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3장. 집에 없는데
양준을 따라잡지 못하고, 종적조차도 감지하지 못하게 되자, 양항과 양영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유 경지 정상의 고수를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이때, 강참이 문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지금이라도 막내 공자의 관저로 가보지 않겠습니까?”
양항과 양영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힐끗 보다가 곧 눈을 반짝였다.
‘그래, 양준이 자리를 비웠으니 관저에는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야.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유 경지 고수도 양준이 데리고 나왔으니 그곳의 수비는 허술하겠지. 둘째 형님과 여섯째도 그곳에 있으니 지금 가면 네 명이서 힘을 합쳐 양준의 관저를 평정할 수 있을 거야.’
서로 마주 본 두 형제는 순간 얼굴에 희색이 감돌았다. 그 와중에 고양풍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닌 듯합니다. 저는 두 분이 각자 관저로 돌아가셔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양준 공자 측에 정말로 신유 경지 정상의 조력자가 있다면 두 분의 관저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양항과 양영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들은 남을 격파할 기회만 노리느라 자신의 상황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큰 건을 노리려고 두 사람 모두 조력자를 많이 데리고 나왔다. 그들의 관저에는 각각 혈시 한 명만 남아 영기를 지키고 있을 뿐, 남아 있는 조력자가 많지 않았다.
지금 양준이 빈틈을 노린다면 그들은 억울하게 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두 사람은 양준을 공격할 생각을 접고, 각자 사람을 거느린 채 부랴부랴 관저로 돌아갔다.
*양준은 전성에서 십 리 떨어진 곳에 양철을 내려놓았다. 그는 양철의 경맥과 진원을 봉인하지 않고 모자를 젖히며 불렀다.
“셋째 형님!”
“막내야, 제법이구나.”
양철이 감탄하며 말했다.
“빈틈을 잘 파고든 거죠.”
오늘 밤에 누구도 양준이 관저에서 나와 일을 꾸밀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양항과 양영은 싸울 때 외부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양준이 어떻게 이토록 손쉽게 사람과 영기를 빼앗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경계심이 있었다면 양준의 이 계획은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난 지금 너한테 잡혔으니 네 공로인 셈이지. 그런데 그 두 녀석에게 사로잡히는 것보다 너에게 제압당한 것이 훨씬 낫구나. 적어도 네가 먼저 나를 공격한 것은 아니니 말이야.”
양철이 덤덤하게 양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 먼저 중도로 돌아가 계세요. 이곳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양준은 첫 탈락자로서 참담한 그의 기분을 알기에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양철은 순간 황당해서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별 뜻 없어요. 전 영기를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말을 마친 양준은 양철이 입을 열기도 전에 몸을 날려 다시 전성으로 돌아갔다.
양철은 넋을 놓고 제자리에 서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안색이 평온해졌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양준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양준은 그를 가문으로 끌고 가서 물자와 바꾸지 않았다. 이는 그에게 체면을 남겨 준 것이었다.
양철은 지난 몇 해 동안 밖에서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하고, 어떤 큰일도 해내지 못한 채 평범하게 지냈다. 그러나 양씨 가문의 자제로서 뼛속 깊이 새겨진 도도함은 잃지 않고 있었다. 그 도도함이 아니었다면 오늘 밤, 그는 그렇게 처절하게 싸우지 않고 진작 백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양준이 그를 가문으로 끌고 가 물자와 바꿨다면 그는 앞으로 양씨 가문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양철은 심호흡을 하고서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별무리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뒤돌아 중도 쪽으로 걸어갔다. 이곳의 전투는 이미 그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계승 싸움에서 탈락한 공자는 더는 싸움에 참여할 수 없지만, 그 휘하 다른 세력의 사람들은 재선택할 기회가 있었다.
양준은 강한 신식으로 자신의 기운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차단하며 번개같이 관저로 돌아갔다.
그가 양철을 놓아준 것은 형제 간의 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사촌 형님들과 애틋한 감정이 별반 없었다. 그냥 오늘 밤 양철이 보여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투항하지 않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수모를 안겨줄 수는 없었다.
*전성 서북쪽, 양준 관저.
반 시진 전. 양철의 관저에서 소란이 일어나던 거의 동시간대, 양준의 관저도 떠들썩했다.
양항이 얻은 정보는 정확했다. 첫날 밤 8대 공자 중에서 맏이 양위가 조용히 체통을 지키고 있었고, 그 외에는 여덟째 양천만이 가만히 관저에 있었다.
