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9장. 11개 세력
양준은 방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며칠 동안 폐관 수련을 했으니, 진학서가 언급했던 이들은 이미 도착했을 것이다. 주인으로서 마땅히 얼굴을 비추고 인사도 나누어야 했다.
구불구불한 복도를 지나 절반쯤 걸었을 때, 남초접과 낙소만이 한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두 여인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남 사저, 낙 낭자!”
양준이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남초접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더니 기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반면 낙소만은 흠칫 떨더니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무서워?”
양준은 웃으며 재미있다는 듯이 낙소만을 바라보았다. 낙소만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어딘가 숨고 싶었으나 숨을 곳이 없었다. 그녀는 다리를 떨며 애원하듯 남초접을 바라보았다.
“사제는 소만이 좀 그만 괴롭혀.”
남초접은 양준을 흘겨보다가 멈칫 했다. 곧 손수건을 꺼내더니 그의 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닦아주고는 웃으며 말했다.
“꼬질꼬질한 것 좀 봐. 가서 씻어야겠다. 체통은 지켜야 하잖아.”
양준은 그녀의 이런 다정한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주의할게요. 남 사저.”
양준은 웃는 얼굴로 다시 낙소만에게 물었다.
“말해 봐. 날 왜 그렇게 무서워해? 너한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
낙소만은 기다란 속눈썹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떨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몰라… 아무튼 무서워.”
“얼마나 무서운데?”
양준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순간, 낙소만은 비명을 질렀다.
“오지 마!”
양준은 아연실색해서 얼른 걸음을 멈추었다.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디디면 낙소만이 놀라 기절할 것 같았다.
“그럼 이만. 두 분 이야기 나누시죠.”
그는 난감해하며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과연 영월문뿐만 아니라 진학서가 언급했던 몇몇 문파들도 모두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원래 오는 길이었는데, 진학서의 전갈을 받고 나서 밤낮을 쉬지 않고 길을 재촉했던 것이다.
현재 그들은 추억몽이 안내해 준 대로 각자 방에 머물고 있었다.
양준이 폐관 수련을 끝내고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들 그를 만나기 위해 대전으로 모였다. 수월당의 풍천흔, 문심궁의 좌방, 만화궁의 한소칠, 야함, 유청여, 화약은 그리고 진학서와 서소어까지 더하면 지난번 유명산에서 수련했던 이들은 거의 다 모인 것이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이, 각 문파의 젊은 세대 통솔자인 그들은 모두 각자 기연을 만나 실력과 무공이 적지 않게 향상되어 있었다. 그러나 양준의 강함을 감지한 그들은 모두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으로 이번 생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양준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아 한탄할 뿐이었다.
애당초 유명산에서 만났을 때, 그들은 모두 양준보다 적어도 큰 경지 하나가 높았다. 그러나 지금 양준은 이미 그들을 초월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양준의 진원 경지 8단계는 일반 진원 경지 8단계와 비교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차이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인사를 주고받는 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대전 안은 시끌벅적했다.
“아쉽지만 야청사와 주패의 수라문은 바다 건너에 있고, 자맥의 삼라전은 타국에 있어서 오지 못했어. 아니면 전원이 모였을 텐데.”
진학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그때를 떠올렸다. 애당초 유명산에서 그들은 생사를 함께 했었기에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만나겠지.”
양준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좌방을 보며 물었다.
“여심원은 지금 어때?”
그때 유명산 수련 중, 문심궁에서는 좌방과 여심원만 살아남게 되었다. 다만, 여심원은 운이 나빠 천랑국 무인의 공혼충에 의해 단전이 파괴되어 무공을 쓸 수 없게 됐었다.
양준이 여심원의 안부를 묻자, 사람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관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좌방은 어두운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돌아오고 나서 여 사형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지만, 마음속 고통은 아마 스스로만 알 거야. 사부님도 약왕곡에 가서 알아봤는데 보천단(補天丹) 정도가 효과가 있을 것 같다고 하네. 다만, 들어가는 재료가 워낙 많은데다 품급도 높아 만들 수 있는 이가 극히 드물다고 하더군. 사부님께서는 줄곧 재료를 수집해 놓고 계셔. 약왕곡에 변고가 생기고 지금은 바쁠 때라 외부의 연단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있어서 아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아, 단전을 고칠 수 있는 단약이 있으면 됐어. 때가 되면 내가 연단해 줄 사람을 알아봐 줄게.”
양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 형한테 방법이 있어?”
좌방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곧이어 눈앞의 사람은 애당초 유명산에서 만났던 양준이 아니라, 양씨 가문의 공자라는 것을 떠올렸다.
“아는 사람이 몇 있는데, 며칠 뒤에 곧 도착할 거야.”
양준은 빙그레 웃으며, 머릿속으로 부드럽고 얌전한 얼굴을 떠올렸다.
이때, 추억몽이 눈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양준, 지금 동맹이 몇이나 되는지 알아?”
