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0장. 피난
앞쪽에 무슨 위험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뒤쪽과 양옆이 모두 막혀 버린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십여 리를 줄기차게 도망쳐서야 사람들은 멈춰 섰다. 모두 떨리는 눈동자로 앞쪽을 바라보았다.
앞쪽에는 자색 사령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서 귀신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영문인지 사령들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또한 사방팔방에서 더욱더 많은 자색 사령들이 이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양준조차 이런 광경에 깜짝 놀랐으니, 귀왕곡과 소요종의 제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양준이 진양결을 수련해 사령을 제압할 수 있다고는 하나, 이번에는 그 수가 너무나 많았다. 정말 한꺼번에 몰려들면 양준도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한순간 사람들은 절망감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눈빛을 한 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앞뒤 좌우가 모두 사령으로 차고 넘쳐 거의 막다른 길이나 다름없었다.
"양 형, 양 형!"
문득 멀지 않은 곳에서 다급히 양준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양준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양준이 흉살사동에 도착하자마자 만났던 도양이 땀투성이가 되어 그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지금 도양은 높은 축대 위에 있었다. 축대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으로 보였고, 커다란 돌기둥처럼 흉살사동에 우뚝 솟아 있었다. 축대의 맨 위쪽은 반들반들한 평면으로, 지면으로부터 칠팔 장 남짓한 높이였다.
도양의 옆에는 당황한 표정을 한 그의 동문들이 함께 있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또 하나의 축대가 있었다.
"다들 저쪽으로 가자."
양준은 눈앞이 환해지는 것만 같아 냉산 일행을 거느리고 그쪽으로 날아갔다. 여경 일행도 살길이 생긴 것을 보자 서둘러 뒤따랐다.
생사의 순간이라 양준은 이것저것 고려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진양원기로 앞에서 날아오는 자색 사령들을 날려 버렸다. 곧이어 수많은 사령들의 포위를 뚫고, 귀왕곡 제자들과 함께 도양이 있는 축대에 올라섰다.
축대의 면적은 그리 크지 않았다. 도양 일행 4명에, 귀왕곡 제자 7~8명이 더해지자 축대는 꽉 차 버렸다. 그렇게 비좁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소요종의 제자들까지 오르기는 무리였다.
축대에 오르자, 양준은 몸을 홱 돌려 차가운 눈빛으로 여경 일행을 지켜보았다. 다행히 그들도 주제 파악을 해 자리를 내어 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축대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비보로 방어하는 한편, 멀지 않은 곳의 아무도 없는 축대로 날아갔다.
그들의 비보는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서 찬란한 빛을 뿌렸다. 모두 화성(火性) 또는 전기가 번쩍이는 비보들로, 이런 비보로 공격해야만 사령을 제압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령들이 축대 아래에서 날아다니며 서로 공격하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축대 위는 전혀 공격을 받지 않았고, 모두들 축대에 어떤 현묘함이 있는지 궁금해했다.
"양 형, 또 보네."
도양이 쓴웃음을 지으며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도 그에게 공수하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별말씀을."
"너희들은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야?"
"양 형과 마찬가지로 쫓겨왔어……."
도양은 연신 헛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줄곧 양준의 뒤를 따라가다가 내내 사령 한 마리도 만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방향을 바꿔 양준과 다른 길로 갔고, 걷다 보니 어느새 자색 사령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어렵사리 혼자 있는 자색 사령을 만났으나 미처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변고가 생겼다. 등 뒤에서 한 무리의 사령들이 쫓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이곳까지 쫓겨왔고, 마침 누군가 일깨워 줘서 축대로 피난하게 된 것이었다.
"이곳에 우리 말고 다른 이도 있어?"
양준이 깜짝 놀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쪽과 일 리쯤 떨어진 곳에 가녀린 그림자 두 개가 또 다른 축대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평상시라면 이 정도 거리에서 양준은 머리카락까지 훤히 볼 수 있었지만, 땅속 깊은 곳에서 시야가 막혀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여인 둘이라는 것만 알 수 있는 정도였다.
"소요종이 쫓는 그 두 사람이야."
냉산이 그쪽을 한 번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양준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새로 사귄 친구야?"
도양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귀왕곡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양준은 전에 만났을 때, 혼자서 흉살사동에 들어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이들과 함께 있었고, 보아하니 방금 만난 사이 같지도 않아, 도양은 그들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예전에 알던 사이인데 여기서 다시 만났어."
양준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곳에서 지인을 만나다니, 이제 보니 양 형은 마당발이었군. 대단하네. 난 보기종(寶器宗)의 도양이라고 해."
"보기종이라고?"
심혁이 놀라서 소리쳤다. 냉산도 눈동자에 이채를 띠고 도양을 바라보았다. 모두 이 종문의 명성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만나서 반가워. 우리는 귀왕곡 제자들이고, 난 심혁이라고 해."
"심 형!"
도양은 빙그레 웃었다. 귀왕곡이 사종이라 해서 얼굴빛이 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양준도 의외라는 표정으로 도양을 바라보았다.
'보기종 출신이었다니!'
