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352화 (352/853)

제 352장. 추억몽의 평가

해홍진은 순간 몸이 나른해져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중도 양씨 가문의 직계 공자.’

단순한 몇 글자는 마치 화살처럼 해홍진의 마음 속에 박혔다. 그는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보잘것없던 사제가 이런 배경을 숨기고 있었다니!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몇 년 동안이나 사사건건 그에게 시비를 걸며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사실 나는 그를 시기할 자격도 없었구나. 분명 예전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을 텐데… 왜 날 죽이지 않은 거지?’

양준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해홍진은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풀이 죽었다. 이런 무시는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양준이 나를 봐준 것은 내가 그와 싸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야. 호랑이가 개미 한 마리가 하는 도발에 신경이나 쓰겠어?’

“허허…….”

실소를 터뜨린 해홍진은 갑자기 자신이 패배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곤룡골 아래 양준의 동굴 안.

오랜만에 동굴로 돌아온 양준은 익숙한 동굴 안 풍경을 보자, 소안과 하응상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종문이 무너진 지금, 이곳은 유일하게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동굴 안에는 아직 두 여인의 체향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돌 침대에는 소안과 즐겁게 보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응상도 이곳에서 잠든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아무리 불러도 깨지 않았다.

양준은 그녀가 자는 척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응상은 지나치게 부끄러움이 많아 양준의 장난에 어찌해야 할지 몰랐을 뿐이었다.

양준은 하응상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분명 약왕곡의 운은봉에서 소부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연단 기술을 연마하고 있을 것이다. 또 옆에 몽무애가 보호하고 있으니 그녀는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소안은?’

지난번에 헤어진 뒤로 양준은 소안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어디로 갔을까?’

양준의 무거운 기분과 눈빛에 드리운 우울한 마음을 읽은 것인지 두 혈시와 추억몽, 낙소만은 동굴 입구에 잠자코 서 있을 뿐,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 돌 침대에 앉은 양준은 매끈한 침대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지난날의 추억들이 하나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번에 떠난다면 앞으로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중도의 계승 싸움이 어떻게,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에서야 양준은 자신이 이곳을 꽤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가 지나고, 양준은 성큼성큼 동굴 안에서 걸어 나왔다.

두 혈시와 추억몽, 낙소만은 줄곧 바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봉과 당우선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추억몽과 낙소만은 지루한 얼굴로 한쪽에 기대앉아 있었다.

양준이 침착한 얼굴로 걸어 나오는 것을 보자, 도봉과 당우선은 깜짝 놀랐다.

지난밤, 그들은 양준을 보지 못했지만 안에서 전해지는 비통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양준의 모습은 이미 마음을 모두 추스른 듯 멀쩡해 보였다. 덤덤한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도 담겨 있었다.

도봉과 당우선은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 난 아래쪽에 한 번 다녀올게!”

양준은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고, 바로 동굴 입구로 걸어갔다.

추억몽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래쪽에 뭐가 있는데?”

그녀는 이곳에 온 지 한참 되었지만, 곤룡골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매우 궁금해하던 차였다. 능소각 제자들은 하나같이 곤룡골 아래쪽을 꺼려했고, 혈전방과 풍우루 사람들도 그녀에게 절대 깊게 내려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탓에 추억몽도 아래로 내려가려는 생각을 접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양준이 내려가겠다고 하니 그녀는 당연히 호기심이 일었다.

“하하…….”

양준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대충 얼버무리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쟤가 정말…….”

추억몽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양준을 쫓아가지는 않았다.

양준은 그녀를 데리고 내려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만약 그녀가 꿋꿋하게 따라간다고 하면 양준의 미움을 살 게 뻔했다.

눈 깜짝할 새에 양준은 곤룡골 깊은 곳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추 소저께서 양해해 주십시오. 우리 공자님께서 성격이 좀 급하십니다.”

당우선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양준과 알고 지낸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양준에게서 많은 장점을 발견했다. 이러한 장점들은 또래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당우선은 양준을 좋게 보고 있었다. 그래서 양준의 편을 들어 변명해 준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

추억몽도 양준의 성격을 알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도봉은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바라보더니 질문을 툭, 던졌다.

“추 소저께서는 우리 공자님과 오랜 친구 사이십니까?”

