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2장. 계속 찾아오는 조력자
여송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러나 그는 표정을 가다듬고 들어와서는 추억몽을 발견하자 얼른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여송이 사촌 누님을 뵙습니다.”
추억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는 길에 수고 많았어.”
여송은 웃으며 대답했다.
“고생은요. 물건을 좀 가져왔을 뿐인데요.”
말을 하면서 그는 인파를 둘러보며 물었다.
“어느 분이 양준 공자이십니까?”
양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접니다.”
여송은 시선을 양준에게로 돌리더니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양준 공자를 뵙습니다. 공자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추억몽은 이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송의 말투에는 도발의 의도가 다분했다.
양준은 덤덤한 얼굴로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여 가주님께 신세를 졌군요.”
여송은 양준이 이렇게 덤덤하게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지라 더 이상 도발하지 못하고 말을 전했다.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사항입니다. 물자는 이미 전달했습니다. 제가 데려온 사람들도 편하게 다루십시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편하게 볼일 보세요. 저희 관저가 제법 크니 추억몽이 머무를 곳을 배치해 드릴 겁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씨 가문의 가주인 여량이 태도를 바꾼 것에 대해 양준은 뜻밖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씨 가문의 사람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가 잘못 추측한 것이 아니라면 여송은 진작 전성에 도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 나타나지 않고 오늘 찾아온 것을 보면, 어젯밤에 자신이 탈락하는지 보려고 하루 기다린 것이 분명했다.
이러한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죽절방에 시켜 알아보아야 했다. 이렇게 뒤늦게 찾아온 조력자에 대해 양준은 동씨 가문이나 추억몽과 똑같이 생각할 수 없었다.
추억몽이 여송 일행의 처소를 배치하려는데, 향천소가 또 뛰어 들어오며 말했다.
“또 누가 찾아왔…….”
“어느 세력인데?”
“자미곡이야!”
추억몽은 눈을 반짝거리며 기쁜 얼굴로 말했다.
“소만이가 사람을 데리고 왔구나.”
그녀는 급히 양준의 앞에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는 소만이가 널 돕기 싫어서 오지 않은 게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소만이는 여자인 데다 자미곡에서 지위가 있어도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결정권이 없거든. 오늘 사람을 데리고 온 것도 분명 힘을 많이 쓴 결과일 테니 꼭 고맙다고 인사해.”
낙소만과 추억몽의 처지는 거의 비슷했다. 두 사람 모두 여인인 데다 각자의 세력에서 신분이 낮지 않았다. 하지만 여인의 몸으로 태어난 탓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나도 알아.”
양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같이 맞이하러 가시죠.”
그의 말을 들은 추억몽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양심이 있긴 하네.”
양준은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추억몽은 가기 전에 여송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넌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내가 돌아와서 묵을 곳을 배정해 줄게.”
여송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시를 당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방금 전, 그가 왔을 때 양준은 이렇게 나가서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저 밖, 자미곡 일행이 낙소만을 선두로 조용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양준과 추억몽이 함께 나왔고, 뒤에는 동경한과 남초접이 뒤따랐다.
“추 언니!”
낙소만은 한눈에 추억몽을 알아보고 반갑게 부르며 성큼 다가서려 했다. 하지만 양준이 옆에 있는 것을 보자, 발걸음을 멈추고 목을 움츠렸다. 겁을 먹은 눈치였다. 양준에 대한 공포는 이미 그녀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녀는 양준을 보기만 해도, 심지어 떠올리기만 해도 겁이 났다. 이번에도 추억몽과 함께하는 게 아니었다면 그녀가 어찌 양준의 편을 들 용기를 냈겠는가.
“소만아.”
추억몽은 그녀가 담이 작은 것을 알고 있기에 얼른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다독여 주었다.
“자미곡의 범홍이 양준 공자를 뵙습니다.”
자미곡 일행 중에서 한 청년이 걸어 나오더니 웃는 얼굴로 공수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 예의 차리지 말자.”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범홍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지난번 능소각에서 저지른 잘못은 용서해 주라. 사과할게.”
양준은 눈을 반짝이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범 형이 날 도와주러 온 것만으로도 영광이지. 예전에 있었던 일은 이미 다 잊었어.”
그 당시, 양준에 대한 범홍의 태도도 좋지 않았지만, 적어도 백운풍처럼 가문을 믿고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때문에, 범홍과 있었던 일에 대해 양준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것이다.
양준의 말을 들은 범홍은 기쁜 얼굴로 연신 감사의 뜻을 표했다.
