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8장. 소요종과의 협력
"나도 몰라. 나는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지만, 사부님께서 분부하신 거라 그냥 온 거야. 딱히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만약 정말 우리가 먼저 잡게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지 뭐."
냉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긴."
양준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한참을 걸어갔다.
그때, 양준의 눈동자가 번쩍 빛나더니 한 방향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잠깐!"
양준은 손을 뻗어 냉산을 잡았다.
"멈춰!"
심혁이 뒤쪽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재빨리 손을 들었다. 귀왕곡의 제자들은 곧바로 걸음을 멈추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왜 그래?"
냉산이 놀라서 물었다.
양준은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정신을 더 집중했다. 잠시 뒤, 그의 얼굴빛이 차가워지더니 번개처럼 날아갔다. 그는 날아가면서 온몸의 진원을 돌리는 동시에, 앞쪽으로 손을 뻗었다.
공중에서 마치 잔물결이 이는 듯하더니, 물결이 퍼져 나감에 따라 그림자 하나가 그들의 시야에 나타났다. 그자는 놀라움과 공포에 찬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양준을 바라보다가 급히 뒤로 물러서며 양손을 위로 들었다.
"이봐……."
양준은 잠깐 어리둥절해하다가 시선을 그의 창백한 두 손에 고정했다. 귀왕곡의 제자들 모두 이렇듯 양손이 소름끼치게 창백한 것이 특징이었다.
"양 형, 멈춰."
심혁이 급히 외쳤다. 심혁의 외침에 양준도 급히 멈췄다.
"우리 쪽 사람이야."
심혁과 냉산이 서둘러 달려왔다.
"알아."
양준은 계면쩍게 웃었다. 원래는 누군가 매복해 급습하려는 줄 알았는데, 귀왕곡의 제자가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그자는 하는 수 없이 신형을 드러낸 뒤, 경악에 찬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심혁이 다가오자 놀라서 물었다.
"아씨, 놀랐잖아. 저놈 정체가 뭐야?"
"냉 사매 은인이래."
심혁이 양준에 대해 간단하게 일러주었다.
그제야 양준은 귀왕곡 제자 정영(程英)이 앞에서 길을 탐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안, 내가 잠깐 오해했어."
양준이 정영에게 공수하며 말했다.
"너 대단한데? 은신 비보에 귀은(鬼隱) 무공까지 펼쳐서 사형, 사매들 중 누구도 내 은신처를 간파하지 못했는데, 한눈에 알아보다니!"
정영이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영은 완벽한 은신술을 가지고 있어, 그 혼자 앞쪽에서 길을 탐색했던 것이다. 또한 비보에 무공까지 더한 은신술은 일반적인 신유 경지 고수도 알아채기 힘들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정영은 물 만난 고기처럼 각종 정보를 염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직 신유 경지에 오르지 못한 양준이 정확하게 그의 위치를 간파하자, 귀왕곡 제자들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게. 양 형은 어떻게 알았어?"
심혁이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양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마 내가 남보다 좀 더 예민한가 봐."
"정말이야?"
정영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양준이 그렇게 말한 이상, 더 캐물을 수도 없었다.
냉산은 의혹이 담긴 눈초리로 양준을 훑어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듯했으나 더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너 신호를 보냈잖아. 뭐 좀 알아냈어?"
정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쓱 닦고는 흥분해서 말했다.
"아! 그 두 계집이……."
"뭐?"
냉산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여자로서 계집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아차… 그 두 여인의 종적이 드러났어."
정영은 멋쩍게 웃고 나서 신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완전 대박이야. 둘의 경지는 분명 그리 높지 않거든. 그런데 협공하면 실력이 대폭 향상되는 거야. 아마 특수한 공법을 수련한 거 같아. 소요종 바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나대다가 몇 명 더 죽었잖아. 여경(餘慶) 그 멍청이도 하마터면 거세당할 뻔했어. 그 모습이 아주 처참하기 그지없었어!"
정영은 발랄한 사람이었다. 말하는 한편, 아주 생동감 있게 아랫도리 쪽으로 칼을 날리는 동작을 하더니 흠칫 떨며 말했다.
"보는 내가 막 으스스했어. 휴!"
"흠흠… 정영 사제, 말 조심해."
심혁은 냉산의 얼굴빛이 별로 안 좋아 보이자, 서둘러 정영의 말을 잘랐다.
"허허……!"
정영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금세 또 입을 찰싹찰싹 때리며 발랄하게 말했다.
"알아, 알아. 내가 입이 싸가지고. 좀 맞아야 해. 사매, 화내지 마."
냉산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정영의 성정이 그러한 줄 알기에 더 말하지 않았다.
심혁은 안색이 바뀌더니 깨고소해하며 말했다.
"그래서 여경은 도대체 그게……."
정영이 살짝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말했다.
"안타깝게도 아니야. 하지만 보름 정도는 남자 구실하기 어려울 걸? 그래, 여경 같은 건, 맞아야지. 맞아야 해."
