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1장. 독수리 울음소리
사람은 겪어 보아야 아는 법. 시간이 오래되면 진심을 알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가장 어려운 때가 아니고는 한 사람의 진정한 품격과 성정을 알 수 없는 법이었다. 만약 지금 혈전방과 풍우루 사람들이 침묵을 택하고 그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다 해도, 양준은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신주의, 이 또한 처세술이었다. 현재 향씨, 남씨 가문이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혈전방과 풍우루는 그들과 전혀 대적할 수 없는 처지였고, 계속 강경하게 나간다면 결국 죽음밖에 없었다.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세 사람이 모두 그를 실망시키지 않자, 양준은 무척이나 기뻤다.
호씨 자매와 방자기는 상대방의 강력한 기세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여전히 견고히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음이 따뜻해지자, 양준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호씨 자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는 눈앞의 신유 경지 무인 넷을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향초와 남생을 바라보더니 씩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호씨 자매에게 속삭였다.
“걱정할 것 없어. 나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호교아와 호미아는 얼굴에 살짝 기쁜 기색이 서렸다. 양준이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생겨났는지 모르지만 그의 단호한 말투에 그녀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생과 향초의 얼굴빛이 저도 모르게 흐려졌다.
방 장로가 냉소하며 말했다.
“우리 쪽에 고수가 네 명이나 있는데 그런 허풍이 나오느냐?”
“덤벼 보시죠?”
양준은 도발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방 장로는 살기를 내뿜으며 눈도 깜빡하지 않고 양준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양준의 표정에서 당황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양준은 정말 믿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포위해.”
남생이 팔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는 양준의 방자함과 안하무인격 태도에 격노했다. 여태껏 어느 이등 종문의 제자가 감히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 적이 있겠는가. 그 눈빛은 바늘처럼 그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일류 명문 세가 공자로서 그는 당연히 도도함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남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뒤에 있던 두 고수가 쏜살같이 뛰쳐나가 양준의 등 뒤를 포위해 향씨 가문의 두 고수와 함께 협공을 펼쳤다. 신유 경지 7, 8단계 고수 네 명에게 둘러싸였지만, 양준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고, 눈빛이 조금 더 진중해졌다.
현재 그의 상태로는 신유 경지 두 명에게서는 무사히 탈출할 수 있지만, 네 명이면 약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짐작으로, 실제로 싸우다 보면 아마 좀 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격에 당하지 않는 한, 양준은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도망쳐 봐. 어떻게 도망치나 좀 보게. 주제 모르고 설치는 이놈을 무조건 죽여.”
남생은 험상궂은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며 매섭게 소리쳤다.
“예.”
향씨, 남씨 가문의 네 고수가 동시에 대답했다.
우렁찬 용의 울부짖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줄곧 양준의 머리 위에서 맴돌던 칠흑 같은 교룡이 천천히 꿈틀대기 시작했다. 교룡의 눈동자가 살기등등한 빛을 내뿜었다.
남생은 혈전방과 풍우루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흉악하게 웃었다.
“십 분의 시간을 주지. 당장 마두의 곁을 떠나라. 좀 있다 싸우기 시작하면, 흐흐흐…….”
향초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재빨리 말했다.
“너희들도 너무 고집부리지 마.”
“너희들이 사람을 너무 업신여긴 거야!”
호교아가 나지막하게 일갈했다.
향초는 낯빛이 차가워졌다. 그가 호씨 자매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까지는 아니었다. 일등 명문 세가의 공자로서 어떤 절세미인을 못 봤겠는가? 미인은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자극제로서, 그는 미인을 추구하고 정복하는 과정을 즐길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향초는 문득 자신이 두 자매를 영원히 정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부아가 치밀었다. 그 감정은 곧 분노와 원한으로 바뀌었다.
그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시간 다 됐어.”
남생은 어두운 얼굴로 가볍게 일갈했다. 그는 눈빛으로 인파를 쓱 훑어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럼 시작해 보지!”
곧이어 고수 네 명은 온몸의 진원을 가동시키더니 사악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바로 이때였다.
하늘에서 우렁차고 맑은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소리가 어찌나 날카로운지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내재되어 있는 듯했다. 신유 경지의 고수들도 그 울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급히 올려다보았다.
하늘 높이 몇천 장은 되는 높이에서 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금빛은 순수하기 이를 데 없어 반사되어 나오는 광채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금빛은 사람들 머리 위 하늘에서 선회하면서 울어댔다.
양준의 안색이 이상해졌다. 그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금빛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일촉즉발의 전투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금빛 독수리 때문에 정지되었다.
“정말 멋진 독수리구나!”
남생은 눈에 이채가 반짝이더니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금빛 독수리가 수천 장 높이의 고공에 있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일반인이 아니라 시력이 좋아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금빛 독수리라…….”
