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0장. 뜻밖의 재난
양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살을 찌푸린 채 좌우를 둘러본 뒤, 다시 시체들을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의 은혈금우응을 바라보면서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씨 가문과는 상관없을 거야. 어쩌면 은혈금우응이 우리 위치를 노출시켰을지도 모르지. 이번에는 우리가 방심한 거야.”
추억몽은 양준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여량의 작태는 그녀를 불쾌하게 했지만, 어찌 되었든 여씨 가문은 추씨 가문에 줄을 대서 일어났고, 몇 년간 여씨 가문에서 추씨 가문에 좋은 물건을 적지 않게 공납했다. 때문에 추씨 가문 장녀로서 그녀는 여씨 가문의 안위를 보호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요놈의 자식!”
당우선은 이를 악물고 하늘에서 선회하는 금우응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양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랜 세월 동안 양씨 가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이들이 없었으니 너희도, 나도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거야. 이번 일을 경험 삼아 한 수 배운 거지.”
양준은 말하는 한편, 큰 소리로 휘파람을 불었다. 금우응이 곧장 급강하했다. 양준은 야릇하게 웃더니 추억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일은 여씨 가문이 꾸민 짓은 아니겠지만, 여량의 귀에는 들어갔으면 좋겠어. 그것도 추씨 가문을 통해서 말이야.”
추억몽은 양준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잠깐 생각하더니, 이를 악물고 얄밉다는 듯이 말했다.
“하,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하여튼 못됐어. 욕심도 적당히 부려야지. 진짜 못 살겠다.”
“잘못은 그들이 한 거야. 내가 능력이 부족해 보이는 모양이지? 이번 일로 교훈을 좀 줘야겠어.”
양준이 냉소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서, 그제야 사실 양준이 자신에 대한 여씨 가문의 태도에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여씨 가문의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까지 참아 줄 생각은 없었다. 그를 무시했던 이는 조만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둘의 수수께끼 같은 문답에 두 혈시와 낙소만은 어리둥절했다.
“언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천진하고 솔직한 낙소만이 이해되지 않아 추억몽에게 물어보았다.
도봉과 당우선도 그녀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 속에 도대체 어떤 비밀이 있어 추억몽이 이토록 양준이 한 말을 비웃는지 알고 싶었다.
추억몽은 쓴웃음을 짓고 도봉과 당우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나 말해 주자면, 너희 공자님은 원한은 반드시 갚는 사람이라는 거야. 너희는 아직 실감 못 하겠지만 말이야……. 자 들어봐. 여기까지 오는 길에 들른 곳은 여씨 저택뿐이야. 그런데 만약 여기서 기습받은 일이 여량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어?”
도봉은 잠깐 당황하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허벅지를 탁 치며 말했다.
“여량은 반드시 작은 공자님께서 여씨 가문에서 행적을 흘렸다고 의심할까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여씨 가문에서는 사람을 보낼 것입니다. 성의를 표하기 위한 선물을 들고서요.”
당우선은 입을 가리고 놀라면서도 흥미롭다는 듯이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순간에 양준이 그런 생각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선물들이 정말 중요하지!’
“심지어 그 소식을 우리 추씨 가문에서 전달해 준다면 어떻겠어? 여량은 당연히 추씨 가문이 이 사건의 중재자라고 생각하게 될 거야. 양준은 이번 일을 빌미로 한몫 단단히 뜯어내려는 속셈인 거지.”
추억몽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며 말했다.
도봉과 당우선은 놀라면서 감탄하는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두 혈시는 아무리 해도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일반인이라면 생명의 위험을 겪은 다음, 당연히 목숨을 건졌다고 안심하고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양준은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침착하게 아무 연관도 없는 이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 낼 궁리까지 하고 있었다.
‘공자님은 두뇌 회전이 정말 빠른 것 같아.’
‘여씨 가문 입장에서는 정말 뜻밖의 재난을 당한 거겠군!’
한순간 두 혈시는 여량을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여씨 가문의 가주가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설령 그가 알았다 하더라도, 그냥 재수가 없다고 한탄해야 할 것이다. 오는 길에 양준이 그의 저택에서만 머물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을 보낼 필요는 없고 물건만 보내면 된다고 여량에게 전해.”
양준이 담담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추억몽은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이지 그녀는 이런 양준을 상대하기가 싫었다.
“우선 여기를 벗어나고 마저 얘기하지.”
양준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손을 저었다.
키우기 힘들고 값비싼 답운구 다섯 필은 급류에 휩쓸려 자취를 감추었다. 다섯 명은 하는 수 없이 날아서 갈 수밖에 없었다.
