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9장. 태방산
심혁이 진지한 얼굴로 양준의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리며 말했다.
“어찌 됐든 이번 동행에서 우리 귀왕곡 사람들은 양 형에게 여러 번 목숨을 빚졌어. 나중에 양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부르기만 해. 다른 건 몰라도 여기 있는 형제들은 반드시 최선을 다해 도와줄 거야. 그 어떤 어려움도 절대 거절하지 않을게!”
귀왕곡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양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네 사람도 마찬가지야. 비록 우리는 잘 싸우지는 못하지만 나중에 비보를 만들고 싶다면 언제든지 보기종으로 와서 날 찾아.”
“좋아!”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왕곡이 이 근처에 있는데 양 형이 괜찮다면 우리 종문에 가서 며칠 놀지 않을래?”
심혁이 열정적으로 초대했다.
“가지 마.”
냉산이 싸늘하게 말했다.
“사매, 너무 야박하잖아.”
심혁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는 양준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냉산은 전혀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난 쟤를 위해 말한 거야. 네가 뭘 알아?”
냉산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쟤를 알아. 만약 쟤가 귀왕곡으로 간다면 내일의 태양을 볼 수 없을 수도 있어.”
심혁은 소름이 돋았다. 그제야 귀려와 능소각의 장문인 사이가 철천지원수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도양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도양이 웃으며 말했다.
“심 형이 말하지 않아도 따라가려고 했어. 나는 귀왕곡처럼 귀신을 키우는 곳이 무척 궁금했거든. 구경시켜 줄래?”
“바라던 바지.”
심혁이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헤어지자. 조심히 가라.”
냉산이 양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양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가자. 양 형, 두 낭자, 나중에 보자고요!”
심혁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양준과 호씨 자매에게 공수했다.
“잘 가.”
양준도 인사를 건넸다. 그는 귀왕곡과 보기종 사람들이 함께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사파라고 해서 다 나쁜 건 아니네.”
세 사람이 남았을 때 호미아가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호교아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양준에게 물었다.
“넌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양준은 망연한 기분이 들어 멍하니 생각해 보았다. 한순간 그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의 멍한 두 눈을 보고 있자니 호씨 자매는 왠지 마음이 아팠다.
눈앞에 있는 이 강하고 괴이한 남자에게서 더 이상 흉살사동에서 보여준 자신감과 의기양양함을 볼 수 없었다. 지금의 그는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가야 할 길이 어딘지, 집이 어딘지 모르고 있었다. 그의 이런 망연한 표정에 호교아와 호미아는 모두 마음이 시큰거렸다.
“먼저 창운사지를 떠나자.”
호교아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그래!”
양준의 눈은 금방 맑고 굳은 의지를 담은 눈으로 돌아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지만,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네는 어디로 갈 거야? 혈전방으로 돌아가게?”
“아니.”
호교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어. 그러지 않으면 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거야.”
혈전방과 풍우루는 능소각의 일에 연루되어 큰 세력의 핍박을 받고 이번 전쟁에 참여한 것이었다. 만약 지금 돌아간다면 혈전방만 시끄러워질 뿐이었다.
“그럼 혈전방의 다른 사람들을 찾아보자.”
호미아가 제안했다.
“이번에 혈전방에서 오십 명이 왔는데 아마도 그곳에서 싸우고 있을 거야.”
“네 뜻은 어때?”
호교아가 양준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을 따라갈게.”
양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도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 능소각의 상황을 알아보고 싶었다. 특히 능태허와 소안 두 사람의 행방이 궁금했다. 호씨 자매를 바라보던 양준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행색부터 바꿔야겠는데.”
“왜 그래?”
호교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희들은 소요종 놈들에게 찍혀 봤으면서 뭔가 느낀 게 없어?”
호교아는 순간 깨달음을 얻고 안색이 차가워졌다.
“예쁘게 생긴 건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 세상에 너희 같은 놈들이 많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왜 이런 고민을 하겠어? 건드린 사람도 없는데 곳곳에서 찍히기나 하고. 정말 짜증 나 죽겠어!”
말은 비록 이렇게 해도 호교아와 호미아는 양준의 제안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 창운사지였다. 바깥 세상보다 도사리는 위험이 훨씬 많았다.
변장을 마치자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용모는 가까스로 감춰졌다. 손에 적합한 도구가 없어 변장을 잘 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첫눈에 눈이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언니는 지금 얼굴에 먼지가 잔뜩 묻고 머리가 부스스하여 아주 지저분해 보였고, 동생은 얼굴에 여드름과 주근깨가 가득하여 보는 사람이 거북할 정도였다. 변장을 마친 자매는 서로를 바라보며 괴로워했다. 비록 아름다운 얼굴이 가려졌지만 요염한 몸매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려지지 않았다.
