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4장. 사과해
호미아는 양준을 걱정하다 보니 향초의 호칭을 신경 쓸 사이도 없이 서둘러 방금 전에 발생한 일을 빠짐없이 말해 주었다.
“사실이야?”
향초는 다 듣고 나서 뇌광과 비홍원 사람들에게 한마디 물었다. 그들은 어찌 대답할지 몰라 잠깐 주저하다가 모두 각자의 고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향초가 냉소하며 물었다.
“왜 아무도 대답하지 않지? 내가 묻잖아.”
모두들 얼른 고개를 숙이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향초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사영과 여부가 잘못했네. 우리는 서로 다른 종문이지만 이곳에 온 이상, 다 함께 창운사지와 싸우면서 서로 도와야지. 도발도 너희가 먼저 했으니 이 친구가 나서는 것도 당연하고, 실력이 모자라서 당한 걸 누굴 탓해. 어서 일어나서 풍우루와 혈전방에 사과해.”
“사과하라고요?”
이 말을 들은 뇌광과 비홍원의 고수들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젊은이들도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향초를 바라보았다.
양준은 눈빛을 반짝이며, 입가에는 미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향 공자……!”
사영은 이가 여러 개 빠져, 말하면 발음이 샜다. 그는 굴욕감이 극에 달해 향초에게 도리를 따져 달라고 한마디 외쳤지만, 향초의 매서운 눈빛에 얼른 뒷말을 삼켰다.
향초는 다정하게 웃으며 양준에게 공수했다.
“이게 다 내가 관리를 제대로 못한 탓이야. 괜히 혈전방과 풍우루 여러분이 억울함을 당하게 되었군. 이쯤 되면 너도 화풀이를 다 한 거 같은데, 내가 이렇게 사과했으니 저들을 봐주지 않겠어? 앞으로 더는 오늘 밤 같은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게.”
그는 웃는 얼굴로 공수 인사하며 사과했다. 말도, 표정도 진지하기 그지없었고, 태도 또한 우호적이었으며 정말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인 것처럼 행동했다.
향초의 저자세는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
혈전방과 풍우루의 젊은이들은 한순간 가슴이 후련했다. 그들은 양준이 방금 전에 당한 위험을 전혀 모르고, 이번 일을 그저 평범한 싸움으로 여겼다. 평소 그들을 비아냥거리던 사영과 여부가 크게 당한 데다가, 지금 향초가 그들을 두둔하고 있으니 불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방자기와 호씨 자매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양준을 힐끗 보았다. 그들은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양준은 뜨거운 눈빛으로 향초를 지켜보았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속내가 깊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진정으로 알 수 있었다.
방금 전, 이쪽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향초 뒤의 서 있는 두 고수는 처음부터 신식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향초 본인도 멀지 않은 곳에서 훤히 다 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걸어 나와서는 태연하게 연기를 하고 있었다.
‘역시 겉과 속이 다르고 웃음 속에 칼을 품은 놈이군.’
“분이 덜 풀렸다면 편하게 말해.”
향초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향 공자가 중재를 잘해 준 덕분에 불만 같은 거 없어.”
양준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잘됐네.”
향초는 무거운 짐을 덜어 낸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유쾌하게 웃었다.
“큰 일은 작게, 작은 일은 없었던 것처럼. 지금 같은 상황에 우리가 서로 겨냥할 필요는 없잖아. 우리의 적은 창운사지이니, 좋게 지내자. 먼저 사람을 놓아주는 건 어때? 지금 보기 불편한 건 확실하니까.”
“좋아!”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사람을 발로 차 그들의 종문 쪽으로 날려 버렸다.
사영과 여부는 마치 낡은 포대처럼 각자 세력으로 날아가 고수의 손에 안겼다. 이번 발길질에 둘은 또 늑골 몇 개가 부러졌다.
향초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양준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그에게 하하 웃어 보였다.
“이 자식이…….”
뇌광과 비홍원의 신유 경지 고수들이 분노해 소리쳤다.
“사과부터 하시죠.”
양준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찬바람이 일 정도로 서늘했고, 말투 또한 단호했다.
두 고수는 노기 어린 얼굴로 양준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향초에게로 돌렸다. 향초는 얼굴을 살짝 실룩거리다가 눈에 띄지 않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향초가 지시하자, 두 고수는 내키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체면을 구기고 나지막하게 사과했다.
“아까 일은 혈전방과 풍우루에게 미안하게 됐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단속 잘 할걸세.”
“그만 꺼져 주시죠.”
양준은 차갑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
“가자!”
뇌광과 비홍원의 고수들은 각자 사영과 여부를 안고서 제자들을 이끌고 서둘러 떠나갔다. 그들이 떠난 다음에야, 향초는 호씨 자매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이고는 점잖게 물러갔다.
