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8장. 더는 날 염탐하지 마
양준이 세 번 묻고 나서야 도봉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미미한 내상일 뿐입니다. 공자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그는 또 왈칵 피를 토했다.
이게 어찌 미미한 내상일 뿐이겠는가?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치료약은 있어?”
양준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공간에는 아직 치료약이 남아 있었지만 그 단약은 예전에 능태허가 양준을 위해 준비한 것으로 등급이 높지 않았다. 도봉과 당우선은 양씨 가문의 혈시로서 양씨 가문에서 제련한 단약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것들은 양준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등급이 훨씬 좋을 것이다. 그래서 양준은 자신의 것을 내놓지 않았다.
“예.”
당우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봉과 함께 품에서 약병을 꺼냈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갈색을 띤 현단 한 알을 입에 넣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아까운 듯한 표정이 드리웠다. 이 갈색의 현단은 혈시들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단약으로 현급 하품에 속했다. 일반적인 상처는 모두 치료할 수 있었다.
이런 단약은 아주 귀중한 탓에 혈시라고 해도 한 사람당 한 알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지금 이것을 복용하는 것이 못내 아까웠다. 하지만 그들의 임무는 바로 양준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었다. 재빨리 상처를 치료하지 못해 변고라도 생긴다면 큰일이었다. 그래서 아까운 것도 무릅쓰고 단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과감하게 현단을 삼켰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은 양준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단약을 복용하고 나자, 양준은 다급히 땅을 발로 밟아 핏자국을 덮었다.
다음 순간, 여량이 여씨 가문의 고수들을 데리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여량은 다급한 안색으로 물었다.
방금 전, 여씨 가문의 고수들은 양준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큰 소란이 난 것을 알아채고, 다급히 달려온 것이었다.
그들은 양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마음을 졸였다. 만약 양씨 가문의 공자가 여씨 가문에서 일이 생긴다면 아무리 추씨 가문이라는 뒷배가 있다 해도 여씨 가문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양씨 가문의 오만한 성격상 여씨 가문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릴 것이 분명했다. 가문의 존망에 관련된 일인데 여량이 어찌 다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봉과 당우선은 진원을 살짝 움직여 얼굴에 혈색을 띠게 하였다. 기운이 넘쳐 보이는 것이 전혀 다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괜찮아요.”
양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도봉과 당우선에게 무공을 보여달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큰 소란을 일으킨 모양입니다.”
“무공을요?”
여량은 깜짝 놀랐다.
양준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심심해서 고수들의 무공을 보면서 답답함을 해소해 보고자 그랬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여량과 여씨 가문 사람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미간을 찌푸렸다.
곧이어 그들의 시선은 땅에 난 커다란 웅덩이에 머물렀다가 또 갈라진 흔적으로 가득한 주변을 둘러본 뒤 마음 속으로 두 혈시의 강한 힘에 혀를 내둘렀다. 단순히 무공을 선보이는데도 이렇게 큰 소리가 났는데 만약 정말로 결투를 벌인다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여량은 통쾌하게 웃어 보인 뒤 대답했다.
“양 공자님께서 이런 우아한 취미가 있으셨다니. 저희가 경솔했습니다. 계속하십시오.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양준은 점잖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여량이 떠나기 전에 양준은 또 소리를 내어 불렀다.
“여 가주님.”
여량은 움찔하더니 바로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양 공자께서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의 말투에는 어제의 조심스러움과 진중함이 없었다. 오히려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태도가 조금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양준은 그의 태도를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이곳의 경치가 수려하여 저와 두 혈시가 이곳에 며칠 더 머무르고자 하는데 혹시 불편하진 않으시겠죠?”
여량은 조금 뜻밖이라고 생각했으나 깊게 생각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양 공자께서 여씨 가문에 오신 건 여씨 가문의 영광입니다. 어찌 불편을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다행입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량은 다시 공수하고 사람들을 거느린 채 물러갔다.
그들이 떠나간 뒤, 양준은 고개를 돌려 십몇 장 밖에 있는 누각을 바라보았다. 누각 이 층에서 추억몽이 창틀에 팔을 걸친 채,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추억몽은 매끈한 턱을 살짝 들어올리며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낙소만도 웃음을 지으며 뭔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발견한 듯한 얼굴을 했다.
양준은 그녀들에게 입을 삐죽거리고는 두 혈시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 양준은 두 혈시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도봉과 당우선의 표정은 매우 복잡했다. 그들은 고민에 잠긴 얼굴로 양준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양준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옷을 다 갈아입은 양준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혈시는 시선을 교환하더니 그제야 눈을 질끈 감고 다가가 함께 바닥에 무릎을 반쯤 꿇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죄를 지었으니 공자님께서 벌을 내려 주십시오.”
양준은 그들을 힐끗 훑어보고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죄를 지었지?”
