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8장. 기적을 만들 수 있는 남자
“그럼요. 밤은 길고, 잠은 안 와서 셋째 형님 쪽을 한 바퀴 돌고 왔습니다. 형님들께서 오늘 밤에 오실 줄은 정말 몰랐네요. 일찍 알았다면 제가 남아서 형님들을 잘 접대했을 텐데요.”
“셋째의 관저에…….”
양소는 미간을 좁혔다. 문득 막내 동생의 용기가 가상하다고 느껴져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입을 뗐다.
“셋째는 어찌 되었느냐?”
“셋째 형님은 패배했습니다.”
양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다섯째 형님과 일곱째 형님이 연합하여 공격하는 바람에 셋째 형님은 버티지 못하셨죠.”
“셋째가 버티지 못한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준이 네 쪽이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구나. 소리 소문 없이 이렇게 많은 조력자들을 모았다니, 참 대단하구나.”
“과찬이십니다.”
양준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셋째와 영기는 누가 가져갔지?”
양소가 묻자, 양신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내일이 되면 자연스레 아시게 될 겁니다.”
양준은 웃기만 할 뿐, 확답을 주지 않았다.
양소도 캐묻지 않고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물러가마. 준아, 앞으로 기회가 많을 거야. 다음 번에 올 때는 완벽하게 준비해서 올 테니 실망시키지 말거라.”
“최대한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
“가자!”
양소는 사람들을 거느린 채, 신속하게 철수했다.
향초와 남생은 떠나기 전에 겁먹은 눈빛으로 양준을 힐끗 보았다. 지난번 태방산에서 양준이 남겨 준 인상은 너무 깊었다. 그들은 줄곧 양준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정작 본인을 만나게 되자 저도 모르게 두려움에 떨었다.
양소가 떠나자, 양신도 더 머무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동료의 시체들을 챙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계승 싸움 첫날 밤 싸움이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되었다.
*봉신전, 8대 세가의 태상장로 여덟 명이 천천히 눈을 뜨며 신식을 거두어들였다. 혼탁하던 눈동자에는 하나같이 놀라움과 감탄이 흘러넘쳤다.
실력이나 나이가 그들 정도에 이르면 세상 만사에 감정의 기복을 느끼기 어려웠다. 하지만 오늘 밤, 그들의 감정 기복을 이끌어 낸 한 사람이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다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서북쪽에 있는 건 몇 째의 관저지?”
“막내 녀석인 것 같은데.”
사람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찬사를 보냈다.
“자고로 뛰어난 인재는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는 법이지.”
양씨 가문의 태상장로 양립정(楊立庭)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제 세상 만사에 더 바라는 것이 없지만, 오늘 밤 신식으로 양준의 행동을 살핀 그는 크게 안도감을 느꼈다. 양준은 양씨 가문의 후계자로 손색이 없었다.
추씨 가문의 태상장로 추도인(秋道人)이 고개를 끄덕였다.
“담이 크고 실력도 흠잡을 데 없어. 하지만 계승 싸움에서는 그 두 가지만으로 이기기 어려울 것인데… 조력자가 더 있을지 모르겠군.”
“그 녀석을 잘 지켜보자고. 이번 계승 싸움은 여느 때보다 더욱 흥미진진할 것 같으니.”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여덟 명의 신유 경지 이상의 태상장로들은 모두 8대 세가의 선조급 되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밤이 되기 전에 이미 신식을 전성 곳곳에 침투시켜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양준 또한 그들의 신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양준이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 그토록 강하고 괴이한 신식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느냐였다. 그의 경지로 보면 신식이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유일한 가능성은 몸에 위력이 강한 신혼 비보를 지니고서 신식의 위압감을 풍겨 사람들을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된다.
여덟 명의 장로들은 양준의 활약에 관심이 갔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계승 싸움에 참여하지도, 간섭하지도 않을 것이다. 양준이 이기면 좋겠지만, 져도 상관없었다. 물론, 양씨 가문의 양립정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여덟 명의 장로들이 바다와 같은 신식을 거둔 다음에야 양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웠던 옅은 경계심이 드디어 사라졌다. 그는 몰래 봉신전이 있는 방향을 힐끗 보았다.
그는 한 명도 아닌, 여러 명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신식이 너무나 강해 자신의 행적을 숨길 수 없었다. 소문을 떠올린 그는 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지 금방 알아챘다.
‘어서 신유 경지를 돌파해야겠어. 식해의 보호에, 온신련의 보조 작용까지 더해진다면, 분명 여덟 명의 감시를 피할 수 있을 거야. 그래야 일을 편히 할 수 있지.’
