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407화 (407/853)

제 407장. 저쪽에 노인 둘이 있어

“후계자 문제?”

양준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 너희 양씨 가문만 계승 싸움으로 후계자를 결정해. 다른 7대 세가나, 나아가 천하의 모든 일등 세력들은 대부분 적장자가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고 있어.”

추억몽은 이 사실들을 말하며 저도 모르게 표정이 씁쓸해졌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계속해 말했다.

“적장자가 실력이 너무 떨어지지 않는 이상, 가주 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지. 왜냐하면 가주 자리를 이어받을 이는 강한 무공이 필요하지 않고, 그냥 가문 전체를 잘 관리하면 되니까. 네가 만났던 여씨 가문에 여량 있잖아, 신유 경지 7단계밖에 안 돼. 사실 여씨 가문에는 그보다 실력이 높은 이가 몇 있어. 하지만 그가 가주인 것은 첫째, 그만한 수완이 있고, 둘째는 적장자이기 때문이야. 우리 추씨 가문도 똑같을 거야……. 향씨 가문에서는향초가 바로 정통 후계자지. 그런데 향천소의 비범한 실력 때문에 향초가 위기의식을 가지게 된 모양이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향초가 동생을 꽤 못살게 굴었다더군. 이에 반해 향천소는 반항한 적이 없다고 해. 그로서는 아마 가주 자리를 두고 다툴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양준은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걸 확인하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향초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러고도 남지.”

“이제 향천소가 왜 네 관저에 왔는지 알 만하지?”

추억몽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알겠어.”

이제 양준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향초는 원래부터 실력 있는 동생이 껄끄러웠는데, 마침 양준이 협박하자 아예 동생을 양준에게 보내 계승 싸움에 참여시킨 것이다. 양준은 계승 싸움에서 확실히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을 보내주면 이런 성의는 남씨 가문의 물자 네 상자보다 더 유용하고 실속 있었다.

다음으로 향천소가 양준 쪽에 있고, 그가 계승 싸움에서 다른 공자를 도와 양준을 이기면, 자신이 동생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러면 가문에서 후계자의 자리도 더욱 공고해질 터였다.

향초는 지금 일석이조를 노린 것으로, 대단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보태, 그는 계승 싸움에서 가문 내 향천소를 지지하는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 네 생각에 향천소는 쓸 만해?”

양준은 시선을 돌려 추억몽을 바라보았다.

추억몽은 그의 살가운 태도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말했다.

“아주 쓸 만해! 쓸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야겠지만.”

“우선 두고 보자.”

양준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향천소가 진심으로 자신을 도울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워낙 조심성이 많다 보니 이 정도 정보로 낯선 이를 섣불리 믿을 수 없었다.

사람 마음은 겪어 봐야 아는 법. 시간이 모든 것을 증명해 줄 터였다.

“알겠어.”

추억몽은 양준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향천소에게서 너한테 안 좋은 소식을 들었는데, 알려줄까?”

“무슨 소식인데?”

“향초와 남생이 지금 전성에 있대.”

추억몽이 웃으며 말했다.

양준은 전혀 놀라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를 선택했어?”

“네 둘째 형님 양소!”

“사람 보는 눈이 있네! 오늘 밤은 시끌벅적하겠는걸.”

양준은 콧방귀를 뀌었다.

추억몽도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더는 조금 전의 긴장감과 막연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양준이 오늘 밤에는 그냥 구경하라고 한 이상, 그녀는 마음을 편히 가지고 다른 걱정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럼 제가 전할 것은 모두 전한 것 같군요. 양준 공자님, 더 시키실 일 없으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추억몽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양준은 이상한 표정으로 그녀를 힐끗 보더니 입을 살짝 내밀었다.

“놀리지 마. 그런 농담은 부담스러워.”

추억몽은 양준의 어색한 표정을 보고 크게 웃었다. 더없이 후련한 기분이었다.

“지금 네 도움이 필요해.”

양준이 정색하고서 말했다.

“무슨 일 있어?”

“관저 밖, 백 장 거리에 있는 느릅나무 위에 노인 두 명이 있어. 그들에게 술 두 주전자만 전해줘.”

추억몽은 깜짝 놀랐다.

“노인 두 명? 누군데?”

“내 생각에는 곽씨 가문의 사람 같아. 아마 곽성진을 지키러 온 걸 거야.”

추억몽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양준이 왜 그쪽에 두 사람이 있다고 확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곽성진을 지키는 이들이라면 항상 그의 곁을 따르는 고수들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둘 다 신유 경지 8단계였다.

‘그들의 실력으로 어떻게 양준에게 종적을 들켰을까?’

추억몽은 의아했지만 양준의 추측이 의외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곽정은 아들 때문에 화병에 걸릴 지경이지만, 곽성진은 어디까지나 곽씨 가문의 독자였다. 지금 아들이 홀로 양준의 관저에 있으니 그를 보호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정말 그쪽에 두 사람이 있다면, 곽정이 몰래 파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추억몽은 의혹에 찬 표정으로 물러갔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잠깐 생각하다가 직접 술 두 주전자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양준의 관저 앞, 백 장 떨어진 곳의 느릅나무 꼭대기.

