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400화 (400/853)

제 400장. 우리 내기 하나 할까?

곽정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었다.

“내가 잘 선택하면 성문을 넘겨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근데 너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하필 저 자를 고르다니…….”

양준은 얼굴빛이 어두워지더니 냉소를 흘렸다.

곽정은 헛기침을 하고는 더 말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

“어쨌든 안 된다. 다른 이를 고르도록 해.”

“남자로 태어났으면 뱉은 말은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이는 동맹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시장터에서 물건 고르는 게 아니라고요.”

곽성진은 정색하고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전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아버지,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네가 날 화병으로 죽일 셈이구나.”

곽정은 비틀거리면서 얼굴이 붉어지더니 온몸의 진원마저 들끓었다.

“어, 아버지, 이리 화내시는 건, 설마 저한테 매질이라도 하려는 것입니까?”

곽성진은 끝까지 대들면서 마치 정말로 아버지가 화병이 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계속해 도발했다. 다른 가주들도 구경할 만큼 다 구경하고 나서 너도나도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고묵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곽 가주! 그만하시게. 아이에게는 아이 나름의 생각이 있을 거야.”

맹서평도 한마디 했다.

“맞네. 별로 큰일도 아니지 않는가.”

곽정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큰일이 아니라고? 성문은 우리 가문의 중요한 조직일세! 자네들이라면 가문의 재산을 함부로 넘겨줄 텐가?”

다른 가주들은 웃으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곽정, 계승 싸움은 우리 양씨 가문의 큰 축제이고 젊은이들의 무대요. 누구 편에 서든, 그건 아들에게 맡기고 그대는 끼어들지 마시오.”

양응호가 어느새 남쪽 정문에 나타나 방금 전의 소란을 빠짐없이 지켜보고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곽정은 저도 모르게 양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곽성진은 웃으면서 공수했다.

“역시 양씨 가문의 가주님께서는 영명하십니다. 저희 아버지는 이제 노망기가 드신 모양이에요.”

“그 입을 더 놀리면 오늘 그냥 이 자리에서 맞아 죽을 줄 알아라.”

곽정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됐네요. 됐어요. 나이도 지긋하신 분이 더 못 볼 꼴 보이기 전에 먼저 집으로 돌아가 쉬세요. 곽씨 가문은 제게 맡겨 두시고요.”

곽성진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너 배짱 한번 두둑하구나!”

곽정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도 선택할 권리가 있으니 나도 막지는 않겠다. 대신, 성문을 넘겨받는 일은 꿈 깨라!”

곽정은 말을 마치고 화가 나서 소매를 떨치며 떠나갔다.

곽성진은 대수롭지 않아 하며 양준에게 웃어 보였다.

“양준 공자, 보아하니 앞으로 우리 동고동락해야 할 것 같군!”

양준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드디어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양씨 가문 공자들은 답운구를 타고 전성으로 달려갔다.

도봉과 당우선은 난처한 눈빛으로 양준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나서 양항의 뒤를 따라 점점 멀어져 갔다.

양준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는 씩 웃더니 곡고의와 영구에게 말했다.

“우리도 가자.”

“예.”

두 혈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곽성진은 양준을 따라잡은 다음, 그를 보고 다시 곡고의와 영구를 뒤돌아보고는 저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구만. 이거 참 재미있네. 아무 지원도 받지 못하는 조력자와 부상을 입은 혈시 둘이라. 어떻게 봐도 승산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단 말이지.”

“계속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당장 꺼져.”

양준은 냉랭하게 말하며 그를 힐끗 보았다.

곽성진은 순간 당황했다. 양준이 설마 이런 태도로 자신을 대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는 드물게 화내지 않고, 오히려 흥미진진해하며 말했다.

“네 형제들은 동맹을 맺은 이들에게 살갑게 대하던데, 이런 푸대접이라. 역시 재미있는 녀석이야. 네놈이 어떻게 오늘 밤을 버티는지 두고 보겠다.”

“넌 내가 졌으면 좋겠냐?”

곽성진이 자신을 선택한 것은 양준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때문에, 곽성진의 진심을 알기 전까지 양준은 그를 조력자로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한량쯤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내가 너를 왜 골랐다고 생각해? 너 같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무슨 꼴을 당하는지 지켜보려고 왔지!”

곽성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면 아마 실망할걸.”

양준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곽성진은 코웃음을 쳤다.

“네 개인의 실력은 인정하마. 그런데 아무 도움 없이 뭘 할 수 있을까?”

그러고는 곡고의와 영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겨우 저 둘을 믿고 무슨 큰일을 하려고? 너도 우리 아버지처럼 잠이 덜 깬 건 아니겠지?”

곡고의와 영구는 덤덤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희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누구도 공자님 몸에 손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곡고의와 영구가 이처럼 공손하게 나오자, 곽성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양씨 가문 혈시당의 고수들이 저리 살가웠던가?’

“우리 내기 하나 할까?”

양준이 미소를 띤 채 제안하고는 곽성진을 바라보았다.

“무슨 내기?”