당우선은 부상이 그리 크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도봉은 전혀 다치지 않았지만 한 시진이 지난 뒤, 패혈광술의 효력이 소실되면 전체적으로 기혈이 약해질 것이다. 두 혈시가 완전히 회복되려면 열흘이나 보름 정도는 걸렸다. 방금 전에 매복 기습을 당했던 터라, 그들은 눈에 띄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다섯 명은 한 산골짜기에서 쉬기로 했다.
양준이 직접 나가서 들짐승을 잡아왔다. 이렇게 되자 두 혈시는 더욱더 마음이 불편했고, 동시에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밤에 다섯 명이 둘러앉아 들짐승을 굽고 있었다. 분위기는 왠지 가라앉아 있었다. 두 혈시는 자신들이 실직한 것만 같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양준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온통 죄책감뿐이었다. 그리고 추억몽은 양준이 이 일을 빌미로 삼아 여씨 가문을 혼내 주려는 것에 화가 나 당연히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낙소만은 분위기가 이상한 것 같아 입을 꼭 다물고서 얌전히 있었다.
오직 양준만이 모닥불 옆에 앉아 일렁이는 불길을 덤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낮의 상황을 되새기며 모든 일을 하나로 연결시켜 그중의 가능성을 짐작해 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양준은 등을 꼿꼿이 펴더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자책할 필요 없어. 이번 일은 나를 겨냥한 것이 아니니까.”
“작은 공자님……!”
당우선은 입을 오므리고 부끄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양준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너희들을 위로하려는 게 아니야. 이번 일은 정말로 나를 겨냥한 게 아니야. 아마도 상대는 일찌감치 우리 동선을 파악하고 있다가 강에 매복하고 있었던 걸 거야. 우리가 남강을 건너려면 반드시 배를 이용해야 하고, 배를 이용해야만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질 테니까.”
그가 엄숙하게 말하자 몇 사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의 실력 배치는 확실한 목적성을 띠고 있어. 실력이 가장 높은 셋은 혈시들을 견제하고, 나머지는 양씨 가문 자제들을 죽이는 거야. 그들은 인원도 많고 실력도 괜찮았지. 나를 추격해서 죽이려 할 때도 사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어. 그러니까 그들은 나와 개인적인 원한 관계는 없다는 말이야.”
도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투 중에 실력이 가장 강한 자가 한마디 했었는데, 아마 양씨 가문의 모든 공자를 목표로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맞아! 우리는 그저 우연히 그들과 맞닥뜨리게 된 거지. 양씨 가문의 다른 공자들도 마찬가지로 습격당할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이고.”
도봉과 당우선은 저도 모르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양준이 이곳을 지나갔으니 망정이지, 만약 다른 양씨 가문 공자들이 이곳을 지나갔더라면, 자객들의 무공과 인원수를 봐서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자들의 실력이 어땠는지 주의 깊게 봤어?”
양준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고서 무언가 암시하듯이 물었다.
“경지 말씀이십니까?”
도봉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신유 경지 8단계, 7단계, 5단계, 3단계, 1단계 각각 한 명씩… 그 외는 모두 진원 경지였어. 신유 경지 무인들의 실력 분포에서 혹시 뭔가 이상한 점을 못 느꼈어?”
양준이 웃으며 물었다.
양준이 한마디 일깨워 주자 모두들 그제야 무엇인가를 눈치챘다.
“단계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도봉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단계가 이어지지 않아.”
양준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한 세력에 있는 고수들의 실력은 계단식으로 분포되어 있기 마련이야. 신유 경지 1단계, 3단계, 5단계, 7단계 고수가 있으면 반드시 2단계, 4단계, 6단계 고수가 있겠지. 양씨 가문 자제들을 습격하는 임무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 그 세력에서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을 거야. 당연히 인력을 남겨둘 리가 없어.”
그는 잠깐 숨을 돌리고 말했다.
“도봉과 우선은 그 셋과 싸울 때, 그들의 초식에서 어떤 종문인지 알 만한 단서는 없었어?”
두 혈시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고 도봉이 말했다.
“그자들은 혹여나 자신들의 정체가 탄로 날까 두려워 특별한 무공도 쓰지 않으면서 매우 조심하는 눈치였습니다. 서로를 대하는 것이 어색해 보였고, 손발도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들은 물론 서로 익숙하지 않을 거야. 내 예상이 틀린 게 아니라면 그들은 각자 다른 세력에 소속되어 있을 거야. 한 세력이 독자적으로 양씨 가문에 덤벼들 리가 없으니까.”
양준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 말씀은?”
“이 일을 계획한 자들은… 여러 세력이 힘을 합친 다음, 그중에서 고수를 선발한 거야. 금우응의 동선을 바탕으로 우리의 위치를 알아내 그곳에 매복한 거지.”
추억몽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되네. 실력 분포가 고르지 못한 점에 대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추론이야.”
여러 세력의 고수들이 모여 있고, 그중에서 일부를 차출했으니 이런 상황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