무성한 나뭇잎이 곽씨 가문 두 고수의 신형을 가렸다. 둘의 호흡은 균일하여 자신들의 기운을 최대한으로 감출 수 있었다. 겹겹의 몽롱한 빛무리가 둘의 몸을 뒤덮고 현묘하게 흐르면서 두 사람의 모습을 감춰 주었다. 누군가 나무 밑에서 올려다보아도 그들의 종적을 발견할 수 없을 터였다. 오직 신식을 펼쳐 훑어 보아야만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시각, 두 고수는 나무 줄기에 앉아 운기 조식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림자도, 형체도 없는 신식으로 양준 관저 전체를 뒤덮고 안의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강한 신식은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수시로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곳에 숨어 있어도 곽성진이 위험해질까 걱정하지 않았다.

곡고의와 영구는 물론, 그들이 신식으로 관저를 뒤덮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악의가 없고, 자신들 또한 상처를 치료해야 했기에 눈감아 주었을 뿐이었다.

이때, 아래쪽에서 바스락바스락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 두 사람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전성에는 지금 몇만 명의 사람들이 체류하고 있었다. 양준의 관저가 외진 곳에 있다고는 하지만, 가끔 행인이 지나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두 사람은 눈을 번쩍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왜… 우리 쪽으로 오는 것 같지.’

두 사람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추억몽이 마치 하녀처럼 손에 쟁반을 받쳐 들고 미소를 머금은 채 이쪽으로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쟁반 위에는 발효된 좋은 술 두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나무 밑에 이르자, 그녀는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마침 한 고수에게로 향했다.

그 고수는 심장이 철렁했다. 무의식적으로 은닉술이 효력을 잃은 줄 알고 살펴보았으나, 은닉술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추억몽의 눈빛은 초점이 나가 있었다. 아마도 마침 그쪽을 본 것이지 그를 바라본 것은 아닌 듯했다.

‘나를 본 건 아니었군!’

“두 분께서는 날도 더운데 나무에 오래 계셨으니 분명 목이 마르실 테지요. 술을 가져왔으니, 거절하지 마시고 목을 축이세요.”

추억몽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다가 손을 뻗어 탁 튕겼다. 잔물결이 퍼져 나가더니 둘의 신형이 추억몽의 눈앞에 나타났다.

남에게 간파된 이상, 둘은 더 이상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하물며 추억몽의 신분도 보통이 아니었다.

둘이 모습을 드러내자, 추억몽은 겉으로 평온해 보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양준을 감탄해 마지않았다.

두 사람은 나무에서 내려오더니 그녀에게 공수했다.

“추 소저, 고생 많으십니다.”

둘은 말하면서 술 주전자를 건네받았다.

“맛있게 드세요.”

추억몽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뒤돌아가려 했다.

“추 소저, 잠깐만요.”

그중 한 명이 소리쳤다.

“무슨 일이세요?”

추억몽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을 우물거리다가 물었다.

“한 가지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추 소저께서는 어떻게 저희를 찾아내셨습니까? 혈시들이 말해 주었습니까?”

두 사람은 혈시들이 자신들의 은신처를 폭로한 거라고 짐작했다.

추억몽은 천천히 고개를 젓고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혈시들은 지금 치료 중이라 외부를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그리고 전 아직 그런 재주가 없고요.”

“그럼…….”

“크흠, 그럼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추억몽은 더는 말하지 않고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녀는 원래 영리하고 계략을 쓰는 데 능했다. 지금 양준 앞에서는 자제하고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자제할 필요가 없었다.

추억몽이 떠난 뒤에야, 둘은 손에 든 술을 바라보며 어깨가 축 처져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도 누가 추억몽에게 말해 주었는지 알고 있었다. 양준이 이런 현묘한 재주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떻게 하지?”

그중 한 명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다른 한 명도 좋지 않은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말이야. 술 두 주전자를 받았으니, 오늘 밤에는…….”

“양준 공자도 참 음험하단 말이야.”

남의 물건을 받았으니 이제 어지간해서 손 놓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술 두 주전자에 불과하지만, 추씨 가문의 장녀가 직접 가져다준 술이었다. 선물은 보잘것없지만 성의가 지극하니, 오늘 밤 양준의 관저에 위험이 닥치면, 두 사람이 수수방관할 수 있겠는가?

만약 다른 이가 술을 가져다주었다면, 심지어 양준이 직접 가져왔다고 해도 두 사람은 진지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추억몽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가주님께서 우리더러 계승 싸움에 참여하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어. 그리고 역대 계승 싸움에서 다른 세력은 신유 경지 7, 8단계 내지 절정의 고수가 참여해도 문제없지만, 8대 세가에서는 신유 경지 5단계 이상은 나선 적이 없단 말이야. 우리가 나섰다가 남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닌담?”

“술 도로 가져다줄까?”

한 명이 제안하자, 다른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가져가.”

“꺼져!”

‘술을 도로 가져다주면, 그건 추 소저의 체면을 밟는 거잖아? 그런 멍청한 짓을 누가 해?’

“어휴!”

두 고수는 서로 마주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술 두 주전자가 오히려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둘은 하는 수 없이, 한 주전자씩 나눠 마셨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술맛은 하나도 안 나고, 온통 씁쓸함과 무기력함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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