곽성진은 금세 흥미를 가졌다.

“내가 오늘 밤을 버텨 낼 수 있을지, 없을지.”

곽성진은 고개를 돌려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의미심장해지며, 급기야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이해득실을 따져 보았다.

“왜 두려워? 두려우면 지금이라도 빠져. 괜히 오늘 밤에 목숨 잃지 말고. 넌 곽씨 가문의 독자라며? 정말 전성에서 죽으면 서로 곤란하잖아.”

양준은 냉담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두렵다고? 내가 여태껏 살면서 두려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이야. 지금 나하고 내기를 하겠다? 아주 본때를 보여 주마.”

곽성진은 냉소를 지었다. 그는 말하면서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뭘 걸 거야?”

곽성진이 캐물었다.

양준은 그를 두어 번 훑어보고 말했다.

“그런데 너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지 않나?”

곽성진은 순간 당황하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럼 소소한 거로 걸지. 네가 지면 그냥 알몸으로 전성을 열 바퀴 돌아!”

양준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 양준, 그거 너무하잖아…….”

곽성진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알몸으로 전성을 열 바퀴나 돌라고? 너무 창피하잖아!’

“어차피 악명이 높은데 알몸으로 열 바퀴를 돌면 뭐 어때서? 한 가지 더한다 해서 네 평판에 별로 영향 없을 거야.”

양준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야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곽성진은 그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긴 하지. 그래도 난 내가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그럼 넌 뭘 걸 건데?”

양준이 휘파람을 불자, 하늘에서 우렁찬 독수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금우응이 급강하했다. 늠름한 금우응은 양준의 어깨에 차분하게 내려앉더니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냈다.

“내가 지면 이걸 넘겨주지.”

곽성진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만약 양준이 그에게 돈이나 비보를 걸겠다고 했으면 별로 흥미를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곽씨 가문의 독자로서 그런 것들은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금우응은 달랐다. 이는 양씨 가문만 가지고 있는 요수로 실력이 좋은 것은 물론, 겉모습만으로도 곽성진의 마음을 끌었다. 앞으로 밖에 다닐 때마다 양준처럼 금우응을 데리고 다닌다면 얼마나 체면이 서겠는가.

“그럼 약속한 거다.”

곽성진은 양준이 번복할까 두려워 서둘러 못을 박았다. 그러고는 기쁜 얼굴로 금우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독수리야, 독수리야! 오늘 밤만 지나면 넌 내 것이야.”

양준은 빙그레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도 백 리 밖에 위치한 전성.

이는 양씨 가문에서 자체적으로 축조한 성곽으로, 중도보다는 번성하지 않았지만 나름 괜찮은 편이었다. 평소에는 일반 성곽으로 사용하다가 매번 계승 싸움이 벌어질 때면, 이곳은 곧 전쟁터가 됐다. 전성의 여덟 모퉁이에는 각각 관저(官邸)가 한 채씩 있는데, 이는 계승 싸움을 치르는 공자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어쩌면 앞으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서 지구전을 벌여야 할지도 몰랐다.

양씨 가문의 역사를 살펴보면, 계승 싸움이 단시간 내에 끝난 적이 드물었다. 대부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수년간에 걸쳐서야 승부를 가를 수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백 년 전, 한 가주가 반년 내에 계승 싸움을 끝낸 적이 있다고 했다. 이만한 성과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뒤로 갈수록 상대해야 할 적이 점점 더 강해지기에 이기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양씨 가문 공자들이 입성하자, 전성은 순식간에 들끓었다. 이곳에는 원래 주민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많은 이들이 계승 싸움에 말려들까 두려워서 떠나 버린 상태였다. 남아 있는 이들은 모두 담대한 자들로 기대를 가지고 계승 싸움을 기다렸다.

공자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약속이나 한 듯이 각자 관저로 향했다.

양준의 관저는 서북쪽 구석에 있어 위치가 좋지 않았고, 외딴 곳이기에 썰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양준 일행은 천천히 걸어 서북쪽 모퉁이에 있는 관저에 이르렀다.

입구에는 예쁜 하녀 두 명이 서 있었고, 관저 안에도 부릴 수 있는 하인들이 있었다. 이는 양씨 가문에서 여러 공자들의 생활을 돌보기 위해서 보낸 것이었다. 관저마다 모두 똑같았다. 이들은 모두 일반인들로 계승 싸움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양준이 관저에 도착하자, 두 하녀는 예를 올리며 말했다.

“양준 공자님을 뵙습니다.”

그녀들의 태도는 그저 의례적으로 인사하는 것일 뿐, 열정적이지 않았다. 양준과 곽성진은 두 하녀의 표정에서 은은히 비치는 실망감을 읽을 수 있었다. 가망이 없는 공자의 관저에서 일하게 되자, 두 하녀의 기대감도 사라졌다.

관저의 하인들은 계승 싸움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뛰어난 공자를 따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면 우선 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다음으로 공자의 시중을 잘 들어 그의 눈에라도 들게 되면 훗날 공자가 가주가 되는 경우, 덩달아 지위도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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