모닥불 주위에는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이윽고 혈전방과 풍우루 제자들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존경하는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양준을 영웅으로 보았다. 이들은 각자 다른 종문에 속했지만, 이곳에 온 뒤로는 종문의 구분이 사라졌다. 모두 함께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양준이 강한 기세로 그들을 위해 화풀이를 해주자 그들은 흥분되고 사기가 진작되었다. 오직 관지락만이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호씨 자매는 살그머니 양준에게 다가갔다. 호교아가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는 어떻게 된 일이야?”
“별거 아니야.”
양준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방자기도 다가왔다. 그는 마음속으로 의심이 들었지만 더 캐묻지 않고 물었다.
“그럼 계속 마실까?”
“그래!”
*향초의 방 안.
뇌광과 비홍원의 고수들은 부상당한 사영과 여부를 잘 치료하게 한 다음, 바로 이곳으로 찾아왔다. 대문이 열리더니 향초가 성큼성큼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그의 뒤에는 장로 두 명이 양쪽에 나누어 조용히 서 있었다.
“향 공자를 뵙습니다.”
뇌광과 비홍원의 고수들은 서둘러 예를 올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만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향초는 그들을 힐끗 보고는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 녀석이 어떻게 멀쩡한 거지?”
뇌광과 비홍원의 고수들은 서로 마주 보더니 방금 전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보고했다.
향초는 다 듣고 나서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양준에게 쏜 신혼기가 튕겨 나간 것도 모자라, 역으로 그의 신혼기에 부상을 입었다고?”
두 고수는 얼굴을 붉히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뇌광의 고수가 부랴부랴 한마디 덧붙였다.
“이유가 억지스럽다는 건 알지만 거짓말이 아닙니다. 향 공자께서 한 번 확인해 보십시오.”
“알고 있어. 너희들을 의심한 거 아니야.”
향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돌아 뒤쪽에 서 있는 두 고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고수 한 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의 몸에 등급이 높은 신혼 비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한 명이 이어서 말했다.
“비보가 두 개일 수도 있지요. 하나는 방어용, 다른 하나는 공격용일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경지로 신혼기를 시전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흠, 내가 봐도 그래.”
향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미있네. 일반인이 가질 수 없는 귀한 신혼 비보를 몸에 지니고 있단 말이지?”
뇌광의 고수는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면 녀석을 한 번 더 염탐하러 가 볼까요?”
“당신들이 그럴 재주나 있어?”
향초가 콧방귀를 뀌었다.
“관지락만 잡아 둔다면 단정코 녀석의 머리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그 자식이 이미 경계하고 있을 거야.”
향초는 고개를 천천히 젓더니, 얼굴에는 불쾌한 빛이 서려 있었다.
“네.”
“참, 사영과 여부는 좀 어때?”
향초가 관심 어린 말투로 한마디 물었다.
뇌광과 비홍원의 고수들은 감격의 빛을 띠고서 얼른 대답했다.
“그 자식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더군요.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라서 조만간 회복할 것 같습니다.”
향초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에 있는 장로에게 눈짓했다. 그중 한 명이 뇌광과 비홍원의 고수들에게 병 하나를 던져 주었다.
향초가 말했다.
“이건 향씨 가문에서 특별히 제조한 상처를 치료하는 단약이야. 돌아가서 온수에 타 먹이면 열흘 정도면 회복할 거야.”
“고맙습니다. 공자님.”
두 고수는 기쁜 나머지 연신 감사를 표했다.
“그만 가 봐.”
향초가 손을 내젓자, 두 고수는 황급히 물러갔다.
“도련님!”
뇌광과 비홍원의 고수가 떠나가자, 향초 뒤에 있던 고수가 잠깐 주저하다가 말했다.
“그 젊은이에게 왜 그리 관대하셨습니까? 만만치 않아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도련님께서 저자세를 취할 필요까지는 없는 듯합니다.”
향초는 담담하게 한 번 웃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첫눈에 강자라는 게 느껴졌어. 그 녀석이 믿는 구석이 있는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걸 보지 못했어? 너희 둘이 모습을 드러냈는데도 그 자식은 여전히 냉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어. 결코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야.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히니, 우선 두고 보는 것으로 하지.”
“하지만 저희는 이제 곧 돌아가야 하고, 도련님께서는 호씨 자매의 마음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향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그전에 모든 일을 해결해야지. 이제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 힘들 테니까.”
오늘 일도 호씨 자매가 양준과 사이가 좋은 것을 보고 양준을 제거하려는 마음에서 벌인 일이었다. 그는 뇌광과 비홍원의 사람들을 시켜 도발한 다음, 양준을 죽이고서 다시 그들을 처벌하면 호씨 자매가 자신에게 감격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세상사가 다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양준이 이처럼 강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향초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피곤하니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지.”
두 장로는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향초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늘 밤 일은 급히 진행시키더니, 지금은 또 관심이 없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