“들어가서 차나 한잔하자. 마시면서 얘기하자고.”
양준이 열정적으로 접대했다.
자미곡에서 온 사람들은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여씨 가문 사람들과 비교해도 실력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범홍과 낙소만을 따라온 것이니, 당연히 낙소만의 명령을 따를 것이고, 낙소만과 추억몽의 관계를 생각해 봤을 때 결국 그렇게 되면 자미곡의 사람들은 추억몽의 명령을 따르는 셈이었다.
‘진정한 조력자가 될 수 있겠군!’
양준은 마음속으로 자미곡의 위치를 정했다.
편전으로 돌아온 그는 각 세력의 인물들을 일일이 소개했고,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야 착석했다.
여송은 원래 안색이 흐려져 있었으나 양준이 나가서 맞이한 사람이 낙소만인 것을 보자,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마음속의 울화도 많이 가라앉았다. 이런 소녀가 의탁하러 왔는데 양준이 직접 나가서 맞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느껴졌다.
낙소만도 원래 자신감 넘치고, 엉뚱한 소녀였다. 하지만 창운사지에 다녀온 뒤로는 성격이 많이 변해, 간이 콩알만 하게 작아졌다. 그런데 여송이 음흉한 시선으로 훑어보자, 그녀는 초조해서 저도 모르게 추억몽에게로 몸을 숨겼다.
이에 추억몽이 그를 흘겨보자, 여송은 순식간에 시선을 거두었다.
양준은 범홍, 동경한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편전 안 사람들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여송이 머쓱해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냉소했다.
이때, 사람들과 얘기를 몇 마디 나누지도 못했는데 향천소가 또 뛰어 들어왔다. 이번엔 향천소가 입을 열기 전에 양준이 물었다.
“이번에는 어느 세력이야?”
“젊은 남녀 한 쌍. 실력은 대략 진원 경지 7단계 정도로 보여. 진학서와 서소어라고, 너와 아는 사이라고 하던데.”
향천소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들이라고?”
양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는 사람이야?”
추억몽이 놀라면서 물었다.
“물론 알지!”
양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유명산에서 수련할 때 알게 된 사람인데, 두 사람은 연인이자 선후배야. 영월문 출신이지.”
“영월문이라…….”
추억몽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잘못 기억한 게 아니라면 영월문은 이등 문파일 텐데.”
“이등 문파 맞아.”
양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향천소가 또 물었다.
“두 사람만 찾아왔을 뿐, 다른 고수는 보이지 않아. 어떻게 할까?”
향천소가 이렇게 물은 것은, 진학서와 서소어가 친분을 핑계로 양준에게 빌붙으려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처럼 관계를 이용해 기회를 잡으려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양준, 아무리 알고 지낸 사이였다고 해도 다른 속셈이 있는 자는 거절해야 한다.”
사촌 형으로서 동경한은 양준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아무나 받아 준다면 사람과 물자를 모두 보내온 동맹들의 기분이 상할 것이다. 어쨌든 계승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영월문도 뭔가를 얻어갈 테니까. 하지만 진심으로 도움을 주러 찾아온 것이라면 인원이 적고 실력이 낮아도 괜찮았다. 결국 모두 그들의 성의이기 때문이었다.
“그럴 사람들이 아니야.”
양준은 고개를 저으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잠깐 기다려. 내가 마중 나갔다 올게.”
추억몽은 순간 황당했다. 그녀는 양준이 왜 일개 이등 문파의 사람을 대할 때도 이토록 정중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전에 자미곡 사람들을 맞이하러 갈 때도 이 정도로 기뻐하지는 않았었다.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여송을 바라보니 그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져 있었다.
추억몽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송이 양준의 차별하는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저도 몰래 탄식하고 말았다. 여량이 이번에 자신의 아들을 계승 싸움에 보낸 것은 잘못된 선택인 듯했다. 그녀는 여송과 왕래가 별로 없어 그의 성격이 어떤지 잘 몰랐다. 하지만 지금 보니 큰일을 해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생긋 웃고는 입을 열었다.
“여송, 너도 깊게 생각하지 마. 그 두 사람은 양준과 알던 사이라 그가 직접 나가서 맞이하는 거야. 그들이 들어오면 네가 그들을 따돌려서 쫓아내면 되잖아. 한낱 이등 문파의 사람이니 이곳에 남아 있을 자격이 없지.”
동경한은 놀란 눈빛으로 추억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토록 아량이 없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