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4장. 영무살
“괜찮습니다.”
양소는 짜증난 표정으로 목청을 높여 말했다.
“준아, 네가 직접 나와라. 절대로 널 난처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양소가 두 번이나 말했지만, 양준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남생이 비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막내 동생이 공자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는군요. 이렇게 된 이상,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바로 공격하시죠. 아마 막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는 어서 빨리 양준을 제압한 다음, 실컷 비웃는 것으로 지난 몇 달 동안의 몸과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싶었다.
“형제 간의 일에 다른 이는 끼어들지 마시오.”
양소가 나지막하게 호통쳤다.
남생은 무안해서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도 더 이상 뭐라고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향초는 남생이 면박 받은 것을 보고 몸을 사리기는커녕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바로 공격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의 수비는 강해 보이지도 않는데 여섯째 공자와 손잡으면 어찌 평정할 수 없겠습니까? 우리는 예를 갖추었는데 그걸 무시한 건 저쪽입니다.”
향초는 겉과 속이 다른 양소를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양소는 겉으로 남생을 꾸짖는 듯 보였지만, 속으로는 남생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 다만, 체면 때문에 한마디 한 것뿐이었다. 이런 때는 누군가가 옆에서 부채질해 결정을 내리게 해야 했다. 그래야 양소는 주변에 부추김에 어쩔 수 없이 결정을 내린 것이 되고, 나중에라도 형제 간의 정을 무시한, 매정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똑같이 겉과 속이 다르다 보니 양소의 속마음을 누구보다 훤히 꿰뚫고 있었던 향초는 계속해서 양소를 부추겼다.
양소는 난감한 표정으로 잠깐 생각해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향 형의 말이 맞습니다. 형님으로서 저는 막내에게 할 만큼 했습니다. 막내가 제 체면을 봐주지 않으니 저도 할 수 없지요.”
양소는 고개를 돌리고 양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막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여섯째 너는 영기를 가져가거라.”
양신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볼 생각에 얼굴 가득 웃음기가 넘실거렸는데, 양소의 말을 듣고 그만 멍해졌다.
곧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이 어느새 둘째 형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막심했다.
방금 전, 양소는 사람과 영기를 나눠 가지자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양준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가져갈 것은 영기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양신이 나서서 영기를 빼앗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양소의 의도를 눈치챈 양신은 웃음기가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다.
양소는 계속해 웃으며 말했다.
“너 혼자 가서 가져가거라. 널 배신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다녀와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꺼낸 것을 보면 양소도 성의를 보인 것이었다. 양신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자신이 데려온 사람들을 훑어본 뒤, 신유 경지 4단계 무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중전에 가서 영기를 가져오도록 해.”
그 사람은 양신의 외가에서 보낸 조력자로 역시 일등 세력 출신이었다. 그는 실력이 약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강한 것도 아니었다. 양신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전 앞에 서 있는 곡고의를 바라보며 난감해했다.
혈시당 고수는 위명이 자자했다.
“뭘 두려워하는 것이냐!”
양신이 나지막하게 호통쳤다.
“막내의 혈시들은 중상을 입어 본바탕이 손상됐다. 평소 실력의 3할도 내지 못하지. 게다가 양씨 가문의 규칙 때문에 먼저 공격할 수도 없으니 네가 먼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무사할 것이다.”
“제가 영기를 가져와도 혈시들은 상관하지 않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신유 경지 4단계의 무인은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건 아니다. 혈시들은 그저 반격만 할 수 있다. 네가 영기를 빼앗으려 든다면 그들은 당연히 막으려 들 테지. 그래도 네가 잽싸게 영기를 들고 온다면 그들의 지금 상태로는 널 막지 못할 것이다.”
양소가 고개를 저으며 설명해 주었다.
“어서 가거라!”
양신은 그가 꾸물대자 짜증이 났는지 버럭 화를 냈다.
신유 경지 4단계 무인은 하는 수 없이 무리를 벗어나 경계 어린 시선으로 곡고의를 주시하면서 신식을 최대한으로 펼쳐 다른 혈시가 어디 숨어 있는지 찾으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혈시가 어디에 숨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곽성진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부채를 흔들었고, 추억몽도 차분한 미소를 띤 채 앞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고소해하는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의 시선에 신유 경지 4단계 무인은 더욱 긴장되었다.
그는 온몸에 힘을 가득 모은 채 경계한 상태로 천천히 걸으며 곽성진과 추억몽을 지나쳤고, 중전 앞에 서 있는 곡고의를 긴장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흥!”
곡고의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그 무인은 깜짝 놀라 몸을 흠칫 떨더니 하마터면 숨기고 있던 초식을 날릴 뻔했다. 그가 초식을 날리는 순간, 곡고의도 반격할 수 있었다.
“하하하하!”
곽성진은 이 광경을 보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추억몽도 입을 오므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부하의 추태 때문에 양신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그 무인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스스로 창피했는지 씩씩거리며 중전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그를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내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는, 곧 무인이 기쁜 얼굴로 영기를 들고 나왔다.
