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4장. 혈시당
‘바보가 아닌 이상…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가?’
양진은 의미심장하게 양준을 힐끗 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둘은 이미 폐인이 되었다. 그래도 그 둘을 원하느냐?”
“네!”
“재미있군.”
양진이 씨익 웃었다.
“야망이 대단하구나!”
그는 양준의 속마음과 계획을 꿰뚫어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양준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네가 원하니 그들을 배정해 주마.”
양진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계승 싸움에서 그 두 사람과 함께 무슨 파란을 몰고 올지 아주 기대가 되는구나! 그때가 되면 돌을 들어 제 발을 까는 격이 되어도 후회하지 말아라.”
“그건 제 일이니 장로님께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양진은 냉소를 지으며 빠르게 문서 한 장을 작성하고, 장로회의 도장을 찍어서 양준에게 던져 주었다.
양준은 그것을 건네받고서 힐끗 훑어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수했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그 두 혈시를 바꾸고도 아직 많은 공로가 남았는데 또 바꾸고 싶은 것이 있느냐?"
양진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계승 싸움은 많이 준비할수록 좋은 것이다.”
“공로가 얼마나 남았습니까?”
양준은 조금 놀라웠다.
“아주 많이.”
양진은 귀찮아서 구체적인 숫자를 말하지 않았다. 그도 어떻게 계산해야 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럼 전부 단약과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재료로 바꾸겠습니다. 적어도 천급 이상은 되어야 하고, 기왕이면 현급이면 좋겠습니다.”
양진은 놀란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의 요구가 이토록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준비해서 네 저택으로 보내마.”
“그럼 수고하십시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녀석, 계승 싸움에서 너무 일찍 패배하지 말거라. 그러면 내가 실망할 것이야.”
양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장로님들은 잘 지켜보시면 됩니다!”
양준의 말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건방지군!”
양진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방금 전 정백련을 데리러 갔던 뚱보 장로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양진, 저 녀석은 도박을 하는 거야! 잘못하다간 쫄딱 망할 거야.”
“계승 싸움 자체가 도박이지! 양씨 가문의 젊은 자제들 중에 이런 기회를 알아보지 못한 이가 있겠는가? 하지만 누구 하나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없었던 거지. 저 아이만 빼고!”
양진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시간 내에는 큰 성과를 보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미 혈시당에서는 우세를 점했어. 넷째네 아이가 간도 크고 박력도 넘치는 게 양씨 가문의 패기가 있군!”
양준이 두 혈시를 선택하면서 생기는 득실을 어찌 장로들이 모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선택은 계승 싸움에서 초반에 자리를 잘 잡고 빠르게 패배하지만 않으면, 앞으로 얻는 이익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유일하게 걱정되는 것은 부상이 채 낫지 않은 두 혈시들이 초반에 공격을 받아 일찍 패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혈시당.
이곳은 양씨 가문의 특별한 곳으로 평소 혈시들이 생활하는 곳이었다. 혈시당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전의는 십몇 리 밖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보이지 않는 힘은 마치 날카로운 검처럼 섬뜩한 빛을 발했다.
혈시들은 전문적으로 전투를 위해 양성된 인재였다. 그들은 전의가 강했고, 양씨 가문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많은 혈시들은 평소에도 몸에서 풍기는 살육의 기운이 짙어 그 기운이 혈시당의 주위를 감싸고 있을 정도였다.
양준도 혈시당으로 찾아오면서 혈시들의 강력한 기운을 느끼고 흠칫 놀랐다.
도봉과 당우선은 이미 혈시당 밖에 공손하게 서서 조용히 양준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몸집이 거대한 남자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는 흔한 검은색 무사복 차림으로 표정이 덤덤했다. 장발을 어깨에 늘어뜨려 한눈에도 비범함을 알아볼 수 있었으며, 차가운 눈빛은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혈시당의 당주 풍승(風勝)이었다. 신유 경지 정상의 고수인 그는 양씨 가문을 위해 많은 공을 세웠다. 패혈광술을 펼친다면 심지어 신유 경지 이상의 고수와도 겨룰 수 있었다. 그는 중도에서 명성을 날린, 얼마 되지 않는 고수 중의 한 명이었다.
풍승은 어제 도봉과 당우선에게서 보고를 듣고 더더욱 막내 공자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곡고의와 영구는 그의 수하였다. 혈시당의 당주로서 그는 당연히 두 사람이 신경 쓰였다. 때문에, 그는 곡고의와 영구를 선택하려는 막내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보고 싶었다.