세 사람은 창운사지 내부에서 조심하며 움직였다. 최대한 사람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양준이 가진 신식의 힘은 이때 크게 도움이 되었다. 신식을 펼치자 주변 삼십 리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었다. 먼저 적이 있다는 것을 파악해야 위험이 닥치기 전에 호씨 자매를 숨길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호씨 자매는 창운사지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달 뒤, 먼지로 꼬질꼬질한 세 사람은 몇천 리의 길을 걸어서 드디어 창운사지를 벗어났다. 한 달 동안 싸우고 도망치며 길을 걸은 세 사람은 모두 몸과 마음이 극도로 지쳐 있었다.
다행히 길을 걷는 동안 목숨이 위험한 일은 별로 없었다. 가장 아슬아슬했던 것은 신유 경지 4단계의 고수를 마주친 것이었는데, 그는 양준의 신혼기에 중상을 입고 황급히 도망쳤다. 그 전투로 양준도 꽤나 다쳤다. 하지만 자매의 살뜰한 보살핌과 만약영액의 작용으로 2~3일만에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 한 달 동안 호씨 자매는 점점 더 양준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를 믿고 양준이 뭐라고 하든 반박하지 않았다. 공격성을 다분히 띤 호교아도 더 이상 양준을 2년 전처럼 무시하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동생과 함께 양준의 신기한 능력을 목격하고 양준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
이번 여정에서 양준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호교아는 자신과 동생이 어찌 되었을지 잘 알고 있었다.
*태방산(太房山)은 남북으로 이어지는 산맥으로,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았다. 원래 이 산맥도 수려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산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고 새들이 지저귀며 꽃향기가 그윽했다. 그러나 지금은 산맥 전체가 전쟁터였다.
산의 남쪽에는 창운사지의 세력이, 북쪽에는 창운사지를 포위 공격하는 세력이 집결해 있었다.
양쪽 세력은 산을 사이에 두고 산맥 전체를 전쟁터로 삼았다. 몇 달 사이 태방산은 심하게 파괴되었고, 곳곳에는 혈흔과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얼마나 많은 무인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양쪽 세력이 이처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은 다른 곳에서도 비일비재했다. 태방산은 전체 전선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었다.
창운사지에서 벗어난 뒤, 호씨 자매는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왔다. 혈전방은 이곳에 파견되어 싸우고 있었다. 애당초 그녀들도 이곳에서 싸우다가 고수들에게 쫓겨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창운사지로 숨어들었던 것이었다.
오는 길에 양준은 그녀들에게서 유용한 소식들을 알게 되었다.
태방산 쪽의 전쟁은 그리 중요하지 않기에 고수도 많지 않았다. 혈전방 외에, 풍우루도 이곳에 있으며 다른 몇몇 이등 세력과 함께 모두 일등 명문 세가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그 일등 명문 세가는 바로 향(向)씨 가문이었다.
이곳에 온 이들은 대부분이 이등 혹은 삼등 세력 출신으로 대한국 각지에서 몰려왔다. 때문에 향씨 가문 같은 일등 명문 세가가 절대적인 지휘권을 가지게 되었다. 설령 불복하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향씨 가문의 지위 때문에 그들이 내리는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방산 아래, 방어하기 쉽고 공격하기 어려운 구석진 곳에 허름한 거처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은 바로 창운사지를 포위 공격하는 무인들의 휴식처였다.
이날,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여로에 지친 모습으로 이곳을 찾아왔다.
세 사람이 접근하기도 전에 옷차림이 멀끔한 이들이 그들을 가로막고서 신분을 물었다. 그들은 양준과 호씨 자매의 실력이 그리 높지 않은 것을 보더니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관례적으로 물어보았다.
몇 쌍의 눈은 끊임없이 호씨 자매의 아름다운 몸매를 훑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몇몇은 입맛이 떨어지는지 눈에 혐오감까지 드러냈다.
양준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호교아와 호미아는 얼른 얼굴의 변장을 깨끗이 닦아내고 원래의 얼굴을 드러냈다. 한참 닦아 내자, 그녀들의 얼굴은 여전히 거무스름했지만 미인의 모습은 알아볼 수 있었다.
길을 막고 있던 몇몇은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물었다.
“혈전방 호씨 가문 낭자들인가요?”
“그래, 맞아.”
호교아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낭자들이셨군요. 돌아오셨다니 다행입니다. 들어가시죠.”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기쁜 표정으로 흥분하며 말했다. 그는 말하면서 몸을 비키더니 겸손하게 말했다.
“확인을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