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0장. 단언하지 마십시오
여량은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양준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는 여씨 가문의 가주였지만 양준도 신분이 낮지 않아 아무리 화가 나도 그저 화를 참은 채 부드럽게 말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이 양 공자가 자신의 말뜻을 알아듣기를 바랄 뿐이었다.
‘서로서로 좋게 해결하게 빨리 알아들어.’
하지만 이 양 공자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머릿속이 얼마나 단순한 건지 여량의 말속에 담긴 뜻이 이렇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놀란 눈으로 물었다.
“왜 다른 곳으로 가야 하죠?”
여량의 이마 위로 툭 불거진 실핏줄이 꿈틀거렸다. 그는 마음속의 분노를 애써 가라앉히며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양 공자님께서 잘 모르시겠지만 이곳은 우리 여씨 가문의 고수께서 폐관 수련을 하시는 곳입니다. 평소에는 그분을 방해하는 사람도 없지요. 저희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고수께 방해가 될지 모르니 어서…….”
“고수라고요?”
양준은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 높여 말했다. 화들짝 놀란 모습이었다.
여씨 가문의 사람들은 표정이 더없이 어두워졌다.
‘이 녀석… 일부러 이러는 거지?’
양준은 전혀 모르는 척, 주변을 흥미진진한 눈길로 둘러보더니 한 바퀴 돌고 나서 웃는 얼굴로 여량을 바라보았다.
“실력이 얼마나 높은데요?”
“양 공자님!”
여량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그는 한계까지 참은 것이었다.
“자중하세요!”
여량이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든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이 여사가 폐관 수련하는 곳이 아니었다면 여량도 양준에게 함부로 정색하지 못했을 것이다.
양준은 잠시 멍해졌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은 다른 뜻이 담겨 있지 않고 아주 솔직했다. 다만 약간의 놀라움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곳이 여씨 가문의 중요한 곳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 고수가 있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힘들게 금우응더러 돼지를 이곳에 떨어뜨리게 한 다음, 기회를 봐서 이곳까지 뛰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양준은 이곳에 고수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라, 여량 일행이 다급히 나타났을 때에야 자신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여씨 가문의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도 어색해서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양준은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량 일행이 나타났을 때부터 그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결국 여량이 정색하자 그는 이곳에 누가 폐관 수련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여씨 가문의 유일한 신유 경지 이상의 고수!
그게 아니라면 여량이 이토록 긴장하며 신중할 리 없었다.
‘재미있군. 내가 관심 있어 하는 그것이 이 고수의 방에 있다니. 좀 어렵게 되었는데.’
양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포기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옆방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여량 일행은 온몸을 흠칫 떨며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급히 대문이 있는 곳으로 몸을 돌리며 인사를 올렸다.
“젊은이, 이리 들어와 얘기를 나누게나.”
방 안에서 노쇠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평범했는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금치 못했다.
양준은 눈을 빛내며 싱긋 웃고는 사양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량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더니 부러운 얼굴로 따라갔다.
방 앞까지 온 양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여량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여 가주님, 먼저 들어가세요.”
여량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여사 장로께서 공자님만 부르셨으니 공자님만 들어가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사람들과 흩어져 문밖을 지켰다. 그의 표정은 빈틈이 없었다.
양준은 그의 표정을 보고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간소했는데 심지어 침대도 없이 탁자와 의자만 있었다. 탁자 위에는 자사호(紫砂壺)만 있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하지만 양준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두 눈을 반짝거리며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방 안의 노인이 깔고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매우 직설적이었다.
방 안에 있던 노인은 여씨 가문에서 가장 경지가 높은 여사였다. 여사는 마른 몸매였고 머리와 수염이 하얬으며 기질이 능태허와 비슷했지만, 능태허처럼 덤덤하고 해탈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봤을 때, 고수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양준이 지금까지 두 번째로 본 신유 경지 이상의 고수였다.
실력이 신유 경지 이상에 이르면 사람들에게 속세를 벗어난 느낌을 주었다. 이런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현묘하기 그지없었다.
여사는 거대한 옥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이 옥은 전체적으로 금색을 띠었는데 빛이 옥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노니는 듯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침대의 형태를 하고 있어, 한 사람이 그 위에 누워 잘 수도 있었다.