“열 곳은 안 되지 않나?”
양준이 그녀를 흘끔 보았다.
그녀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는 내친 김에 읊었다.
“추씨, 곽씨, 향씨, 동씨 가문, 자미곡, 영월문, 문심궁, 비우각, 만화궁까지 아홉 곳은 모두 네가 아는 곳이지.”
“맞아. 그런데? 무슨 문제 있어?”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동안 폐관 수련을 했지만, 기본 상황은 다 알고 있었다.
“네가 모르는 세력도 있어.”
추억몽이 입을 오므리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모르는 조력자가 있다고? 재미있네. 얘기해 봐. 어디야?”
양준이 가볍게 웃었다.
“안 그래도 얘기해 주려 했지. 천원성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보내 왔어.”
“천원성?”
양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추억몽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사기 쳐 놓고 까먹은 건 아니지?”
“남강 쪽에 있는 일등 세력이었나?”
그제야 그는 문득 떠올랐다. 지난번 중도로 돌아오면서 습격을 받았을 때, 여씨 가문뿐만 아니라 천원성도 그에게 지목당했었다. 그러나 일부러 찾아가서 공갈을 치거나 전갈을 보내지는 않았었다. 아무 말도 없이 사람과 물자를 보내온 것을 보니 천원성의 관리자가 세상 물정에 훤한 이인 듯했다.
“그래! 통솔자는 천원성 성주의 아들이고, 성격이 온화한 편이야. 온 지 이틀 정도 되었는데, 아랫사람들도 성실해서 충분히 받아들일 만해.”
추억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송처럼 눈치코치 없지만 않으면 돼.”
양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가 알아서 결정해. 쓸 만하면 남기고, 아니면 보내 버려.”
추억몽은 눈앞이 훤해지며 마음속으로 몰래 기뻐했다.
‘지금 나한테 권력을 이양하고 마음껏 재주를 펼쳐 보라는 건가? 역시 가문에서 이탈해 양준과 동맹을 맺기를 잘했어.’
“천원성은 그렇다 치고, 앞으로 모르는 이는 받지 마.”
양준이 또 한마디 당부했다.
“응, 알겠어.”
추억몽은 기뻐하며 대답했다.
“천원성 말고도 내가 모르는 조력자가 있어?”
양준이 다시 물었다.
추억몽의 표정이 진지해지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단목 가문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단목 가문?”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어디서 들어 본 거 같은데, 생각이 안 나네. 그 가문은 나하고 무슨 인연이 있어 의탁하러 온 거야?”
“네 셋째 형님의 외가잖아. 이제 이해됐어?”
추억몽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셋째 형님?”
양준은 크게 놀랐다.
“단목 가문에서는 다섯 명만 왔어. 그런데 신유 경지 8단계, 7단계, 6단계가 각각 한 명, 그리고 신유 경지 5단계 두 명이야.”
“첫날 밤에 살아남은 다섯 명인가?”
양준은 얼굴빛이 살짝 바뀌었다. 첫날 밤 전투에서 단목 가문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삼사십 명 가운데서 결국 다섯 명만 목숨을 부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대접전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만큼 다섯 명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당시 양항과 양영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급하게 양준을 쫓으러 가다 보니 다섯 명을 처리할 겨를이 없었다. 계승 싸움의 규칙대로라면 그들은 이 다섯 명을 설득해 본인의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설득했다고 해도, 단목 가문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이상, 거의 가능성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 그 사람들이야.”
추억몽은 양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매혹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해 봐. 그날 밤 이런 걸 노리고 양철을 놓아준 거 아니야?”
양준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 참, 나를 너무 계산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냥 놔주고 싶어서 놔준 거야. 이렇게 많은 걸 생각하지도 않았어.”
추억몽은 그 말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두드렸다.
“다행이다. 네가 그 정도로 영악하지 않다니. 아니면 정말 너를 상대할 자신이 없어질 뻔했어.”
추억몽의 농담에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양준이 세상에 널리 이름을 날린 추억몽에게도 압박감을 줄 수 있다니!’
“어찌 되었든 양철을 풀어준 건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어. 너한테 의탁하러 온 건 분명 양철이 지시한 일일 테니까.”
추억몽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양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철이 이런 답례를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그 역시도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모두 합치면 열한 곳과 동맹을 맺은 거지.”
추억몽이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세상에서 그녀를 흥분시킬 만한 일은 별반 없었다.
열한 곳 가운데서 초대형 세력은 두 곳, 나머지 아홉 곳 가운데서 영월문만 이등 세력이고, 나머지는 모두 일등 세력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양준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전혀 승리할 가망이 없는 공자였다. 심지어 9할의 사람들이 양준이 첫날 밤도 무사히 넘기지 못하고 탈락할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열한 곳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양준의 발전과 조력자들의 집결 속도는 실로 놀랍기 그지없었다.
인맥과 인간적 매력으로는 양준이 후보자들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다.