 구하고 호의적으로 대하자, 양준도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의 잘못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