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1장. 가문은 가문이고 나는 나지!
곽성진은 웃으며 양준을 힐끗 보았다. 하인들마저 양준이 가망 없다고 여기는 상황이 매우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양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곡고의와 영구를 데리고 관저로 들어섰다.
등 뒤에서는 곽성진이 음탕하게 웃으면서 하녀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두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
곽성진의 음탕한 표정에 두 하녀는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
그녀들은 당연히 ‘중도의 늑대’에 대해 알고 있었다. 두 하녀가 늑대의 마수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고민하는 와중에 양준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내 관저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
곽성진은 황당해하며 소리쳤다.
“어이, 양준. 너무 사사건건 간섭하는 거 아니야?”
그는 말하면서 양준에게 다가가 분통을 터뜨렸다.
“여긴 다른 미녀도 없는데, 난 뭐 하면서 시간을 보내라고?”
양준은 담담하게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전성 안에도 기루가 있어. 용기가 있으면 거기라도 가 보든가.”
“아니, 됐어.”
곽성진은 연신 손을 내저었다. 그가 많은 이들 앞에서 양준과 동맹을 맺기로 결정한 순간, 이미 다른 공자들의 적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기루에 갔다가는 사고가 나기 십상이었다.
“누가 미인을 찾아? 난 안 될까?”
관저 대청 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준은 그 소리를 듣고 순간 어리둥절했다. 곽성진은 거의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리고 당황해서 바라보았다.
맑은 눈에 하얀 피부의 여인이 옅은 보랏빛 긴 치마를 입고서 미소를 머금은 채 안쪽에서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여인은 그들 앞으로 다가오더니 허리를 쭉 펴고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추억몽?”
곽성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누가 도착하자마자 미녀를 찾는가 했더니, 곽성진 너였구나.”
추억몽은 방글방글 웃으며 곽성진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추억몽을 만나다니… 어?’
곽성진은 추억몽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떠올렸는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참 이상한 하루군. 곽성진이 아무 이유 없이 동맹이 되질 않나, 이제는 또 추억몽이 이곳을 찾아오다니.’
“너희 추씨 가문은 여섯째 형님한테 간 것 아니었어?”
양준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추씨 가문의 추자약은 양신의 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때 당시 추수성도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모든 이들 앞에서 추씨 가문이 여섯째 양신과 동맹을 맺었다고 분명하게 알린 것이었다.
양준은 추억몽이 왜 자신의 관저에 나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모습을 보니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가문은 가문이고, 나는 나지! 왜, 안 반가워?”
추억몽은 미소를 띤 채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
“어이, 미녀. 가문에서 쫓겨난 건 아니겠지?”
“뭐라는 거야? 똑바로 얘기해 봐.”
추억몽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양준의 궁금해하는 모습에 즐거워했다.
“너를 도우러 왔다고. 계승 싸움이잖아. 이해 못 할 게 뭐가 있어. 오늘부터 우리는 동맹 관계란 말이지.”
곽성진이 눈알을 굴리더니 냉소했다.
“네 아버지도 참 간사하군. 판돈을 양쪽에 나눠서 걸다니.”
그는 추씨 가문이 양신과 양준을 동시에 선택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양준에게 어떤 신통한 구석이 있어서 추씨 가문이 절반의 판돈을 양준에게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온전히 흥미를 위해 양준을 따라온 것이었지만, 추씨 가문은 절대 그럴 리 없었다.
“내가 얘기했지. 가문은 가문이고, 나는 나라고. 이번에 나는 가문이 아닌 나 자신을 대표해서 온 거야.”
추억몽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양준은 빠른 사고를 거쳐 곧 많은 것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몇 명 데리고 왔는데?”
추억몽은 쓴웃음을 지었다.
“추우당에 있는 사람들은 다 끌고 왔어.”
양준은 신식을 펼쳐 순식간에 관저 안에 있는 무인들의 실력을 확인하고는 다시 신식을 거두어들였다.
곽성진은 도리어 코웃음을 쳤다.
“추우당? 거긴 덜 떨어진 애들만 가는 곳 아냐? 인원도 스무 명 정도밖에 없잖아.”
“그래. 덜 떨어진 애들만 있는 곳이야.”
추억몽이 곽성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추씨 가문의 무인들 중, 중상을 입어 실력이 떨어지거나 더는 재생할 가망이 없는 이들은 모두 추우당으로 보내져 쉬운 일들만 하게 했다. 조직 내에 신유 경지는 한두 명밖에 없었고, 그 외에는 모두 경지가 낮았다. 추억몽이 데려온 이들로 오늘 밤의 위험을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왔으면 됐어. 합치면 모두 힘이 되는 거지.”
