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9장. 중도에 이름을 날리다
전성 밖, 곽성진이 활개치며 걸어가다가 십 리쯤 되어서 발걸음을 멈추고 나지막하게 불렀다.
“나와. 거기 숨어서 뭐해?”
그러자 신유 경지 8단계의 고수 두 명이 어둠 속에서 나오더니 곽성진 앞에 서서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
곽성진은 복잡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한참 뒤에야 말했다.
“아버지가 날 보호하라고 시키신 거야?”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주님께서 도련님이 오늘 밤에 사고를 당할까 비밀리에 지켜보라고 하셨습니다.”
곽성진은 곽씨 가문의 독자였다. 곽정은 낮에 아들이 양준을 선택하는 것을 반대하고 화를 내며 떠나갔지만, 어찌 아들을 이토록 위험한 곳에 남겨 두고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겠는가? 당연히 대비를 해둘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비밀리에 지켜보라고 했잖아!”
곽성진은 이를 악물고 분노했다.
“비밀리에 지켜본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 왜 뛰쳐나온 거야? 양소의 혈시는 날 죽일 담이 없어. 기껏해야 잡혀갔겠지. 잡혀가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을 거라고! 그런데 너희 둘은… 복면을 하고도 수상쩍은 티를 내서는……. 그나마 그들이 너희를 알아보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우리 곽씨 가문이 망신만 당할 뻔했잖아?”
중도의 8대 세가에서 계승 싸움에 내보내는 고수는 양씨 가문의 혈시들을 빼고는 신유 경지 5단계를 초과하면 안 되었다. 그런데 곽씨 가문의 신유 경지 8단계 고수가 두 명이나 나서서 싸웠으니, 소문이라도 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두 고수는 서로를 마주 보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희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 무슨 사정? 어디 한 번 말해 봐.”
곽성진이 두 사람을 흘겨보았다.
두 고수는 난감한 얼굴로 우물쭈물하며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곽성진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겨우 술 두 주전자에 매수당한 거야? 이럴 바에는 그냥 추씨 가문이나 양씨 가문으로 가 버리지 그래? 우리 곽씨 가문에는 너희들을 대접할 좋은 술이 없었나 봐?”
“도련님, 화 푸십시오.”
두 사람은 당황하며 다급히 말했다.
“문제는 추 소저께서 직접 술을 들고 오셔서 저희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곽성진은 입을 삐죽거리며 그들을 노려보다가 이를 악물고 욕설을 퍼부었다.
“간사한 것들 같으니라고! 멍청한 놈들, 너희가 얼마나 허투루 숨었으면 그들에게 행적이 들켰겠어.”
곽씨 가문의 두 신유 경지 고수는 자신들이 잘 숨지 못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도 아직까지 자신들이 어떻게 노출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다.
“난 이제 끝이야.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곽성진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두 고수는 대경실색했다. 그들은 곽성진을 오랫동안 따라다녔지만 그가 이렇게 심각하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벌거벗고 전성을 열 바퀴 뛰어야 되게 생겼는데, 이거 완전 내 인생 끝난 거 아니야?”
곽성진이 툴툴대며 말했다.
두 고수의 안색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우리 도련님은 주색잡기에 능하지만, 이런 요상한 취미는 없으셨는데.’
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은 알몸으로 전성에서 뛰어다니는 곽성진의 모습을 본 여인들이 비명을 지르는 광경이 상상되었다. 순간 두 사람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두 사람은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는, 곽성진에게 물었다.
“도련님,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도련님께서 왜… 그러셔야 합니까? 누가 협박이라도 한 것입니까?”
“협박당한 게 아니야. 내가 충동적으로 양준 놈과 내기를 했단 말이다.”
낮에 내기를 하던 광경을 떠올린 곽성진은 화가 나 이를 갈았다.
‘양준 그놈은 분명 계획이 있었어. 내가 멍청하게 오늘 밤 그가 반항할 힘이 없는 줄 알고 금우응에 홀딱 빠져 그의 내기에 응한 거야.’
그때 곽성진은 양준이 멍청해서 한 치 앞도 못 본다고 여겼지만, 지금 보니 멍청한 사람은 양준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낮에 했던 내기에 대해 간략하게 말하자, 곽씨 가문의 두 고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곽성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곽성진은 밖에서 제멋대로인데다 방탕하여 명성이 좋지 않았지만,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확실히 망나니 짓을 많이 하고 다녔어도 누군가와 내기를 한 뒤 번복한 적은 없었다.
애당초 몸에 지닌 돈이 부족해 현광회를 양준에게 차압으로 건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부심이 강해서 내기든, 인정이든 빚지는 것을 싫어했다. 내기에서 졌으니 그는 정말 전성에서 벌거벗고 열 바퀴 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이 만약 곽씨 가문까지 전해진다면 곽정은 아마도 피가 거꾸로 솟아 죽을지도 몰랐다.
“내가 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묘책이 있을까? 얘기해 봐.”