뒷말은 냉산에게 아부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아쉽군. 그 두 여인은 어떻게 됐어?"
심혁도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더 깊은 곳으로 도망쳤어. 안쪽에는 자색 사령이 있는데다 수도 많아서 아마 거의 한계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싶어."
정영은 표정이 엄숙하게 바뀌며 말했다.
"그랬구나……. 여경은 뭐래?"
심혁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물론 산 채로 잡아오라고 하지. 우리 보고 협력해서 먼저 자색 사령을 다 죽인 다음, 여자들을 잡자고 하더라고."
"제길!"
귀왕곡은 몇 년간 소요종에게 계속해서 손해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소요종이 차지하고 있는 황천지(黃泉池)가 귀왕곡 제자들의 수련에 큰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화가 나고 억울해도 그들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두 종문은 진작에 물과 기름의 관계였지만, 그렇다고 직접 싸울 수도 없으니, 가까스로 가느다란 균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냉산 일행은 이번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사부의 명을 받은 이상 소요종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경이 만약 두 여인을 사로잡으면 황천지를 한 달간 귀왕곡에 개방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한 달이면 귀왕곡 제자들의 실력은 크게 향상될 수 있었다. 냉산 일행 역시 이런 유혹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여경이 지금 귀왕곡 제자들에게 빨리 오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이용해 자색 사령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손실을 줄이려는 속셈임이 분명했다. 두 종문의 제자들은 오랫동안 교제하다 보니 서로 간의 수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심혁과 냉산이 여경의 속셈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이제 우리 어쩔 거야?"
정영이 심혁과 냉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심혁은 이를 악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냉산을 바라보기만 했다.
냉산은 냉소하며 말했다.
"당연히 우리도 안으로 가야지! 가서 그놈이 처참하게 당한 꼴은 구경해야지 않겠어?"
심혁도 금세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매 말에 일리가 있어."
귀왕곡 제자들은 의논을 마친 뒤, 곧장 정영의 안내 하에 앞쪽으로 걸어갔다.
가는 내내 주변은 조용했고, 사령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이미 다 죽인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걸어가니, 앞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인원은 귀왕곡 제자들보다 적지 않았다. 또한 근처의 흔적을 보아하니 방금 전에 전투를 치른 듯했다. 땅에는 혈흔이 언뜻언뜻 보였고, 시체도 몇 구 널려 있었다.
음울하고 사악한 외모의 얼굴빛이 새하얀 남자는 아랫도리 쪽이 벌겋게 물든 채 아무렇게나 땅에 앉아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고, 얼굴에는 원한과 독기를 가득 품고서 음험하고 악랄한 눈빛으로 흉살사동의 깊은 곳을 노려보며 연신 중얼거렸다.
"천한 계집들. 조만간 잡아들여 혼쭐을 내주고 말겠어. 감히 나를 건드려?"
어둑어둑한 빛 아래서도 그의 허벅지 한가운데 나 있는, 반 자 정도 되는 상처가 훤히 보였다. 상처에서는 아직까지도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남자의 앞에는 아름다운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약을 바르며 치료해 주고 있었다.
귀왕곡 제자들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냉산은 그 꼴을 보자, 시선을 돌려 버렸다. 반면 심혁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다가가 두어 번 훑어보고는 조롱하며 말했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니네. 뭘 그리 엄살이야."
여경이 금세 성을 내며 소리쳤다.
"제기랄. 그나마 운이 좋아서 타박상에 그친 거지. 두 계집이 꼭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여경은 여전히 분기탱천해 있었다.
양준은 고개를 들어 소요종 제자들을 살펴보았다. 이 종문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얼굴색이 새하얀 것이 기혈이 허한 모습이었다. 또한 모두 외모는 잘생겼지만, 허여멀건한 얼굴빛이 미적 감각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소요종 남제자들의 옆에는 모두 꽃같이 아름다운 여자들이 동반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얼굴빛이 하얗고 기혈이 허한 모습과 달리, 여인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발그스름하고 예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사랑을 듬뿍 받은 듯했다.
양준은 이 모습에 얼굴빛이 흐려졌다.
"너희 귀왕곡 제자들도 못생긴 편이지만, 소요종은 더 심하네."
양준이 냉산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누가 못생겼다는 거야?"
냉산이 버럭 하며 화를 냈다.
"어, 그게 난 너희들 손을 말하는 거야. 시체도 아니고 손이 왜 그리 하얘?"
"아무것도 모르면서. 몇 년 더 수련하면 다시 혈색이 돌아오거든. 우리 귀왕곡을 소요종 따위에 비교하지 마."
양준은 어깨를 으쓱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귀왕곡 제자들까지 왔으니 이제 그만 출발하자. 앞쪽에 자색 사령이 더 많을 텐데, 우리 소요종만의 힘으로는 통과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다 같이 힘을 합쳐야 해."
여경은 바지를 추어올리고는 일어서서 심혁에게 말했다.
"너희 소요종만 열심히 싸운다면 문제없지."
심혁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