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3장. 반가운 이들을 만나다
여송은 몰래 화내다가 추억몽의 말을 듣고 바로 표정이 풀어졌다. 그는 추억몽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줄 알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여기에 있는 분들 중 일등 세력이 아닌 분이 계신가요? 그 영월문이라는 것들은 참 재미있네요. 이등 문파밖에 안 되면서 계승 싸움에 두 명만 보내다니. 참 우습지 않나요? 그들이 무슨 염치로 남아 있을지 참 궁금하네요.”
추억몽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용기를 얻은 여송은 진학서와 서소어가 들어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는 어서 그들에게 위세를 부리고 싶었다.
*관저 밖, 한 쌍의 남녀가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서소어는 한참 기다려도 양준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안쪽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사형, 우리가 아는 양준이 이 양준이 맞을까? 이름을 알렸는데도 왜 나오는 사람이 없지?”
진학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라고 이 양준이 그 양준인지 어떻게 알겠어? 드넓은 천하에 동명이인이 얼마나 많은데.”
“아…….”
서소어는 저도 모르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이곳의 양준이 우리가 아는 양준이 아니면 어떡해? 괜히 도와주러 왔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얼마나 망신이야?”
“망신 좀 당하면 어때. 사부님께서도 원래 우리를 이번 계승 싸움에 참여시킬 생각이 없으셨잖아. 우리 영월문은 이등 세력이고 자본도 많지 않으니, 참여한다고 해도 이득을 얻지 못할 거야. 다만 이곳에 양준이 있다고 해서 사부님이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신 거잖아. 이곳의 양준이 우리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거절당하는 게 오히려 잘된 일이야. 괜한 일에 휘말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 양준이 맞을 거야!”
서소어는 갑자기 확신하는 말투로 말했다.
“애당초 유명산에서 그가 보여줬던 활약상 기억 안 나? 천랑국의 사람들이 그에게 쩔쩔맸잖아? 우리의 목숨도 그가 구해 준 거고. 중도의 양씨 가문 말고는 그런 인물을 키워 낼 수 있을 리 없어.”
유명산에서의 일들을 떠올린 진학서는 쓰게 웃었다. 만약 그때 양준이 없었더라면 대한국의 무인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전멸했을 것이다.
“옳은지 아닌지 조금 뒤면 알게 되겠지.”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양준이 안에서 헐레벌떡 뛰어왔다.
“진 사형, 잘 지냈어?”
양준은 활짝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가 이렇게 밝게 웃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진학서와 서소어는 자신들이 아는 양준이 중도 양씨 가문의 양준이 맞는지 추측하고 있다가 양준이 정말 나타나자, 그만 멍해져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들은 멍하니 서서 양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순간, 두 사람의 심장은 왠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인물과 친분을 맺게 될 줄 예상치 못해서인지 얼굴까지 상기되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두 사람의 조심스러운 모습을 본 양준이 농을 던졌다.
그의 말투에 담긴 살가움을 느낀 두 사람은 곧 정신을 차리고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진학서는 편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양 사제, 오랜만이야.”
서소어는 입을 삐죽거리며 양준을 훑어보더니 씩씩거리며 말했다.
“너 정말 중도 양씨 가문의 자제였구나. 우리는 전혀 몰랐잖아. 미워, 정말!”
“사매!”
진학서는 서소어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눈을 부릅떴다.
“양씨 가문의 자제들은 바깥에서 수련할 때, 자신의 신분을 감춰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 양 사제가 일부러 속인 게 아니잖아.”
“알았어.”
서소어는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놀라서 그래.”
“우선 들어와서 얘기해.”
양준이 두 사람을 안으로 맞이했다.
안으로 들어가며 서소어는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그녀는 이등 문파 출신으로 영월문 미래의 기둥이었지만, 신분이 높지 않은 탓에 평소 일등 세력의 사람들을 만나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초대형 세력의 사람을 알게 되었으니 당연히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그 사람이 그녀가 전부터 알고 지냈고, 함께 어려움을 겪기도 했던 사람이었으니 더욱 놀라웠다.
그녀는 마치 시골에서 금방 올라온 소녀처럼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양준은 두 사람을 데리고 안쪽으로 걸어가며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진학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너희 저택이 얼마나 커? 중도 전체의 십 분의 일 면적을 차지한다던데. 말을 타고 사흘 밤낮은 달려야 겨우 한 바퀴 돌 수 있다던데 정말이야?”
서소어는 물어볼수록 흥분했다.
양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갑자기 경멸 어린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를 들은 서소어는 순간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제야 그녀는 어느샌가 편전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편전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 옷차림이 화려해, 한눈에 신분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모두 실력이 강한 호위가 서 있었는데, 그들이 착용한 장신구도 빛이 반짝이는 것이 등급이 꽤나 높은 비보인 듯했다.