곽성진은 옆으로 가더니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고수는 눈을 마주쳤다. 그중 한 명이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도련님, 제 생각에는 양준 공자도 도련님께서 정말 알몸으로 전성을 열 바퀴 뛰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도련님도 그분의 동맹이신데 체면을 봐주시겠지요. 아니면 직접 그분과 얘기를 해보십시오. 혹시라도 인심을 써서 넘어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헛소리!”
곽성진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내가 그 녀석과 오래 알고 지낸 건 아니다만 어지간히 성격을 파악했어. 그 녀석은 인정머리도 없고, 독하고 매정해서 나보다 더 상대하기 어렵다고. 내가 아무런 성의도 보이지 않으면, 분명 나더러 열 바퀴 뛰라고 할 거야. 어쩌면 지금 날 찾고 있을지도 몰라.”
말하면서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젠장, 그놈의 실력이 뛰어나서 문제지.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놈을 흠씬 두들겨 패서 화풀이를 했을 거야.”
그날 밤의 광경, 그리고 양준이 일격으로 향천소를 쓰러뜨리던 모습을 떠올린 곽성진은 울화만 쌓일 뿐이었다. 다들 똑같이 8대 세가의 공자인데 왜 유독 양준만 그리 대단하다는 말인가?
“도련님, 그러시면 무엇으로 성의를 보이려고 하십니까?”
고수 중 한 명이 곽성진의 말에 담긴 다른 뜻을 알아듣고 물었다.
“나도 몰라. 그래서 묻는 거잖아.”
고수는 한참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쨌든 도련님은 이미 대외적으로 양준 공자의 동맹이십니다. 가주님께서 반대하셨지만 결국 괜찮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양준 공자는 사람도, 물자도 부족한 상황입니다. 우리 곽씨 가문에는 재력도 넘쳐나고 인재도 넉넉하니, 가주님께 말씀드려 사람과 물건을 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그럼 양준 공자도 더는 벌칙의 이행에 관해 얘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곽성진은 그 말을 듣고 히죽히죽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 고수를 가리켰다.
“이건 네가 말한 거다. 난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어. 이제 돌아가 아버지께서 물어보시면 그대로 얘기해.”
그는 순간 당황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제야 곽성진이 진작 이럴 계획이 있었는데, 남이 대신 말을 꺼내도록 유도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되면 곽정이 물어도 변명할 거리가 있었다.
곽정은 아들이 제멋대로 내린 결정에 화가 나 아무 지원도 해주지 않았지만, 두 고수가 옆에서 설득한다면 곽씨 가문에서 인력과 물자를 지원받을 수도 있었다.
“됐다, 이제 집에 가자. 날이 밝기 전에 우선 이 일부터 해결하자고. 신용을 지키니 마니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곽성진은 뒷짐을 지고 성큼성큼 중도로 걸어갔다. 뒤에서 두 고수도 터덜터덜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이때, 곽성진의 표정은 매우 진지해졌다. 평소의 방탕함과 방자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오늘 밤 전쟁에서 사람들은 그저 두 혈시가 보여준 강한 수비 능력에만 감탄했고, 또 자신의 망나니 같은 수법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 누구도 두 혈시가 어떻게 반나절 사이에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전성기 상태로 몸을 회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곽성진은 자신이 양준을 얕보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날이 저물기 전까지 그는 양준이 오늘 밤 탈락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양준이 아무리 뭔가를 준비했어도 상황을 뒤집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준은 손쉽게 관저를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외출까지 감행하고 돌아왔다.
양씨 가문의 막내 공자는 확실히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양준뿐만 아니라 양씨 가문의 다른 공자들도 하나같이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원래 시간을 때우며 재미나 보려고 이번 계승 싸움에 참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은근히 기대되기 시작했다. 이번 계승 싸움의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될지, 양준이 승리할지 패배할지 궁금해졌다. 이내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곽성진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계승 싸움 첫날 밤, 두 차례 전쟁이 있었다. 전쟁은 각각 양철의 관저와 양준의 관저에서 진행되었다.
두 차례 전쟁의 최종 결과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두 번의 전쟁에 모두 등장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양준이었다.
양철 관저의 전투에서 양준은 혼란한 틈을 타 사람과 영기를 모두 가져갔다. 자신의 관저에서는 본인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방어했다. 이는 대단한 성과였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차마 믿을 수 없어 거듭 확인해 보고 나서야 사실임을 믿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 핵폭탄급 소식도 공개되었다. 양준이 곽성진을 동맹으로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추씨 가문의 추억몽도 가문에서 잠시 이탈해 그의 조력자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곽성진은 별 볼일 없는 방탕아로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그렇다고 해도, 왜 추억몽마저 가문을 이탈하면서까지 그를 돕는다는 말인가?
추씨 가문 큰아가씨의 명성은 매우 드높았다. 안목이 높고 정확하기로 소문난 그녀가 이런 행보를 보이니, 사람들은 여러모로 이번 계승 싸움의 판도를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