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6장. 어찌 벌써 나온 것이오?
양씨 저택.
두 공자가 먼저 돌아왔다는 소식이 금세 퍼졌다. 가문으로 돌아온 금우응 두 마리가 가장 큰 증거였다.
남녀 한 쌍의 그림자가 화룡지로 나는 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둘의 얼굴에는 긴장감, 기대감과 함께 자책감과 안타까움 등이 뒤섞여 있었다.
중년 남자는 그래도 괜찮았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건장한 몸이 저도 모르게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조금도 빈틈없는 얼굴에는 심지어 기쁜 표정까지 서려 있었다. 여자는 나는 듯이 달리면서도 연신 눈물을 훔치다 보니 눈가가 새빨개졌다.
한참 달리다가 중년 남자가 보다 못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소죽, 왜 그렇게 우시오? 아들이 돌아왔으니 좋아해야지!”
동소죽은 계속해 눈물을 훔쳤다.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울먹이며 말했다.
“울음이… 흑! 나오는… 걸 어떡해요? 훌쩍… 누군 울고 싶어서 우는 줄 아나…….”
양응봉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 모습을 준이가 본다면, 내가 당신을 울린 줄 알겠소.”
동소죽은 슬퍼하며 말했다.
“그럴 만한 짓도 했잖아요? 이참에 얘기해 봐요! 지난번 그 불여우는 어떻게 된 거예요? ‘오라버니, 오라버니’ 당신을 부르면서 눈빛도 보통 뜨거운 게 아니더만!”
불시에 공격을 받은 양응봉은 난감한 나머지 얼굴이 시뻘게져서 한참 동안 우물쭈물하다가 나지막하게 변명했다.
“그… 그건 오해요, 오해.”
“오해요?”
동소죽은 결코 넘어가려 하지 않고 애달프게 말했다.
“내가 열여덟에 양씨 가문으로 시집와서 당신이랑 이십 년을 넘게 부대끼며 살았는데, 이 나이가 되도록 남편이 다른 이와 놀아나지 않을까를 걱정해야 한다니. 이럴 줄 알았다면 중도에 와서 계승 싸움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결국 당신 같은 양심도 없는 남자를 만나서… 흑흑…….”
그녀는 말하는 한편, 눈가를 훔치며 몰래 양응봉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정말 오해요.”
양응봉의 이마에는 금세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동소죽도 이제는 젊지 않고 제법 부인 티가 났지만, 어떻게 된 건지 지금 보아도 열여섯 살 소녀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동소죽은 젊어 보일 뿐만 아니라, 성정도 활발해 가끔 소녀나 할 법한 말을 늘어놓거나 웃지도, 웃지도 못할 일들을 벌이곤 했다.
부부가 함께 외출하면 난처한 일들이 종종 발생했다. 잘 알지 못하는 이를 만나면 상대방은 항상 공손히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넷째 나리와 양 낭자를 뵙습니다.”
양응봉이 의아해하며 물으면, 상대방은 이렇게 대답했다.
“양 낭자라면?”
“이 분은 넷째 나리의 따님이 아닙니까? 역시 용은 용을 낳고, 봉황은 봉황을 낳는다는 말이 맞는 듯합니다. 넷째 나리 따님은 참으로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답고…….”
상대방이 추켜올릴수록 양응봉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반면 동소죽은 오히려 얼굴에 웃음을 띤 채 양응봉의 팔짱을 끼고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부하는 말을 아주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런 경우가 많아지자 양응봉도 경험이 생겨 무릇 낯선 집에 손님으로 가게 되면 집주인이 입을 열기 전에 자기소개를 했다.
“양응봉이오. 여기는 아내 동소죽이고.”
그러면 집주인은 의아해했다.
‘양씨 넷째 나리는 참 이상하군. 세상 사람들이 젊은 아내와 산다는 것을 모를까 봐 이렇게 사람만 만나면 인사시키는 건가? 아니면 양씨 가문 사람들의 성정이 다 이렇게 이상한 것일지도 모르지. 명문 세가 자제들의 생각을 우리 같은 일반인이 어찌 알 수가 있겠어.’
동소죽이 말하는 지난번 일이라는 것도 사실 삼 년 전에 있던 일이었다. 양응봉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여인은 진작 어디 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동소죽은 이를 물고 놓지 않으며 매번 울적한 일이 있을 때마다 꺼내들고 말했다.
그런데 양응봉은 성격이 무뚝뚝해 이런 수법이 먹혔다. 아무 잘못도 없이, 그냥 웬 여인이 그의 늠름한 풍채에 끌렸을 뿐인데도 매번 동소죽이 그 일을 꺼내기만 하면, 양응봉은 곧 당황해하며 연신 사과했다.
“정말 오해요. 그 여인이 힘들 때, 무심코 도와주었을 뿐이오. 사실 난 그 여인과 말을 세 마디도 하지 않았다오.”
양응봉은 옷소매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는 한편, 긴장해서 변명했다. 사실 이 일을 몇 번이나 설명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말? 당신, 저를 속인 건 아니죠?”
동소죽은 코를 훌쩍였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오. 앞으로도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오.”
양응봉이 단정한 태도로 우렁차게 다짐했다.
“좋아!”
동소죽은 눈물을 흘리다가 풋 웃고 말았다.
양응봉은 입을 벌린 채 무던하게 웃었다. 양준의 웃음과 꽤 비슷했지만 양준처럼 사악하거나 교활하지는 않았다.