그 위에 앉아 있는 여사에게서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옥 안에 숨겨진 기운은 아주 잔잔해, 양준이 그것과 일 장 정도 떨어져 있을 때도 원기의 파동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양준의 가슴팍에 있는 양원인은 끊임없이 뛰며 반응을 보였다. 양원인은 양성 속성을 띤 보물의 존재만 감응할 수 있었다. 양원인 덕분에 양준은 양성을 띠는 천재지보를 정확하게 찾을 수 있었다.
여씨 가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양준은 이 거대한 옥의 존재를 감지했다.
그래서 그는 도봉과 당우선에게 여씨 가문에 그의 흥미를 끄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양성을 띠는 보물이라는 것만 알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지금 보니 역시 실망스럽지 않았다.
이렇게 큰 천연 옥을 전부 단전 안으로 흡수한다면 실력이 바로 한 단계 진급할 수도 있었다. 단전 안의 양액은 흉살사동에서 사용한 뒤로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양액이 전부 소진된다면 양준은 금신 안의 사악한 기운을 억누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양액을 소진하게 되면 펼칠 수 있는 수단이 적어져, 지금 양준에게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양액을 보충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양성을 띠는 천재지보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씨 가문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양씨 가문에서는 그에게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을 것이다. 계승 싸움에 참여하는 자제들의 모든 인력과 물자는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얻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좋은 기회를 발견했는데 어찌 쉽사리 포기할 수 있겠는가?
다만 양준도 자신이 노리던 보물이 신유 경지 이상에 이른 고수의 침대일 줄은 몰랐다.
양준은 속으로 어떤 조건을 내걸어야 이 사람이 기꺼이 침대를 내놓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게다가 이것은 맨입에 달라고 하는 것과 같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양준은 속으로 마음이 복잡했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여전히 상대방이 깔고 앉은 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사는 양준이 들어온 순간부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 태연하게 무표정을 고수하다가 나중에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젊은이의 의도가 이토록 분명하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겠군!”
양준은 드디어 탐욕스러운 시선을 거두고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못 볼 꼴을 보였습니다!”
그의 꿍꿍이가 신유 경지 이상의 고수에게 진작 들통났다는 것을 깨달은 양준은 애써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는 말하면서 여사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문 밖에서 여씨 가문의 장로들은 하나같이 귀를 쫑긋 세우고 숨을 죽인 채, 안에서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듣고 싶어했다.
“양씨 가문의 공자는 역시 비범하군.”
여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찬사의 눈빛을 보냈다.
“역시 일등 세가 출신답구먼. 이런 기세와 진중함은 여씨 가문이 양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양준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장로님께서 칭찬이 과하십니다. 여씨 가문도 훌륭합니다.”
여사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는 그래도 신유 경지 이상의 고수였다. 중도 8대 가문의 공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를 봤을 때, 어느 정도는 조심스럽게 행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 젊은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들어오자마자 자신이 깔고 앉은 물건만 바라볼 뿐이었다. 바깥 세상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일등 세가 출신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토록 침착할 수 있겠는가?
“자네는 이것을 위해서 왔는가?”
여사는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렇습니다!”
양준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다만 그것을 노리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고, 와서 그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하하!”
“이것이 왜 필요하지?”
“필요합니다. 그것도 아주 급하게 말입니다!”
양준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이해하네.”
여사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이해는 하나, 줄 수는 없네.”
“그 점 또한 이해합니다.”
양준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럴 것이라고 진작 예상했던 것이다. 그는 곧게 앉으며 말했다.
“그래서 장로님과 조건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여사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자네가 양씨 가문의 공자라고 해도 난 이것을 넘기고 싶지 않네. 그러니 조건은 더더욱 얘기할 필요가 없지. 자네는 실망하게 되어 있네.”
양준이 고개를 저었다.
“장로님께선 섣불리 단언하지 마십시오. 세상 만물 중 장로님께서 혹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 없겠습니까? 제가 그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지가 관건일 뿐이지요.”
여사는 꿋꿋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씨 가문의 사람들은 밖에서 귀를 쫑긋 세운 채 듣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하나같이 표정이 이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