이날, 양씨 가문의 다른 공자들이 여럿 다녀갔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막내 공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풍승은 조급해하지 않고, 조용히 서서 기다렸다.
도봉은 속으로 초조했다. 어제 그와 당우선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한 양준의 말에 담긴 진실성에 의심이 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양준에게 곡고의와 영구를 바꿔 갈 만한 공로가 있을지 걱정이었다.
‘공로가 부족하면 어쩌지?’
이때, 날렵한 몸매의 젊은이가 느긋하게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저 분이냐?”
풍승이 물었다.
“맞습니다. 막내 공자님!”
조마조마하던 도봉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당우선과 시선을 교환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막내 공자님은 역시 믿을 만한 분이셨어! 아쉽게도 이번 계승 싸움에서는 저 분을 모시지 못하게 되었군.’
이렇게 생각한 두 사람은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양준은 풍승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은 섬광처럼 번뜩였고, 기운은 짙고 강했다. 그리고 온몸에는 폭발적인 힘이 깃들어 있었다.
‘신유 경지 정상이다!’
양준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단박에 그의 경지를 파악했다.
‘만약 이런 고수와 싸운다면 초식 한 방에 목숨을 잃겠군.’
실력 면에서 보이는 거대한 차이는 비보와 금신의 사악한 기운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준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풍승은 공법을 운행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천지 간의 기운이 끊임없이 그의 몸으로 몰려가 체내에 침투하고 있었다. 그렇게 수시로 진원을 만들어 내므로 그의 진원은 더욱 순수하고 짙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강하군. 혈시당의 강자답네!’
양준은 속으로 찬사를 보냈다. 양씨 가문이 여러 해 동안 흔들림 없이 8대 가문 중 최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풍승을 살펴보고 있을 때, 풍승도 양준을 몰래 눈여겨보고 있었다.
‘옷차림이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네. 일반적인 명문세가 공자보다 검소해. 이런 옷차림은 돌발상황에서의 전투에 최적화되어 있어. 아직 젊긴 하나, 이미 진원 경지 8단계인 데다 표정이 침착하고 평범해 보이는 두 눈에서 가끔 예리한 빛이 보이는군.’
풍승은 저도 모르게 실눈을 뜨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양준의 몸에서 짙고 뚜렷한 살기를 느꼈다.
살기는 풍승의 몸에서도 풍기고 있었는데, 양준보다 더욱 강했다. 이런 기운은 수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을 죽여야만 몸에 남는 것이었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지금처럼 짙은 살기를 풍길 수 있었다.
‘젊은 나이에 저토록 많은 사람들을 죽이다니.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겠군.’
이 점이야말로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양준의 몸에서 또 다른 괴이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 기운은 풍승의 살기를 끌어냈고, 순간 그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마터면 줄곧 억제하고 있던 그의 포악한 기운이 폭발할 뻔했던 것이다.
풍승은 다시 자세하게 감지해 보았지만, 더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양준의 진원이 상당히 순수하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풍승은 몰래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살펴본 것만으로도 그는 눈앞의 막내 공자가 절대 겉모습처럼 쉬운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양준 공자님?”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도봉과 당우선에게 돌렸다. 두 사람은 서둘러 앞으로 나왔고, 도봉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자님, 이 분은 풍승 당주입니다!”
“풍 당주셨군요!”
양준이 인사를 건넸다.
“혈시를 위해 오셨다면 장로전에서 받은 문서를 보여 주시오.”
풍승이 손을 뻗자, 양준이 그에게 문서를 넘겨주었다.
문서를 본 풍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무덤덤한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 듯했다.
“양준 공자, 안으로 드시지요.”
양준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도봉과 당우선은 서둘러 그를 혈시당 안으로 모셨다.
풍승은 그들을 따라 들어가지 않고, 여전히 꼿꼿하게 입구에 서 있었다.
혈시당에 들어서자 도봉은 헤실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저는 당주님께서 안으로 드시라는 말씀을 하시는 건 처음 봅니다. 오늘 다른 공자님들이 오셨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는데. 공자님의 첫인상이 좋으셨나 봅니다.”
당우선은 대단한 일이라도 알아챈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체면을 봐준 모양이지.”
양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도봉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체면을 봐주신 게 아니라 공자님께서 두 친구를 기용해 주셔서 저희 혈시당 전체가 감격해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이야?”
양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스무 명 정도의 혈시들이 나란히 줄 서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숙연한 얼굴에 감사의 마음이 가득 느껴지는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맨 앞에는 혈시당의 부당주 주봉(周封)이 서 있었는데, 그 또한 신유 경지 정상의 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