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4장. 향씨 가문에서 보낸 성의인가?
양준은 추억몽과 함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추억몽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서 곁눈질하며 물었다.
“넌 하나도 조급하지 않나 봐.”
“조급할 게 뭐가 있어?”
양준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 모른 척하려고.”
추억몽은 가볍게 이를 악물고서 양준의 옷소매를 와락 잡아당겼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화가 나서 말했다.
“이제 좀 제대로 말해주면 안 돼?”
“뭘 말하라는 거야.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인맥과 포섭할 수 있는 세력이 얼마나 있고, 오늘 밤은 어떻게 넘길 계획인지?”
추억몽은 하는 수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양준은 여전히 무성의하게 그녀를 대할 것이다. 그녀는 한층 부드러워진 말투로 다시 말했다.
“추씨 가문을 대표해서 온 것도 아니고, 데려온 세력이 크지 않다고 해도 어쨌든 난 네 동맹이잖아. 내가 가문과 다른 행보를 하면서까지 여기 왔는데, 왜 나한테 계속 숨겨? 나는 진심으로 사귈 가치가 없다는 거야?”
“진심으로 사귄다고?”
양준은 이상야릇하게 웃으며 추억몽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음탕한 빛이 서려 있었다.
“나와 어떻게 진심으로 사귀고 싶은데?”
추억몽은 양준의 눈빛과 말 속의 품은 뜻을 알아채고서 얼굴이 빨개지더니 곧 다시 침착해졌다.
“그냥 마음 터놓는 친구가 되면 좋잖아. 고민 있으면 다 털어놓고, 그럼 좀 좋아?”
“됐어. 마음 터놓는 친구 같은 건 나하고는 맞지 않거든.”
양준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너 진짜! 내 앞에서 진지한 말은 한마디도 안 하고, 내가 그렇게 싫어?”
추억몽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다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네가 실력이 뛰어나고, 내가 본 젊은이 중에서 가장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널 두고 요미여왕과 다툴 생각은 없어! 내가 요미여왕의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거든.”
“네가 싫은 게 아니라, 너무 영리해서 그래. 너와 함께 있으면 항상 조심해야 하거든.”
양준은 냉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힐끗 보았다.
추억몽은 순간 놀라다가 긴 속눈썹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니까 너도 나 때문에 부담감을 느꼈다는 거구나. 난 또 나만 그런 줄 알았지.”
“네 자신을 과소평가한 거야."
“왠지 기분이 좋은데.”
추억몽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양준에게 부담감을 준다는 사실이 기뻤다.
“다른 건 아직 너하고 말하지 않을 거야. 오늘 밤은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돼.”
양준은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역시 다 계획이 있구나. 괜히 걱정했네.”
추억몽이 새침하게 말했다.
그녀가 달콤한 말로 자신의 호감을 사려는 것을 알고, 양준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이때, 곽성진이 어디에서인가 귀신처럼 나타났다. 그는 접선을 흔들며 두 사람을 뒤따르다가 미소를 띠고 말했다.
“밖이 제법 소란스러운 거 같네?”
“귀가 밝기도 하다.”
추억몽이 그를 노려보았다.
곽성진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뭐든 구경하기를 좋아하거든. 특히 원수네 집 불구경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건 없지. 누가 또 양준을 건드리러 왔을까?”
“말썽 부리러 온 거 같지는 않아.”
추억몽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자의 태도가 아주 이상해. 의탁하러 온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실력이 되는 사람도 제법 있고, 큼직한 상자도 적지 않게 들고 왔어.”
“제길! 네깟 놈한테 힘을 보태겠다는 자가 있다고? 눈이 삔 거야, 아니면 삶에 미련이 없는 거야?”
곽성진은 욕을 한마디 내뱉고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란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입 닥쳐!”
추억몽이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곽성진은 추억몽이 두려운지 시선을 돌리며 입을 다물었다.
“조심해. 계략에 당하면 안 돼! 첫날에 탈락하는 꼴은 안 보고 싶으니까.”
추억몽이 양준에게 당부했다.
그녀는 추씨 가문에서 독립해 나와 양준과 동맹을 맺은 것과 다름없었다. 만약 양준이 사소한 계략에 말려 탈락하게 된다면 그녀의 안목이 형편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문 밖, 검은색 장삼(長衫)을 입은 젊은이가 두 손을 뒷짐 지고 서 있었다. 그의 뒤에는 적어도 스무 명의 무인들이 한 줄로 서 있었다. 그중에는 신유 경지도 네 명 있었지만, 실력이 가장 높은 사람이 신유 경지 4단계밖에 안 되었다. 그리고 관심이 가는 것은 그들이 가져온 커다란 주홍색 상자였다.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어떤 것은 아주 가벼웠고, 또 어떤 것은 아주 무거웠으며 공기 중에는 옅은 약 향기까지 풍겼다. 이런 주홍색 상자는 족히 네 개나 되었는데, 역시 나란히 한 줄로 한쪽에 놓여 있었다.
