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0장. 너희들에게 빚진 게 없어
선경라의 이름은 함부로 언급할 수 없었다.
양준이 이토록 대담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두 혈시는 순간 놀라움에 표정이 변하고 말았다. 상대는 무려 추씨 가문의 큰아가씨 추억몽이었다. 그녀는 중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인물로서 각 명문가 공자들의 추앙을 받았다. 여태까지 누구도 감히 그녀를 이렇게 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양준에게 입이 막히고도 공격하지 않고, 약간의 몸부림만 칠 뿐이었다.
서로 마주 본 도봉과 당우선은 서로의 눈에서 흥분의 기색을 읽었다.
‘뭔가가 있구나!’
도봉과 당우선은 몰래 생각했다.
“이거 놔!”
추억몽은 몸부림을 쳐도 양준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웅얼거리며 소리쳤다.
양준은 협박의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보더니 그제야 천천히 손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난 너희들에게 빚진 게 없어. 너희들이 겪은 건 너희가 자초한 일이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매정한 자식!”
추억몽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사람들이 오해할 만한 말은 하지 마. 오다가다 만난 사이에 무슨 정이야!”
양준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추억몽은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항상 먹히던 방법들이 양준에게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만약 다른 중도의 공자들이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며 꼬리까지 흔들었을 것이다. 어찌 양준처럼 차갑게 그녀를 대할 수 있겠는가?
“너희들에게 물어볼 것이 많은데 어디 조용히 대화 나눌 곳이 없을까?”
양준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추억몽은 입을 삐죽거리다가 생각을 바꾸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따라와!”
근처에 있던 능소각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금 전, 추억몽과 양준의 대화를 듣지 못한 그들은 그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기류만 눈치챘을 뿐이었다.
‘추억몽이 양준과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게다가 사이도 좋아 보여.’
‘양준은 무슨 능력이 있기에 추씨 가문 큰아가씨 같은 인물과 아는 사이인 거지?’
*사람들이 떠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해홍진은 풀이 죽은 얼굴로 하늘에서 내려왔다. 오랫동안 쫓았지만 그는 금우응의 깃털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게다가 하마터면 금우응에게 긁혀 얼굴에 상처가 날 뻔했다.
땅에 내려온 뒤, 그는 양준 일행이 안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양준은?”
해홍진은 싸늘한 얼굴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추 소저께서 모셔갔습니다.”
옆에 있던 사제가 대답했다.
“모셔갔다고?”
해홍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모셔간 게 확실해?”
말을 꺼낸 사제도 눈치가 빠른 편이라 확신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추 소저께 불려 간 것 같습니다.”
해홍진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추억몽이 무슨 일로 걔를 불러냈지? 이곳은 내가 책임지는데 왜 그 녀석이 불려 간 거야?’
그는 호기심을 못 이겨 다급히 추억몽과 낙소만이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방 안에 추억몽과 낙소만은 양준과 책상 하나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방 안은 매우 간소했는데 별다른 가구도 없었다. 아마도 추억몽과 낙소만이 묵을 수 있게 서둘러 지은 것 같았다. 방 밖에서 도봉과 당우선은 문지기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
추억몽은 직접 차를 따른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를 넘기며 양준을 바라보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
“그녀가 너희들을 언제 풀어줬어?”
양준은 찻잔을 들고 물었다.
“한 달 전쯤이지.”
추억몽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양준이 말한 ‘그녀’가 요미대왕 선경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괴롭히지 않았어. 다만 우리를 데리고 전장으로 가서 한 바퀴 둘러보더니 결전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더러 떠나라고 하더군.”
“무슨 수확이 있었어?”
“많은 생각들이 바뀌었지. 하하.”
추억몽이 낮게 읊조리며 말했다.
“난 예전에 창운사지 사람들은 모두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해.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자칭 정의의 사도라는 사람들의 손에 잔혹하게 살해되는 것을 보았거든. 또 많은 외부의 세력들이 창운사지 내부에서 못되게 구는 것을 보았어. 그녀의 말이 맞아.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선과 악이 없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모두 사마가 있고, 누구나 사마가 될 수 있어. 다만 자신의 본심을 지킬 수 있는지를 봐야하는 거지.”
“맞아.”
양준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추억몽이 이렇게 생각을 바꾼 것은 드문 일이었다.
선경라가 그녀를 전장으로 데리고 간 것은 확실히 수확이 있었다. 어쩌면 선경라는 그녀가 추씨 가문의 역량으로 창운사지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바꾸게 하고 싶어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벌인 것일 수도 있었다.
“창운사지에서 나온 뒤, 난 이곳으로 왔어.”
추억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희 추씨 가문은 네가 무사하다는 걸 알아?”
“이미 서신을 보냈어.”