먼저 양소와 엽신유가 많은 고수들을 거느리고 양준의 관저로 찾아왔다. 그들이 미처 공격하기 전에, 양신과 추자약도 뒤따라 도착했다. 양측은 양준의 관저 앞에 멈춰 선 뒤,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밤, 그들은 양준을 공격하러 온 것이기에 서로 척을 질 필요가 없었다. 다들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중전 앞, 곽성진은 태사의(太師椅)에 앉아 부채를 부치고 있었고, 양옆에는 아리따운 두 명의 미인이 그에게 술과 안주를 먹여 주고 있었다. 아주 느긋한 모습이었다.
양소와 양신이 찾아와도 그의 기분을 깨뜨리지 못했다.
양소의 옆에 서 있는 엽신유는 늘씬한 몸매에 눈부신 미소를 가진 미인이었다. 백옥 같은 피부에 굴곡진 몸매가 매혹적이었고, 자태가 아름다웠다. 엽씨 가문의 큰아가씨인 그녀는 추억몽처럼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젊은 세대 중에서는 나름 명성이 있는 편이었다.
양소의 뒤에는 향초와 남생이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특히 남생은 잘린 손가락 두 개를 어루만질 때면 얼굴에 매서운 독기가 서렸다. 그 두 손가락은 양준의 강요를 못 이겨 스스로 자른 것이었다. 이런 원수와는 절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법, 지난 몇 달간 그는 매일같이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양소의 동맹은 실력도 강하고 인원도 많았다. 물론 양신도 약하지 않았다. 추자약의 도움을 받고, 또 많은 조력자를 끌어들인 그는 단기간 내에 양소와 대항할 수 있는 수준이 될 터였다.
반면 양준의 관저에는 곽성진이 음주하고 있는 것 외에, 추억몽과 향천소가 그의 옆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곡고의가 홀로 철탑처럼 중전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영구는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림자 같은 혈시가 어둠 속에 잠복해 강력한 일격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추억몽과 추자약의 시선이 마주쳤다. 추억몽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추자약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다가 곧 다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는 더 이상 누님 앞에서 겁먹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했다.
동시에 향초와 향천소도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한 명은 무덤덤했고, 다른 한 명은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위기는 사뭇 긴장되었다.
“여섯째야, 막내 쪽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양소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양신도 웃으며 대답했다.
“형님께서 고기를 드시면 전 국물이라도 얻어 먹어야죠. 설마 독식할 생각은 아니시죠?”
“물론 아니지.”
양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한참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가 준이를 데려갈 테니 넌 영기를 가져가거라. 사이좋게 나눠 가지자꾸나.”
“둘째 형님의 말씀에 따르죠.”
양신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양소의 제안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는 무심코 향초와 남생을 힐끗거리면서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렸다. 눈빛에는 경시의 뜻이 그대로 드러났다.
양준과 그들 사이의 은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는 양소가 영기를 포기하고 사람을 선택한 이유기도 했다. 향씨, 남씨 가문의 합류로 그의 세력이 크게 강해진 만큼, 그 역시도 조력자들에게 뭔가 성의를 보여줘야 했던 것이다.
양준이 제압당하면 체면을 구기는 것이기에 향초와 남생도 만족스러워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두 사람은 더더욱 그에게 충성을 다할 터였다.
“어이, 너희 둘, 서 있는 거 안 힘드냐? 좀 오지 그래?”
이때, 곽성진이 건들거리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양소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곽 형. 준이더러 직접 나와서 얘기하라고 하세요. 저도 그 녀석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양준?”
곽성진이 킬킬 웃더니 말했다.
“집에 없는데.”
“집에 없다고요?”
양소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곽성진이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농으로 받아 넘겼다.
“지금 집에 없으면 어디 있겠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디서 풍류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지. 흐흐. 어쨌든 집에 없어. 못 믿겠으면 추억몽에게 물어봐. 얘는 양준이 어디 갔는지 알 거니까.”
곽성진은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몸을 일으키고 부채를 쫙 펼치며 풍류 공자의 모습을 연출했다.
양소는 시선을 추억몽에게 돌렸다. 추억몽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제가 없다고 말하면 둘째 공자께서는 믿으실 겁니까?”
그녀가 아리송하게 말하자, 양소는 인상을 구긴 채 양준이 꿍꿍이를 꾸미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는 곧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믿습니다.”
첫날 밤은 매우 민감한 시기인데 양준이 어찌 관저에 없을 수 있겠는가?
‘분명 어딘가 숨어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걸 거야.’
“그럼 둘째 공자께서 마음껏 찾아보시지요. 정말 찾아낼 수 있는지 한 번 보자고요.”
추억몽은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양준을 죽일 놈이라고 욕하고 있었다. 양준이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미리 말을 하긴 했지만, 그녀가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멋대로 행동했다. 양준이 도대체 어디로, 뭘 하러 간 것인지 그녀도 전혀 아는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