젊은이는 눈빛이 의연하고 표정이 침착했다. 대략 스무 명의 무인들은 그곳에 서서 꼼짝도 않고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며 양준의 관저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뒤, 양준, 곽성진, 추억몽이 함께 나타났다.
젊은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곽성진과 양준을 번갈아 보았다. 누가 양준인지 모르는 듯했다.
양준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동경한이 온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게다가 전혀 모르는 이였다. 알지도 못하는 이가 자신에게 의탁하러 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안목 있는 사람이라면 이번 계승 싸움에서 양준이 이길 가망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오늘 밤이면 곧 첫 번째 고비가 닥칠 터였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찾아온 이들의 목적이 여러모로 사람을 궁금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의탁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이 상자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안에는 분명 물자가 들어 있었다.
양준은 몰래 고개를 저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추억몽은 그에게 조심하라고 귀띔했다. 그녀 또한 방심할 수가 없었다.
양준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곽성진이 접선을 촤라락 펼쳐 가볍게 부치면서 웃는 얼굴로 물었다.
“어느 가문이냐?”
곽성진이 말을 하자마자 젊은이는 즉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곽성진의 시시껄렁한 모습에 젊은이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더니 얼굴에 냉기를 띠고서 물었다.
“그쪽이 양씨 가문의 막내인 양준 공자인가?”
젊은이는 곽성진의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말투도 정중하지 않았다.
젊은이가 묻자, 곽성진은 야릇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리숙한 모습을 보니, 딱 봐도 소식에 어두워 보이는구나. 내가 몇 마디 해주랴?”
그러고는 상대방이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어갔다.
“오늘 밤이 지나면 이곳의 주인은 바뀐다. 그러니 네놈은 그냥 다시 돌아가. 가서 안목 좀 키우고 말이야. 양씨 가문에 공자만 여덟인데 하필 여기로 오다니 진짜 넌 답이 없구나.”
곽성진이 주인 행세를 하며 우쭐거리는 바람에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맞은편 젊은이는 불쾌한 표정을 하고서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곽성진이 웃으면서 뭔가 더 말하려고 하자, 양준이 그의 옷을 와락 잡아채서 홱 던져 버렸다.
곽성진은 공중제비를 돌고서 바닥에 착지했다. 그는 코를 매만지며 감히 원망도 하지 못하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 광경을 본 젊은이는 눈길을 양준에게 돌렸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무인들도 소곤소곤 속삭이기 시작했다.
“내가 양준이다.”
양준은 냉담한 표정으로 젊은이를 지켜보았다.
젊은이는 표정이 살짝 풀렸으나 눈빛에는 여전히 방자함과 거만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도발적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고 미적지근하게 말했다.
“반갑다, 양준 공자.”
“어디서 온 누구지?”
양준도 젊은이가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억몽이 왜 이상하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모양새를 봐서는 자신과 동맹을 맺으러 온 듯했다. 적지 않은 무인들을 데리고 왔고, 물자도 네 상자나 가지고 왔다. 그런데 그의 표정을 봐서는 누구한테 강요당해 내키지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양준은 눈앞에 젊은이를 어디서 만났었는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향천소(向天笑)라고 한다.”
젊은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향천소라고? 혹시 향초와 아는 사이인가?”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문득 그의 성씨에서 지난 일을 떠올리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향초는 몇 달 전에 태방산에서 만났던 일등 세가 향씨 가문의 대공자이자, 후계자였다. 그 당시 향초와 남생은 같이 협력하여 양준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양씨 가문의 혈시들이 양준을 찾아와 상황이 일단락됐었다.
그때, 양준은 아무런 힘도 없었고, 두 사람의 신분이 낮지 않았기에 섣불리 그들을 죽이지 못하고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보내기 전에, 석 달 이내에 중도에 찾아와서 성의를 보이라고 말했었다.
이제 보니 향천소는 분명 향초와 연관이 있었다. 그렇다면 무인들과 물자에 대해서도 설명이 가능했다.
“우리 형님이다.”
향천소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서 무인들을 한번 훑어본 다음 말했다.
“저게 너희 향씨 가문에서 보낸 성의인가? 나쁘지 않군. 이 정도면 만족스러워!”
향천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무인들은 우리 향씨 가문에서 보낸 성의이고, 상자 네 개는 남씨 가문에서 보낸 선물이다.”
“뭐든 좋아! 사람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물건은 제법 괜찮아 보이니까.”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한 가문은 무인들을 보내고, 다른 한 가문은 물자를 보냈으니 나름 괜찮았다. 두 가문도 아마 양씨 가문 공자를 죽이려 했다는 소문이 퍼질까 두려워, 꾹 참고 이렇게 금전적인 손실로 무마하려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