도봉은 난감한 얼굴로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저희가 경솔하게 행동하여 공자님의 여정을 지연시켰습니다!”
양준이 마지막에 여량에게 며칠 더 묵겠다고 말한 것은 도봉과 당우선이 편하게 상처를 치료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준 것이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두 사람은 양준에게 감격한 것이었다.
양씨 가문의 공자가 부하를 신경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들의 상처는 가볍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제때에 치료하지 않는다면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었다.
도봉이 말을 마치자 양준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당우선이 말했다.
“저희 때문에 공자님을 여씨 가문에 얕보이게 한 것도 죄가 있습니다!”
여량의 태도가 미세하게 달라진 것은 그들도 눈치챌 수 있었다. 여량의 태도가 왜 달라졌겠는가? 양준이 심심해서 두 혈시에게 무공을 보여달라고 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혈시들이 어떤 사람인가? 예로부터 양씨 가문을 충성심으로 지키는 고수들이 아니던가? 그들은 양씨 가문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하고 공로를 세웠다. 또 목숨으로 양씨 가문의 직계 공자를 구한 적도 있었다. 어느 세대든 혈시들은 자신의 피로 큰 일을 반복해 왔고, 양씨 가문이 번성한 데는 혈시들의 공로가 크게 차지했다.
혈시들의 충성심은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때문에 외부 세력들이 양씨 가문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혈시라는 단체에 대해서는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대단한 혈시들이 고작 직계 공자의 답답함을 풀어주기 위해 무공을 겨룬 것이었다. 친형제처럼 사이가 좋아 평소에는 다투지도 않는 두 혈시가 쓸데없는 명령 때문에 서로에게 주먹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그들이 원숭이도 아니고 어찌 답답함을 해소하는 데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양준의 방탕함과 제멋대로 구는 성격은 이미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래서 여량의 태도가 눈에 띄게 바뀌었던 것이다.
양준이 책임을 다 떠맡지 않았더라면 그도 무시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일이 소문이라도 난다면 세상 사람들은 양준을 하찮게 여길 것이다. 이는 그의 앞날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래서 도봉과 당우선이 더욱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있느냐?”
양준이 가볍게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도봉과 당우선은 서로 마주 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일어나.”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혈시들이 자신의 주인에게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 너희들은 아직 나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으니 무릎은 그만 꿇어!”
두 혈시들은 그만 얼굴이 뜨거워졌다.
양준이 직설적으로 말했지만 그들의 심리를 잘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이번 여정에서 양준은 그들에게 놀라운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었다. 오늘은 더더욱 그들에게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그들을 복속시키고 충성을 바치게 하기까지는 조금 부족했다.
“나중에 너희가 나를 진심으로 따를 마음이 들면 그때 다시 무릎을 꿇어.”
양준은 평온한 기색으로 말했다.
도봉과 당우선은 민망한 얼굴로 일어났다.
도봉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여씨 가문에서는 더 이상 공자님을 좋게 보지 않을 텐데요…….”
“말했잖아. 나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그들이 날 어떻게 보든 상관이 없어! 날 얕본다고 해도 그들이 눈치가 없는 거지!”
양준은 씨익 웃고는 화제를 돌렸다. 곧이어 그의 안색이 차가워지더니 입을 열었다.
“너희 둘도 앞으로 더는 날 염탐하지 마.”
도봉과 당우선은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까 몸에 가해졌던 천지 간의 위엄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겁이 났다.
두 사람은 방금 전, 양준을 염탐한 일로 그가 기분이 언짢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간 안정을 취하면서 상처를 치료하도록 해. 내상이 낫는 대로 바로 중도로 떠날 거야.”
“네.”
당우선은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번 일이 있은 뒤로 여량은 양준에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여씨 가문의 장로들도 하나같이 이 양씨 가문의 공자는 큰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량이 아무리 현명하고 지혜로워도 양준의 위장에 깜빡 속아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금우응이 공중에서 날아와 양준의 어깨에 앉았다. 독수리는 구부러진 부리로 다정하게 양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양준을 따라다니는 동안, 금우응도 별로 고생하지 않았다. 여씨 가문에 오기 전에는 스스로 먹이를 사냥하기도 했다.
여씨 가문에 오니 음식 대접이 더욱 풍성했다. 매일 각종 신선한 고기를 먹이로 주니 나가서 사냥할 수고도 덜었다. 하지만 금우응은 산 것만 고집해서 매일 먹이를 먹을 때마다 그 광경은 조금 잔혹했다.
양준은 금우응을 바라보더니 손가락에 만약영액을 묻혀 금우응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동안 양준은 매일같이 금우응에게 만약영액을 먹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금우응은 더 멋지게 변했다.
하지만 양준은 금우응에 대해 다른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는 금우응이 6급 요수로 진화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