남에게 감시당하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들이 직접 움직일 일은 없겠지만, 특히나 비밀이 많았던 양준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양준!”
추억몽이 기쁜 얼굴로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양준은 아래쪽을 훑어보고 말했다.
“사람을 시켜서 시체의 혈흔을 모두 깨끗하게 치우라고 해.”
남겨진 시체는 모두 그의 관저 사람들이었다. 추우당에서 6명, 향씨 가문에서 7명이 죽었다. 13구의 시체가 중전 앞에 있으니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날려 곡고의의 앞에 나타났다.
이번 전쟁에서 곡고의는 혼자 힘으로 거의 열 명에 달하는 신유 경지 무인들의 공격을 버텨 냈다. 그중에서 몇 명은 신유 경지 7, 8단계였다. 그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그가 이토록 애쓰지 않았다면 오늘 밤의 결과가 어찌 되었을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지금 곡고의는 금방 회복된 몸에 또 중상을 입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상처가 벌어져 속살이 들여다보이는 모습이 더없이 참혹했다.
“공자님의 분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곡고의는 이를 악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주 잘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을 받은 곡고의는 씨익 웃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몸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때,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귀신처럼 나타나더니 곡고의가 쓰러지지 않게 붙잡아주었다.
“데리고 가서 쉬게 해.”
양준이 영구에게 말했다.
“네.”
영구는 고개를 끄덕이고 곡고의를 부축한 채, 중전을 벗어났다.
양준은 또 고개를 돌려 복면인들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두 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두 복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준에게 공수한 뒤, 바람같이 사라졌다.
곽성진은 줄곧 두 복면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들이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들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으며 연신 음산한 냉소를 날렸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곽성진은 양준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참 대단해! 나까지 네 계략에 끌어들이다니.”
양준은 웃는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저들이 없었어도 오늘 밤은 안전했을 거야. 기껏해야 네가 잡혀갔겠지.”
“그래, 그래. 말을 하지 말아야지.”
곽성진은 양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성기 상태인 영구가 숨어 있자 양소와 양신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만약 두 사람이 진심으로 협력해 데려온 혈시들 중 한 명으로 영구의 손발을 묶었더라면 다른 한 명이 영기를 빼앗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협력할 리 있겠는가?
서로가 모두 적수였다. 이익이 있으면 합치고, 이익이 없으면 갈라지기 마련인데 누가 남을 위해 희생하려 들겠는가?
양준은 이 점을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간 크게 외출을 감행한 것이었다.
중전에서는 한창 추우당과 향천소 사람들이 시체를 거두고 있었다. 양준은 한 바퀴 훑어보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계승 싸움은 너희가 원해서 참여한 거야. 앞으로 몇 명이 죽을지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거다.”
그 말을 들은 추우당과 향씨 가문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를 도와주기 위해 계승 싸움에 참여했다가 전사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고작 그런 말이라니, 그들은 양준이 인간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위로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양씨 가문의 공자면 뭐? 죽은 사람들도 가축이 아니라 사람 목숨이라고!’
사람들의 안색이 차가워지자, 양준이 말을 덧붙였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새기고 있을 거야. 나중에 손실을 몇 배로 보상해 주지. 그러니 살아남아서 기다려줘.”
추억몽은 금세 표정이 밝아지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말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양준과 알고 지낸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짧은 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양준이 무언가를 약속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약속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순간, 추억몽은 미래에 부푼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녀는 양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가장 힘들고 초라할 때, 굳건히 옆을 지켜 줄 조력자가 필요하지, 이익만 따지며 엮이려는 인간은 필요 없다고.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가장 약할 때, 먼저 찾아와서 손을 내민 조력자들이었다. 어떤 연유에서 오게 되었든 이미 그의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계승 싸움은 일찍 참여할수록 보답도 크게 받았다. 한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가 가장 약소할 때 힘이 되어 주어야 하는 법. 그 사람이 강해진다면 더 이상은 기회가 없을 것이다.
추억몽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양준은 기적을 만들 수 있는 남자였다.
*관저에서의 전투로 피해가 심했다. 추우당과 향씨 가문의 사람들은 시체를 치우고 난 뒤, 바로 보수 작업에 투입되었다. 쉴 시간마저 없었다.
추억몽은 많지 않은 부하들을 지휘해 양준의 관저를 보수했다.
곽성진은 언제부터인지 모습을 감추었다. 누구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