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7장. 널 기억해 두겠어
곽성진은 괴로워하기는커녕 흥분한 듯했다. 그는 양준과 말을 할 때 몰래 진원을 모으며 기회를 틈타 양준의 손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생사가 오가는 순간의 짜릿한 느낌에 그는 온몸의 피가 들끓는 것만 같았다.
그의 상태를 눈치챈 양준은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양준은 손에 든 적혈검에 힘을 실어 그의 목에 상처 자국을 냈다.
“젠장!”
곽성진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곽씨 가문의 곽성진이라고 분명 말했는데 감히 날 이렇게 대하는 것이냐?”
말을 하면서도 그는 겁을 먹었는지 다급히 모았던 기운을 흐트러뜨렸다. 뒤에 있는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목숨을 노릴까 두려웠던 것이다. 짜릿한 느낌도 좋지만 목숨이 더 중요했다.
“네놈은 누구냐?”
곽성진은 그제야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명성이 중도 전체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상대가 신분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찌 자신을 이렇게 대할 수 있겠는가?
신유 경지의 두 고수는 그제야 뭔가를 눈치챘다. 그중 한 명이 공수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께서는 양씨 가문의 몇 번째 공자님이십니까?”
젊은이는 낯선 얼굴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으로 보면 분명 8대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오직 이제 막 중도로 돌아온 양씨 가문의 공자들뿐이었다.
“양준입니다!”
“양준 공자님이셨군요!”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서둘러 공수하며 예를 올렸다.
양준은 차가운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이 말하는 사이, 아래쪽의 싸움은 이미 멈춘 상태였다. 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목이 겨누어진 것을 보았는데 현광회 사람들이 어찌 감히 움직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싸움을 멈춘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지 무리는 곤경에서 벗어난 뒤, 크게 숨을 들이쉬며 한데 모여 있었다. 그들은 놀란 눈빛으로 지붕을 보다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까지 대전 안에서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이던 새로운 주인이 자신들을 구하러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양준은 혼자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데도 양준이 그들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양준이 강하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방지는 자신이 양준의 능력을 낮게 평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선 저희 공자님을 놓아주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않겠습니다.”
신유 경지 고수 한 명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른 한 명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잠깐 생각하다가 적혈검을 거두어들였다. 그는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았다.
자유를 얻은 곽성진은 다급히 앞으로 몇 걸음 뛰어가더니 고개를 돌리고 양준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양준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젠장, 새파랗게 어린 놈이잖아! 너 몇 살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좌절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신을 제압한 사람이 자신보다 어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듯했다.
양준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봐, 내가 물었잖아?”
곽성진은 화가 나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도련님.”
신유 경지 고수는 하는 수 없이 곽성진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양준이 어떤 성격인지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곽성진이 양준을 계속 건드리는 것이 못내 불안했다.
“먼저 이곳의 상황을 정리해 보죠.”
양준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방지!”
양준은 아래쪽을 향해 손짓했다.
방지는 재빨리 날아와 공수하며 말했다.
“네, 공자님.”
“사상자를 확인해 봐.”
“네!”
방지는 대답하고 나서 재빨리 내려가 사상자를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싸움이 끝난 전쟁터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현광회와 죽절방의 인원은 차림새가 뚜렷이 구분되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적의가 가득했으나 누구도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곽성진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양준을 살펴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양준은 팔을 늘어뜨린 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곽씨 가문의 고수들은 양준의 늠름한 기품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참 지나자, 방지가 다시 날아와 어두운 얼굴로 보고했다.
“죽절방 제자 중 사망자는 예순여덟 명이고, 부상자는 백여든아홉 명입니다!”
양준은 싸늘한 얼굴로 시선을 곽성진에게 돌렸다.
곽성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원하는 바를 얘기해 봐. 물어주면 되지!”
“사망자 한 명당 오만 냥, 부상자는 한 명당 일만 냥. 돈으로 내도 되고 영단, 묘약이나 천재지보를 내도 돼!”
“너 강도냐?”
곽성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곽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지만, 양준이 부르는 가격은 그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만약 이렇게 계산한다면 이 한 번의 전투로 몇백만 냥을 물어주게 되는 것이었다.
“양준 공자님, 금액이 너무 큰 것 같습니다만?”