“공자님, 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인영이 스쳐 지나가더니 또다시 조용해졌다.
그 무인은 영기를 든 채, 중전 입구에 서 있었다. 몸 절반은 이미 중전을 나섰지만 다른 한 발은 영원히 걸음을 떼지 못했다.
양소와 양신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들의 뒤에 서 있던 무인들도 똑같이 안색이 변했다.
“죽었습니다!”
양소의 옆에 있던 혈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의 시선은 흔들리고 있었다.
“영구의 영무살(影舞殺)입니다!”
“빠르군!”
양소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영구가 숨어 있는 곳을 보았느냐?”
“보지 못했습니다.”
그 혈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영구의 암살 기술과 은신술은 혈시당에서도 손에 꼽힙니다. 설령 당주님과 부당주님이 나서서 찾더라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찾을 수 없습니다.”
잠깐 뜸을 들이고서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다만 이상한 것이, 영구는 분명 중상을 입었을 텐데 어찌 이런 힘을 낼 수 있을까요?”
“상처가 다 나은 게 아니냐?”
양신이 놀란 말투로 물었다. 부하가 갑자기 죽었으니 그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양신의 옆에 있던 혈시도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곡고의와 영구는 상처가 아주 심각했습니다. 오늘 낮에 만났을 때도 기력이 허했는데 낮 동안에 회복되었을 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패혈광술이겠구나!”
양소가 자신만만하게 결론을 내렸다.
앞서 말을 하던 두 혈시는 그 말을 듣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슬픔이 서렸다.
‘영구가 지금 패혈광술을 펼쳤다면 아마도 이번이 그의 마지막 전투겠지. 오늘 밤 이후로 다시는 영구를 볼 수 없을 거야.’
혈시들은 모두 친분이 두터웠다. 서로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친형제보다 더 끈끈한 사이로,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상대방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정도의 두터운 사이였다.
“지금 몸 상태로 패혈광술은 얼마나 오래 펼칠 수 있느냐?”
양소가 물었다.
혈시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나지막하게 말했다.
“반 시진만 지나면 그의 생명력은 고갈될 것입니다.”
“그럼 기다려야겠군. 반 시진이 지나고 다시 얘기하자.”
양소는 결정을 내렸다.
관저는 짧은 평온을 되찾았다. 오직 곽성진만이 태사의에 다시 앉아 술을 마시며 알 수 없는 곡을 흥얼거렸다. 그의 느긋한 모습에 사람들은 부아가 치밀었다.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기다림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반 시진 뒤에 양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됐다.”
양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얼굴에 단호한 기색을 띠고 입을 열었다.
“추 형, 이번엔 추씨 가문의 두 분도 같이 보내 주시죠. 반드시 영기를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추자약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공자의 말에 따르지요.”
말을 마친 그는 추씨 가문의 신유 경지 5단계의 두 고수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그 둘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발걸음을 떼는 순간, 추억몽이 갑자기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라면 두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을 거야. 넌 너무 경솔해.”
추자약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냉소했다.
“누님, 그렇게 겁을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양준은 오늘 분명히 탈락하게 될 것입니다. 누님은 줄곧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지만, 오늘 처음으로 실망할 겁니다. 저희 쪽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막으려는 겁니까?”
“미련하고 꽉 막혔구나!”
추억몽은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양신은 그들 오누이가 말을 마치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모두 나오거라. 절반은 곡고의를 묶어 두고, 나머지는 영기를 가져와!”
곧이어 인영 열몇 개가 동시에 날아갔다. 그들 중 절반은 신유 경지였는데 실력이 가장 강한 이는 신유 경지 8단계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실력이 약하지 않았다.
신유 경지 8단계의 무인은 네다섯 명을 거느리고 제자리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곡고의를 겹겹이 둘러쌌다. 그들은 공격하지 않고 그저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다. 곡고의가 중상을 입은 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감히 먼저 공격하지 못했다.
곡고의는 꿈쩍도 하지 않고 덤덤한 시선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일제히 중전으로 뛰어갔다. 그들은 죽은 사람 손에서 영기를 빼내려고 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영구는 이미 반격할 힘이 없을 거야. 그 말인 즉, 저 영기를 손에 넣는 사람이 공을 세우는 거지. 이제 상을 두둑이 받을 수 있겠지?’
일고여덟 개의 손이 동시에 영기를 향해 뻗었다.
바로 이때, 어둠 속에서 흐릿한 빛이 폭발하더니 갑자기 어디선가 왜소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는 양손에 검은빛이 번뜩이는 비수를 들고서 음산한 빛을 뿜고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던 왜소한 그림자는 순식간에 열몇 개로 나뉘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음산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고, 하나같이 살인에 거침이 없었다.
바로 영무살이었다!
이내 처참한 비명소리와 함께 선혈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