향씨 가문의 서 장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머릿속에 어렴풋이 뭔가 떠올랐다.
“하하! 나 저거 잡아다 키울 거야.”
남생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처럼 멋지고 풍채가 좋은 독수리를 한 마리 정도 키우면 그야말로 체면이 서는 일이었다. 나중에 데리고 다니면서 잘 길들이면 큰 쓰임새가 있을 수도 있었다.
남생의 말에 양준은 저도 모르게 비웃으며 한마디 비꼬았다.
“네가 키울 수 있는 녀석이 아니야.”
남생은 무심코 그를 흘겨보며 냉소하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물었다.
“이런 요수를 본 적 있으시오?”
서 장로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들어 본 적이 있는 듯합니다.”
“어떤 요수인지 아는 건가요?”
향초도 독수리가 맘에 들어 급히 물었다.
서 장로는 미간을 잔뜩 구기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하늘에서 금빛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마치 무엇을 찾아내기라도 한 듯이 급해졌다. 곧이어 독수리는 금빛무리를 일으키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곤두박질하듯 급강하했다. 원래 어떻게 독수리를 잡아야 할지 궁리하던 남생은 이 광경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재미있네. 이 요수가 나와 인연이 있어 특별히 날 만나러 오는 건가?”
향초도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형이 이토록 좋아하니 나도 다투지 않을게.”
남생은 웃으며 양준을 힐끗 보았다.
“자식, 좀 더 숨 쉬게 해주지. 독수리를 잡은 다음에 다시 보자.”
“마음대로 해.”
양준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지켜보기만 했다.
“양준, 지금이 기회야. 어서 도망가.”
호미아가 몰래 다가와 말했다.
양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여기 남아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게 없어. 저들이 독수리를 잡고 나면 널 죽이려 할 거야.”
호교아는 초조하게 그를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저들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을걸.”
양준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가볍게 웃었다.
호씨 자매는 양준이 행동이 의아하기만 했다.
잠시 뒤, 금빛 독수리가 사람들에게서 몇십 장 떨어진 상공까지 내려왔을 때, 남생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곧바로 독수리에게 공격을 날렸다.
독수리는 늠름하고 용맹할 뿐만 아니라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두 날개를 휘젓자 금빛이 한가득 남생에게 날아왔다.
남생은 안색이 바뀌더니 급히 몸을 피하다가 곧이어 흥분해서 소리쳤다.
“5급 요수군. 장로, 도와줘.”
5급 비행 요수는 그야말로 보물을 주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인 5급 요수는 별 쓰임새가 없지만 비행 요수는 달랐다. 적의 상황을 염탐하거나 적을 추적할 수도 있었다. 만약 이 요수를 잡을 수 있다면 남생의 실력도 크게 향상될 수 있었다.
독수리의 재주를 알게 된 향초는 방금 전에 너무 대범했던 것이 후회되었다. 이런 독수리 한 마리가 많은 천재지보보다 더 귀중했다. 이미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으니, 눈을 빤히 뜨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금빛 독수리는 두 날개를 펼치면 길이가 한 장 남짓했고, 두 발톱은 강철처럼 단단해 일반적인 비보 무기에 못지않았다. 게다가 독수리는 천성적으로 수기(獸技)를 사용할 줄 아는 듯, 쏘는 금빛의 위력도 대단했다.
남생은 진원 경지 중 뛰어난 축에 속했지만, 이런 비행 요수를 잡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독수리의 실력을 확인하고서는 즉시 남씨 가문 두 고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두 고수도 머뭇거리지 않고 남생이 도움을 청하는 동시에 초식을 날렸다. 두 갈래의 흰 빛이 독수리에게 덮쳐 들었고 위력이 크지 않았지만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나는 것을 저지했다.
“안 됩니다.”
향씨 가문의 서 장로가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드디어 금빛 독수리의 정체가 떠오른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외쳤다.
남생과 남씨 가문의 두 고수는 그가 왜 저러나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의아하다고 생각만 할 뿐, 손놀림은 멈추지 않았다.
금빛 독수리는 두 고수가 날린 초식의 여파에 휩쓸려 거대한 몸집이 공중에서 몇 바퀴 돌다가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 독수리는 비록 5급 요수였지만, 인간으로 치면 기껏해야 진원 경지 무인에 불과했다. 신유 경지 고수의 습격을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잠깐 시간을 벌자 남생은 독수리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번개처럼 독수리의 앞으로 날아가서 큰 손을 내밀어 독수리를 잡으려 했다.
서 장로는 급한 나머지, 남생 앞으로 날아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남 공자, 안 됩니다.”
그는 소리치는 한편, 남생에게 가볍게 공격을 날려 그를 밀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