“하하, 내가 어찌 감히.”

추억몽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봉과 당우선은 저도 모르게 안색이 변했다. 추억몽은 신분과 본인의 자질 모두 중도의 젊은 일대에서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8대 가문의 공자들 모두 그녀와 알고 지내는 것을 영광으로 여길 정도로 그녀를 떠받들고 있는데, 양준에 한해 자신 없어 하는 그녀의 모습이 의아해 보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녀의 미소에 담긴 씁쓸함은 진심이었다. 도봉과 당우선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추억몽은 난처한 기색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

“나와 그는 그냥 알고 지내는… 그런 사이일 뿐이야!”

두 혈시는 순간 호기심이 생겼다.

도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약 불편하시다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추억몽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표정을 가다듬고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불편할 것까지는 없어. 알다시피 나는 사람들을 데리고 사주의 구체적인 정보를 알아내려고 능소각에 왔다가 그를 알게 되었지. 그때만 해도 우리는 적이었어.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너희들도 대충은 알 거라고 생각해.”

도봉과 당우선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능소각의 장문인이 장로 네 명을 데리고 추씨 가문과 백씨 가문, 자미곡의 신유 경지 고수들과 대전을 벌였던 일은 유명했다. 결국 장문인은 무사히 도망쳤을 뿐만 아니라 몇 사람에게 부상까지 입혔고, 그날의 전쟁으로 세상 사람들은 능소각에 신유 경지 이상의 고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곳이 있지……. 참 신기해.”

“신기하다고요?”

두 혈시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추억몽이 이렇게 평가를 내릴 정도면 그날 정말 알려지지 않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응, 신기해. 능소각은 신기한 종문이야. 너희 공자님도 아주 신기한 사람이고!”

추억몽은 웃으며 말했다.

그전까지 그녀는 세상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만 리나 떨어진 두 곳을 이어 놓은 허공 통로라니. 그녀는 자신보다 경지가 훨씬 낮은 남자가 자신을 속수무책으로 만들고 골탕 먹일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고, 또 양준이 짧은 한 달 사이에 요미여왕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게 될 줄도 몰랐다.

이제껏 추억몽은 스스로가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만약 사내로 태어났더라면 분명 추씨 가문의 다음 가주는 자신이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여인의 몸으로 태어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녀조차도 감히 양준과 대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남자의 잠재력은 어마어마했다. 만약 정말로 성장하기 시작한다면 그가 얻을 수 있는 성과는 지금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다. 양준이라면, 어쩌면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신기한데요?”

당우선은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차서 물었다.

“얼마나 신기하냐고? 하하, 정말 궁금하다면 직접 물어봐. 내가 말이라도 잘못 꺼내면 그에게 밉보일 텐데, 그런 짓을 왜 하겠어?”

“음…….”

두 혈시는 순간 당황했다.

추억몽은 그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고는 만족스러운 해답을 주지 않았다. 이런 답답한 기분은 사람을 괴롭게 만들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렇게 했다면 두 혈시는 양씨 가문의 고문을 들이밀어서라도 솔직하게 까발리도록 했겠지만, 상대가 추억몽이니 그들도 별수 없었다.

이내 추억몽이 갑자기 정색하더니 말을 덧붙였다.

“많은 얘기를 해줄 순 없지만, 한 가지는 알려 줄 수 있어. 절대… 절대… 절대 너희 공자님을 얕봐서는 안 돼!”

도봉과 당우선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추억몽이 한꺼번에 ‘절대’를 세 번이나 말하며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무슨 의미겠는가? 이것은 추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양준을 인정한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양준을 아주 좋게 보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를 얕보는 사람들은 모두 막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추억몽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도봉은 얼굴을 씰룩거렸다. 갑자기 추억몽에게 놀아난 기분이 들었다.

당우선은 눈썹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추억몽이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못을 박듯 얘기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추억몽이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우선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추억몽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대수롭지 않게 질문을 던졌다.

“이번 양씨 가문의 계승 싸움에 혈시들도 참가하나?”

도봉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저희도 잘 모릅니다. 가문에서 아직 이야기된 게 없어서요.”

“만약 내가 너희 입장이라면 난 무조건 양준을 따를 거야!”

추억몽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도봉과 당우선은 단언하지 않고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추 소저, 충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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