양준은 미소를 띤 채 추억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억몽은 입을 오므리며 미소 지었다.
“날 실망시키면 안 돼.”
“너희는 왜 그렇게 낙관적인 거야?”
곽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왜 이 둘이 자신보다도 더 계승 싸움에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가슴을 치며 말했다.
“힘이 하나도 없는 공자 하나에, 부상으로 실력이 떨어진 혈시 둘에, 덜 떨어진 식솔들을 거느리고 온 낭자까지. 완전 쓰레기장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데? 양준, 넌 이제 죽었다.”
곽성진은 양준에게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말에 추억몽은 미간을 찌푸릴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
이번에 그녀가 계승 싸움에서 양준을 지지하는 것도 큰 위험을 무릅쓴 것이었다. 그녀는 양준이 어떤 비장의 무기나 힘을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직감이 절대 이 남자를 얕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느낌일 뿐이었다. 양준이 계승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지, 심지어 오늘 밤을 버텨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됐다. 내 입만 아프지.”
곽성진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그럼 미리 자러 간다. 밤에 있을 구경거리를 놓쳐서는 안 되니까 말이야.”
“네 마음대로 해.”
양준도 그를 접대할 생각이 없었다.
관저는 매우 컸다. 많은 세력들이 모일 것을 대비했기에 빈 방들도 수없이 많았다. 곽성진은 아무 방이나 찾아 들어갔다.
“어떻게 하려는 거야?”
곽성진이 자리를 떠나자, 추억몽이 양준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곽성진의 태도에서 그녀는 현재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중도의 늑대’는 그저 계승 싸움을 구경하러 왔을 뿐, 양준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하면, 겉으로 보기에 양준은 8대 세가 중 두 가문과 동맹을 맺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에게는 어떤 힘도 없다는 것이었다. 둘밖에 없는 혈시도 아직 완치되지 않아 평소 실력의 3할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추우당 사람들은 네 마음대로 쓸 수 있어. 하지만 큰 역할을 해주지는 못할 거야.”
추억몽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계승 싸움 첫날이라고 해도 저 두 혈시만 믿고 있으면 안 돼. 다른 공자들 세력은 저 둘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길 수도 있어. 그러면 너를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야.”
“나도 알아.”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동씨 가문은? 동씨 가문은 네 외가 아니야? 왜 이번에 한 명도 못 봤지? 그쪽에서는 아예 지원을 안 해준대?”
추억몽은 잠깐 생각하다가 살짝 초조감을 비치며 물었다. 이런 때에 일등 세력인 그의 외가에서 도움을 준다면 상황이 이처럼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올 거야. 그게 오늘이 아닐 뿐이지!”
양준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추억몽은 깜빡 놀랐다. 양준의 미소에서 그녀는 그에게 무언가 속셈이 있을 거라는 촉이 왔지만, 그녀처럼 영리한 사람도 양준의 꿍꿍이는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넌 네 볼일 봐. 대처할 방법은 다 생각해 뒀으니까.”
양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곡고의와 영구를 데리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너 참…….”
추억몽은 양준의 뒤를 따라갔으나, 양준이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자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이를 갈았다.
그녀는 지금 양준에게 뭔가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준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자, 저도 모르게 실망감이 들었다. 매번 양준을 대할 때면, 그녀는 끌려 다니기만 할뿐 우위를 차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양준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간다니까!’
추억몽은 마음속으로 욕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잠깐 생각하다가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는 관저의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추우당에 고수가 없다지만, 관저 주위에 함정을 설치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전성, 홍원주루(鴻源酒樓).
술집은 열기가 넘치고 손님도 끊이지 않아, 심부름꾼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계승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전성 안에는 이미 적지 않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이곳은 계승 싸움의 전장으로 일찍이 도착해 양씨 가문의 공자들을 기다리는 이들도 많았다.
창가 옆 탁자에는 통통한 체형의 청년이 맛있는 술과 음식들을 즐기고 있었다. 그의 아래쪽 양옆에는 각각 노티가 다분한 늙은이가 한 명씩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두 노인은 꼼짝도 않고 마치 잠이라도 든 것처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눈꺼풀 아래에 숨긴 눈동자는 시시각각 술집에서 오가는 손님들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