신유 경지 고수 중 한 명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이 나섰다. 그는 양준이 이토록 높은 가격을 부를 줄 몰랐던 것이다.
“협상은 거절합니다.”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난 안 낼 거야!”
곽성진은 고개를 홱 돌리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여태까지 그는 누구를 무서워한 적이 없었다.
양준이 소리 없이 괴이하게 웃었다.
“네게 흥정할 자격이 있을 것 같아?”
갑자기 곽성진의 가슴팍에서 붉은 빛이 피어오르더니, 곧이어 붉은 빛은 천 갈래로 갈라지며 그를 겹겹이 감쌌다.
솨아악-
천 개의 꽃잎이 하늘하늘 춤추며 곽성진을 물 샐 틈 없이 감쌌다. 꽃잎은 모두 날카롭기 그지없었는데, 음산한 죽음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순간, 곽성진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신유 경지 고수들은 저도 모르게 안색이 변했다. 그들은 양준이 언제 곽성진의 몸에 수작을 부렸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꽃잎들은 분명 살인 비보였다. 그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틈에 양준이 곽성진에게 손을 쓴 것이었다.
두 고수는 양준을 낮잡아보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양준의 실력은 다른 젊은 세대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감히 날 죽이려고?”
곽성진은 아직도 방자하기 그지없었다.
“일 년 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게 할 수도 있어.”
양준이 코웃음을 치자, 곽성진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양준의 눈에 담긴 한기를 읽은 신유 경지 고수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배상해 드리죠! 저희 도련님부터 놓아주십시오.”
“제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시죠.”
양준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의 말에는 경고의 의미가 다분했다.
“절대 그러지 않겠습니다!”
신유 경지 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곧이어 곽성진을 감싸고 있던 천 개의 꽃잎이 붉은빛으로 모이더니 양준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곽씨 가문의 세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곽성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색이 어두워졌다. 신유 경지 고수 한 명이 의미심장하게 양준을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경지를 돌파하실 것 같군요.”
양준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싸움은 격전이랄 것도 없었다. 짧은 시간에 승패가 결정 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곽씨 가문의 신유 경지 고수 앞에 있다 보니 양준도 큰 압박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러한 압박감 때문에 정체기에 들어섰던 그의 경지가 정체기를 뚫고, 돌파할 기미를 보였다.
양준이 순순히 인정하는 것을 보고, 신유 경지 고수 두 명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곽성진은 경악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부러움도 담겨 있었다.
“공자님께서는 경지를 돌파하는 일이 중요하니 이곳은 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처음부터 저희 공자님의 지루함을 달래고자 벌인 일이었으니 저희 둘이 잘 수습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방지와 목남두는 서로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두 세력 모두 많은 사상자들이 나왔는데, 이게 모두 한 부잣집 도련님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다니. 결국 부잣집 도련님들 눈에 사람 목숨은 파리 목숨과 같았다.
“알겠습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지 돌파가 코앞이니 그도 이곳에 머무르며 쓸데없는 말을 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다급히 몸을 날려 죽절방의 대전으로 날아갔다.
“양준.”
곽성진이 갑자기 뒤에서 그를 불렀다.
양준은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너 계승 싸움에 참가할 거지?”
곽성진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
“좋아, 좋아!”
곽성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 딱 기다려. 내가 널 기억해 두겠어. 나도 참여할 거다!”
양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전 안으로 사라졌다.
양준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곽성진은 차갑게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미있어. 아주 재미있어!”
신유 경지 고수 한 명이 위로하며 말했다.
“도련님, 화내지 마십시오. 계승 싸움에 줄만 잘 서면 체면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저 분도 오늘 도련님께 무례를 범한 행동이 현명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을 겁니다.”
곽성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그리고 난 화난 게 아니야. 오히려 이토록 즐거웠던 게 얼마 만인가 싶어 흥미를 느끼고 있는 참이지. 이런 작은 소동으로는 역시 날 만족시킬 수 없어!”
그는 잠깐 멈칫하다가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참, 너희들 수중에 돈이 그렇게 많이 있나?”
곽씨 가문의 두 고수는 서로를 마주 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누가 몸에 몇백만 냥씩 지니고 밖을 나선단 말인가?
“빚지는 건 좋은 일이 아닌데.”
곽성진은 아래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