그녀와 진학서도 비보를 착용하고 옷을 반듯하게 입고 있었지만, 그들과 비교했을 때 하늘과 땅 차이였다.
비웃음 소리를 낸 사람은 의자에 앉아 있던 젊은 공자였다. 그는 촌놈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소어는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
양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미소를 지었다.
“남들이 하는 허튼소리는 듣지 마. 양씨 저택은 면적이 작지 않지만, 그렇게 크지도 않아.”
“그래.”
서소어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양준이 그녀를 곤경에서 구해 줬지만, 그녀는 여전히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진학서는 몰래 그녀의 손바닥을 문지르며 위로해 주었다. 그제야 서소어는 기분이 많이 풀어졌다.
그녀는 이곳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다. 만약 진작 알았더라면 절대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녀는 견문이 좁지만, 밖에서 오랫동안 지내다 보니 장소에 따라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양준이 하도 편하게 대해 주고 신분이 고귀하다고 그녀와 진학서를 전혀 깔보지 않기에, 기쁜 나머지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다른 사람들도 듣고 있었을 줄이야.
“자, 소개할게요.”
양준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고자 입을 열었다.
“이 두 분은 밖에서 수련할 때, 저와 동고동락했던 영월문의 진학서와 서소어입니다.”
유명산에서 양준은 진학서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또 나중에 두 사람은 그와 동행하면서 서로 보살펴 주려고도 했었다. 그때 두 사람은 진원 경지 3단계였고, 양준은 겨우 이합 경지 3단계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그를 도와줄 생각으로 동행을 요청했던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양준은 두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양준의 친구면 바로 동경한의 친구이기도 하지.”
동경한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더니 다정한 얼굴로 공수했다. 그는 양준이 밖에서 사귄 친구는 모두 진심으로 사귄 이들로, 이익이나 이해 관계가 전혀 엮이지 않은 친구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양준은 이런 사람들을 가장 좋아했다.
대단한 가문의 공자들은 같은 고민을 품고 있었다. 남들이 먼저 다가오면 우선 이 사람이 뭔가를 바라는 게 아닌가 의심부터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동경한도 두 사람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동 공자!”
진학서는 동경한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지라 눈빛을 반짝이며 답례했다.
“자미곡의 범홍이다.”
“범 형!”
“추씨 가문의 추억몽이에요.”
추억몽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빛이 반짝였는데 절세가인이 따로 없었다. 진학서도, 서소어도 놀란 눈으로 추억몽을 바라보았다.
“추 소저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이건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진학서는 진심 어린 말투로 존경의 뜻을 내비쳤다. 그의 얼굴에는 감탄의 기색도 서려 있었다.
추억몽은 싱긋 웃더니 도발적인 시선으로 양준을 힐끗 보았다.
‘너나 날 무시하지, 난 원래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라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양준의 체면을 봐서 먼저 진학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유독 여송만 거드름을 피우며 의자에 앉아서 경멸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학서는 여송에게 돌아서서 미소를 지으며 공수했다.
“이 분은…….”
그는 여송이 자신들을 얕잡아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방금 전, 비웃음 소리도 여송이 낸 듯했다. 이등 문파의 사람으로서 일등 세가 사람들의 무시를 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는 이런 일을 많이 겪어서 별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양준의 동맹인데 그가 어찌 양준을 난감하게 만들겠는가? 그는 그저 여송과의 갈등을 풀고 싶을 뿐이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면 앞으로 함께 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 조력자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주인인 양준만 난감할 것이다. 하지만 진학서가 이렇게 자세를 낮추는데도 여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귀가 먼 것처럼 찻잔을 들고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양준은 그런 여송을 노려보며 입가에 음산한 미소를 띠었다. 곧이어 그는 고개를 돌려 추억몽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여송은 추억몽의 사촌 동생이지 않는가?
‘도대체 누가 여송에게 이럴 용기를 준 거야? 누가 그의 뒤를 봐주고 있는 거지?’
추억몽도 마침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양준에게 고개를 살며시 저어 보였다.
양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그의 눈빛에 서린 한기가 더욱 차가워졌다.
진학서는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송이 대답하지 않자, 난감한 얼굴로 인내심 있게 물었다.
“혹시 제가 공자께 실수라도 한 것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사과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양해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서소어의 눈에는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왠지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진학서는 그녀의 사형이자 연인이기도 했다. 그녀가 여송에게 비웃음을 당한 것은 괜찮았다. 그저 조금 민망할 뿐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의 영웅이자 사랑하는 이가 이렇게 자세를 낮추고 사과하는 것을 보니 그녀는 마음이 쓰렸다. 게다가 상대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들을 괴롭히고 무시하고 있었다.
서소어는 눈물을 머금은 채 고개를 돌려 양준에게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양준이 나서서 진학서를 곤경에서 구해주기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