“이 일을 아들에게 말하지는 않겠지, 당신?”
양응봉이 정신이 번쩍 들어 급히 캐물었다.
“음… 그건 당신이 하는 걸 봐서. 언젠가 기분이 안 좋으면 아들 찾아가서 이야기 나눌 거예요. 당신도 알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말 다 하게 돼 있어요.”
“큼큼큼!”
양응봉은 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들의 마음 속에 있는 내 멋진 모습이 다 무너져 내리겠는데… 이것 참 큰일이군.’
아들 이야기를 하자 동소죽은 얼굴빛이 좀 단정해지더니 중얼거렸다.
“밖에서 있는 동안, 얘가 며느릿감이나 데려왔는지 몰라?”
“없을 거요. 도봉의 말로는 준이가 홀로 돌아왔다고 했소. 그런데 그 애한테 호감이 있는 여인이 있다고는 하던데.”
“여자가 몇 명이래요?”
동소죽은 금세 흥이 나서 물었다.
“몇이라니? 하나만 있으면 되지. 그 녀석이 감히 바람을 피우면 정강이를 확 부러뜨려야지.”
양응봉은 짙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살기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동소죽의 얼굴에 서려 있던 기대감과 미소가 재빨리 사라지더니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기만 해 보세요. 제가 당신 다리를 분질러 버릴 거예요.”
양응봉은 목을 움츠러뜨린 채 속으로만 불만을 표했다.
‘아니, 나는 여자와 말 세 마디만 했을 뿐인 데도 삼 년을 내내 캐물어 놓고는. 왜 아들은 바람을 피워도 괜찮지? 이건 완전 이중 잣대잖아?’
화룡지 변두리에 있는 금지에 가까워지자 동소죽이 말했다.
“잠깐! 제 의복 좀 봐주세요. 어디 흐트러진 곳은 없어요? 머리는요? 괜찮죠?”
양응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선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그렇게 신경 쓰시오?”
동소죽은 입을 삐죽거렸다.
“아들 보는 게 선보는 것보다 더 중요하죠.”
양응봉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부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껴 역시 옷매무새를 고쳤다.
“나는 어떻소?”
“수염이 좀 많이 자랐지만, 그 정도면 괜찮아요.”
“음.”
양응봉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는 나란히 화룡지 금지 구역 변두리에 멈춰 서서 숨을 죽이고 짙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둘은 숙연한 표정으로 곧게 서서 기다렸다. 마치 대단한 귀인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한참 기다리다가 양응봉이 문득 말했다.
“그러고 보니 부인, 아들은 지금 화룡지에서 한참 신체 정화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오? 하루 이틀은 지나야 나올 텐데,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을 필요 있소?”
“돌아가 계실래요?”
동소죽이 제안했다.
“알겠소.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돌아가 일 처리를 다 끝내고 다시 오리다.”
양응봉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돌아 자리를 떴다.
몇 걸음 못 걸어서, 그는 등 뒤에서 살기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차갑고 음산한 기운에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양응봉은 몸을 흠칫 떨고는 황급히 발걸음을 멈추고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두 손을 뒷짐 지고 동소죽의 곁에 정색하고 서서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안 가고 뭐 하세요?”
동소죽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양응봉은 코를 훌쩍거리면서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여기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소. 크게 중요한 일도 아니니, 나중에 처리해도 문제없겠지.”
“저 혼자 기다려도 괜찮아요. 가서 일 보세요. 제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아들이 나오면 친정인 동씨 가문에 데리고 갈게요. 계승 싸움 같은 건 안 해도 되고. 얼마나 좋아요.”
동소죽은 다정다감하게 양응봉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오. 같이 기다리는 게 좋겠소.”
양응봉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반나절 뒤 화룡지 안.
양준은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화룡지는 그에게 아무 효능이 없어, 그는 진양결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평상시보다 조금 빠르기는 하지만, 크게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더 있는 척이라도 했겠지만, 부모님이 저택에서 손꼽아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양준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다른 한쪽을 슬며시 바라보니 양소는 여전히 신체 정화를 하고 있었다. 양준은 저도 몰래 고개를 저으며 화룡지에서 뛰쳐나왔다. 그는 허공에 머무르면서 진원을 돌려 몸의 수분을 증발시킨 다음 땅에 착지했다.
소정청 일행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양준을 힐끗 보았다. 그들의 말대로 화룡지는 한 사람의 자질을 검증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자질이 좋은 사람일수록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고 이득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그들 세 명은 여러 해 동안 이곳을 지키면서 적지 않은 양씨 가문 자제들이 화룡지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질이 가장 부족한 자제도 하루 밤낮을 버틴 다음 밖으로 나왔다.
‘근데 눈앞의 이 녀석은 들어간 지 반나절 만에 제 발로 걸어 나오네.’
양준의 이런 행동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들 세 명은 양씨 가문에서도 지위가 높기에 양준에게 좋은 낯빛을 보여 줄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그들 셋은 원래부터 양준을 좋게 보지 않았다.
“어찌 벌써 나온 것이오?”
그중의 한 명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면서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언짢았지만 따로 말하지 않았다.
“네. 어르신들께서는 더 분부할 일이 있으십니까?”
“없네. 이제 돌아가게나.”
소정청이 무심코 한마디 던졌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세 명에게 공수한 뒤 뒤돌아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뒤에서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양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