추억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미곡 쪽에도 서신을 보냈어. 백씨 가문의 경우는…….”
양준은 표정이 굳어진 채로 추억몽을 바라보았다.
추억몽은 나지막하게 웃더니 말했다.
“하하, 긴장할 거 없어. 백씨 가문에는 백운풍이 뇌정수왕의 부하에게 쫓기다 죽었다고 둘러댔어. 너와 그 여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다행이네!”
양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백운풍의 죽음이 그와는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만약 진실이 소문으로 퍼진다면 백씨 가문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 큰 세력들은 도리를 따지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능소각도 이런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억몽은 천천히 기지개를 켜며 날씬한 몸매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전에 말했잖아. 내가 만약 곤경에서 벗어난다면 반드시 너희 능소각을 다시 일으킬 것이라고! 하지만 내가 아직 그럴 능력이 없으니 먼저 여기를 재건하고 다시 계획을 세워 보려고 해.”
추억몽은 추씨 가문의 큰아가씨이기는 하나, 능소각을 다시 일으키는 일은 큰일이라 그녀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적어도 큰 세력을 이끄는 사람이 나서서 행해야 가능했다.
“이곳의 재건 작업은 네가 주관하는 거야?”
양준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니면 누구겠어?”
추억몽은 입을 다물며 웃었다.
“능소각이 사종으로 찍혔는데 내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이곳에 자재 조달을 하겠어? 난 먼저 이곳을 추씨 가문의 사업 중 하나로 두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능소각을 회복하려고 했어. 너한테 빚진 것도 갚을 겸.”
“이건 나한테 빚진 걸 갚는 게 아니라 너희 추씨 가문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양준이 냉소하며 말했다.
추억몽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도 맞아. 우리 추씨 가문에서 이곳에 불을 지른 거니까. 하지만 어찌 되었건, 이제 네가 돌아왔고 너도 배경이 있는 사람이니 이곳을 너의 사업으로 여기고 잘 해봐. 나도 더 이상 손대기 귀찮아. 양씨 가문 공자의 사업이라고 하면 누구도 뭐라고 하지 못할걸?”
양준은 당황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한참 생각해 본 그는 이것이 꽤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추억몽은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지었다.
“밖에 있는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야? 어디서 찾아온 거야?”
양준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 주변에서 찾았지.”
추억몽은 웃으며 턱받침 한 자세로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모두 근처의 두 종문에 의탁하고 있더라고. 난 두 종문의 고위층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들을 데려온 거고.”
양준은 순간 머릿속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풍우루와 혈전방에 의탁했던 제자들이었다. 다만 놀라운 것은 종문에 큰 위기가 닥쳤을 때 해홍진 같은 최우수 제자는 능소각을 바로 떠났지만, 이운천 같은 제자들은 꿋꿋하게 남아 있다가 마지막에 허공 통로를 통해 만 리 밖으로 도망을 쳤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고, 시간이 지나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양준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종문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도 그들의 자유였다. 그들은 풍우루와 혈전방에 의해 거두어졌다가 지금 또 추억몽이 나서서 그들을 되찾아온 것이었다. 추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꺼낸 말에 혈전방과 풍우루가 어찌 감히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자신의 종문은 스스로 재건해야 의미가 있지. 안 그래?”
추억몽은 웃으면서 기대에 찬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마치 양준이 칭찬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양준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낙소만을 바라보았다. 낙소만은 새끼 호랑이처럼 그에게 으르렁거렸다.
추억몽은 양준이 모르는 척하는 것을 알아채고 눈을 흘겼다.
“아 참, 너희들이 오는 길에 이 근처에서 이상한 느낌을 못 받았어?”
양준은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
“이상한 느낌?”
“응, 사기 같은 거 말이야.”
양준은 정색하며 말했다.
“아, 그거 말한 거야?”
추억몽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왔을 때는 보지 못했어. 하지만 네 동문 해홍진의 말로는 곤룡골 쪽에서 사기가 들끓었다고 하더라고. 원래 이 근처의 두 종문은 모두 이전하려고 준비 중이었다나 봐. 그런데 곤룡골 아래에서 뭔가가 그 사기를 삼키고 있는 것처럼 몇 달이 지나자 잠잠해졌대.”
“내려가서 살펴본 사람은 있어?”
양준은 저도 모르게 긴장되었다.
사기를 삼키는 것의 정체가 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양준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지마였다!
이곳에 돌아왔을 때, 양준은 신식을 펼쳐 느껴 보았지만 지마의 흔적이나 기운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도 지마는 이미 자신의 목적을 이룬 듯했다. 다만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 없을 뿐이었다.
‘이놈이 이번 기회에 내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건가?’
양준은 머리를 굴리며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지마는 진정한 마두였다. 신용이나 의리를 지키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더없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