보기종은 특수한 종문으로 규모가 아주 작았다. 전체 종문의 제자가 백 명에 지나지 않아 삼등 종문에도 들지 못하고 최하위에 속했다. 그러나 명성만큼은 약왕곡 못지않았다.
약왕곡이 연단 종문이라면, 보기종은 연기(煉器) 종문이었다. 세상에 몇 점 없는 현급 상품 비보의 반은 모두 보기종에서 나온 것이었다. 보기종은 연기 기법이 독특하고 독창적이어서, 종문은 크지 않지만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보기종은 해마다 무기를 스무 개 정도만 제조했다. 그러나 모두 천급 이상 무기로, 여러 세력에서 필사적으로 사들이려고 했다.
보기종의 제자는 웬만한 소가문, 소종문의 가주, 종주보다 비보가 더 많을 뿐만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비보의 등급도 높았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보기종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모두 보물이라고 말했다.
전에 양준은 이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도양이 보기종 출신이라는 말에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역시 남달랐다. 그들이 입은 옷, 소녀의 장신구, 손에 든 무기, 그리고 허리춤에 단 옥패까지 모두 등급이 높은 비보였다.
도양이 신분을 속이지 않고 직접 보기종의 제자라고 말한 것은 아마 진심으로 여러 사람들과 잘 지내려는 뜻일 것이다. 도양의 솔직함에 양준도 더는 신분을 숨기고 싶지 않아 공수하며 말했다.
"난 능소각의 양준이야."
그의 말에 모두들 아연실색하며 양준을 바라보았다.
냉산은 양준이 이 말을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미리 짐작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헐!"
정영은 눈알이 당장 튀어나올 것처럼 놀라 소리쳤다.
심혁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오늘 참 여러모로 식견을 넓히는군."
그러고는 또 목소리를 낮추어 양준에게 말했다.
"너희 능소각이 대단하긴 대단해. 어찌 하나같이 다 인재야."
우선 사주가 능소각 출신이고, 지금 양준마저 능소각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양준이 사주와 같은 종문이라는 것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두 사람 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정말 고마워."
심혁이 정색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남정네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먼저 눈앞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지나 의논하고 인사는 나중에 하지? 진짜 너희들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하단 말이야."
결국 냉산이 나서서 일갈했다.
"그래, 그래, 맞아!"
보기종의 소녀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은 서로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양준이 눈썹을 찡그리며 도양에게 물었다.
"도 형, 먼저 왔잖아. 지금 상황에 대해 아는 거 없어?"
"우리도 잘 몰라. 우리는 사부님께서 무기를 제조할 용도로 사령 본원을 담아 오라고 해서 이곳에 온 거야. 어쩌다 보니 별 소득도 없이 변고가 생겨서 이곳까지 오게 됐어. 그리고 곧 너희들이 왔지."
"그래."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아래쪽을 지켜보았다. 아래쪽에는 사악한 기운이 마치 대지를 뒤덮은 먹구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자색 사령들은 그 속을 헤집고 다니며 살기를 삼켜 몸집을 단단히 하는 동시에, 다른 사령들과 맞붙어 싸웠다. 그 때문에 수시로 사령이 죽어 그 본원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아래쪽에는 사령 본원 열몇 덩어리가 생겼다. 게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죽은 사령이 점점 많아지면서 더욱 많은 본원이 생겨났다. 모두들 뜨거운 눈빛으로 본원을 바라보았지만, 감히 아래쪽에 내려가 거두려는 이는 없었다. 수많은 사령들이 공격하는 것도 문제지만, 저렇게 짙은 살기에 노출돼도 결코 좋은 결과가 없을 터였다.
"정말 알고 싶다면 차라리 저쪽에 있는 두 낭자한테 물어보는 게 나을 거 같아. 우리는 저들이 일깨워 줘서 여기로 대피한 거거든. 쟤들이 우리보다 아는 게 많을 거야."
도양이 말하면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심혁!"
여경도 두 여인의 은신처를 발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음험한 눈길로 한참을 보다가 입가에 의기양양하고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귀왕곡 쪽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들이 지금 당장 두 여자를 잡아오면, 황천지를 두 달간 개방해 주지."
심혁이 냉소하며 말했다.
"여경, 완전 미쳤구나. 지금 본인 목숨 하나 부지하기도 어려운데 남 해칠 생각을 하는 거야? 우선 어떻게 살아남을지나 생각해 보지 그래?"
여경은 오싹하게 웃으며 말했다.
"죽더라도, 저 계집들을 먼저 괴롭히고 죽을 거야."
"멍청한 자식!"
심혁은 침을 탁 뱉으며 경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저놈 하고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이번에 위험에서 벗어나면 다시는 상종하지 않을 거야."
냉산이 혐오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심혁과 여경의 대화를 들었는지, 일 리 밖 축대 위에 있던 두 여인이 경계심이 짙은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양준이 미간을 찡그리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내가 다녀와볼게."
"양 형, 위험해."
심혁이 놀라서 소리쳤다.
지금 사방팔방에 모두 사령으로 둘러싸여 있어 오직 축대 위만이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일단 축대를 벗어나면 어떤 위험에 부딪힐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